공주 갑부 김갑순의 무덤에서 느끼는 공수래공수거의 의미

정권이 바뀌고 계속되는 행정도시 수정안 문제로 대한민국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 국회에서 통과되고 입법화되었어도 대통령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면 정부 정책은 새로운 정권에 의해 지속성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국민들의 불신만 키우는 결과를 낳고 있다.

원안대로vs수정안

국민투표를 한다. 만다. 결론이 어떻게 나든 정부 정책의 일관성에 대한 불신은 이미 극에 달한 상태라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모든 것이 땅, 땅과 권력의 문제라 생각되어 다시 돌아온 3월, 일제에 맞서 항일의 기치를 내세웠던 삼일절을 맞아 조선말 일제강점기 최대의 부동산 갑부였던 공주 김갑순의 삶을 재 조망해 보기로 하자.

김 갑순은 누구인가.

김갑순(金甲淳. 1872∼1960년, 창씨명 金井甲淳)은 한말 일제 초기 관료 출신으로서 국고를 착복하고 관권을 이용, 수탈로 치부하기 시작하여, 망국을 기회로 일제하에서는 철저하게 부일배 노릇을 하면서 ‘거부’가 된 사람이다.

‘일제하 대지주 명부’에 의하면, 1930년 말 현재 그가 공주·대전지역에서 소유한 땅은 3,371정보(1정보는 3천 평)에 이른다. 평(坪)으로 환산하면 1,011만여 평 규모인데 이는 여의도면적(89만평)의 11배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다.

이 가운데 대전에 있는 소유지는 22만 평(1938년 현재)에 달했다. 당시 대전 시가지의 전체 토지가 57만 8천 평이었으니 대전 땅의 약40%가 그의 땅이었던 셈이다. 그가 얼마나 큰 땅 부자였는지 짐작이 간다.

김갑순의 출생과 성장과정

김갑순은 1872년 공주에서 김현종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나 부친과 형이 요절해 13세에 호주가 되었다. 장터에서 국밥장사를 하여 근근이 생활을 영위하던 어머니 아래서 자라며 10대부터 돈벌이에 나섰다고 하는데, 그 때부터 29세 때까지 김갑순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려주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회고담 등으로 전하는 바에 의하면, 15세에 상경해 누군가의 천거로 황실 재정을 총괄하던 이용익 밑에서 심부름을 하다가 재주를 인정받아 봉세관(封稅官: 세리)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20세가 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치 못하고 투전판을 쫓아다니다가 우연히 공주감영의 사령 군노로 들어가게 되어 밀정 노릇을 하였는데, 그러던 중 노름꾼을 잡으러 갔다가 묘령의 여인을 만나게 되고, 그 여자와 의남매를 맺었고 그 여자의 미모에 반한 충청감사에게 소첩으로 중매하게 되면서 출세의 길이 열리는데 의남매를 맺은 여자의 도움으로 총순(總巡)으로부터 충남 각지의 군수를 역임하기에 이르렀다고도 한다.

그리고 또 하나, 김갑순이 여자의 도움으로 총순으로 있던 어느 날 충청감사를 면회하려고 찾아왔으나 만나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리는 선비를 딱하게 여긴 김갑순이 붙잡고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과년한 딸의 혼수비용이 없어서 옛날 친구인 충청감사를 만나려고 했으나, 만나 주지를 않아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사연이었다.

어려운 사정을 알게 된 김갑순은 당나귀에다 광목과 엽전을 실어 혼수비용을 장만해 주었는데, 몇 년 후 도움을 받았던 선비가 호조판서가 되었고, 보은을 하기 위해 사람을 공주로 보내 김갑순을 서울로 불렀고 이로 인해 출세가도로 달렸다는 말도 있다.

아무튼 구한말 ‘관헌 이력서’에 나타난 김갑순의 첫 벼슬은 1900년 충청북도 관찰부 주사였다고 하였는데 하지만 두 달 만에 의원면관(依願免官=자진사퇴)되었고, 김갑순의 자필 이력서에도 빠져 있어 실함(實銜=실제 벼슬)이 아니라 차함(借銜=허울뿐인 벼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한 달 동안 역임한 중추원 의관(議官)도 차함이었을 공산이 크다. 자필로 쓴 관문(官文) 이력서에 의하면 1900년 ‘충북 주사 판임 8등’, 1901년 중추원 의관, 1902년 내장원 봉세관을 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갑순은 1901년 내장원 봉세관에 임명돼 첫 번째 실함을 얻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치부하기 시작한 시기는 이때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장원은 황실의 재정을 총괄하던 기관이었고, 봉세관은 지방에 파견돼 세금 징수를 독려하던 관직이었다. 세금을 만지다 보니 ‘검은 돈’을 축적할 기회도 늘어났다.

김 갑순의 축재과정

특히 1903년 그가 충남의 노성(魯城)군수와 봉세관을 겸임하고 있을 때, 연산군(連山郡)에 있는 선희궁(宣禧宮:조선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거처) 소유의 궁장터 수천 마지기의 사음(舍音:마름=지주로부터 소작지(小作地)의 관리와 감독을 위임받은 사람)을 그의 매부인 하치관(河致寬)에게 맡겼는데, 그 하치관이 이 궁장터의 소작료를 한 마지기당 벼 한 섬씩 초과 징수하여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고 한다.

또 그 곳의 친위영 군대의 양식을 마련하기 위한 군영 농지의 사음도 역시 자기 매부에게 맡겼고 법정 세액 외에 높은 소작료를 받아내었다.

1910년 경술늑약 당시 김갑순은 아산(牙山)군수로 있었는데, 당시 군수에게는 상납금(上納金) 징수 권한을 비롯하여 많은 세금을 거둬들일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당시의 상황은 백성들로부터 각종 세금을 받아들이고도 그것을 즉시 한양에 보내지 않고 장사나 고리대에 그 돈을 사용하면서 국고를 유용하는 것이 상례와도 같았는데 그러던 차에 공전범포탕감령(公錢犯逋蕩減令)이 공포되자 군수들은 막대한 국고금을 사유화하여 많은 재산을 축적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후 1911년까지 김갑순은 부여, 노성(논산시 노성면), 임천(부여군 임천면), 공주, 금화, 아산 등 6개 군 군수로 재직한 10년 동안 그는 가렴주구를 일삼아 거부(巨富) 소리를 들을 정도로 재산을 축적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김갑순은 부임하는 곳마다 군민(郡民)들과 마찰을 일으켰으며 임지를 옮길 때마다 이러한 잘못을 덮으려고 자기 돈을 들여 마치 군민들이 해 준 것처럼 선정을 베푼 수령에게 그 덕을 기리기 위해 바치던 양산인 만인산(萬人傘)을 만들고, 선정을 베푼 양 신문 광고를 게재하는 등 그의 ‘송덕’을 기리는 것처럼 혹세무민하였다고 한다.

1911년 아산 군수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김갑순은 충청남도 참사(參事),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했고, 공주읍회 회원 2회, 충남도회 회원 4회, 충남 농회(農會) 부회장, 수리조합장, 조선박람회 평의원 등을 지냈다.

충남도청의 대전이전과 김갑순의 부동산 투기수법

한일강제합병 이후 맡은 공직은 실권이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권력자들과 친분을 유지할 기회를 얻었고 이를 통해 갖가지 개발정보를 손에 넣게 되어 다양한 방법으로 재산을 불려나가는 기회가 되었다.

1905년 경부선 간이역이 들어설 때만 해도 대전은 한밭이라 불리던 상주인구 180여 명에 불과한 한미한 시골 마을이었다. 대전은 1914년 호남선이 그곳을 기점으로 이어지고 난 이후에야 교통의 요지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

권력자들과 친분을 이용해 대전이 호남선 기점이 될 것이라는 정보를 빼낸 김갑순이 100여 년 전인 당시에 쓴 부동산 투기수법을 지금 기획부동산업자들이 쓰는 수법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개발예정지 미리 찍기, 바람잡이 고용, 남의 돈으로 땅 투기, 역 소문 흘리기 등등 김갑순은 발전 가능성이 높은 대전 땅을 사 모으기 위해 특별한 방법을 동원했다.

먼저 공주에서 으뜸가는 명문가의 집을 산 뒤에 머슴들을 고용해 술값을 준 뒤 장바닥에서 “김갑순이 공주에서 제일 좋은 집을 샀고, 충청 제일의 부자다”라는 소문을 내게 했다. 또한, 땅값을 올리기 위해 자기 돈으로 자기 사람을 시켜 제 땅을 비싸게 사들이는 등의 방법을 동원한다.

김갑순에게는 돈을 맡겨도 된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이렇게 빌린 돈으로 김갑순은 대전 지역의 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김갑순은 남의 돈으로 헐값에 대전 토지 22만 평을 쓸어 담았다. 대전 전체 토지의 40%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토지가 그의 손에 떨어졌다.

대전 일대의 땅을 사 모은 김 갑순은 대전 토지의 가치를 더 끌어올리기 위해 관료들을 상대로 충남 도청 이전 로비를 벌였다. 그는 도청을 비롯한 관공서 부지를 무상으로 헌납하기로 약속한 끝에 1932년 기어이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시켰다. 이를 계기로 공주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공주엔 금강교와 공주공립농업학교, 공주여자사범학교가 지어졌다고 한다.

결국 김갑순이 보유한 경부선 개통 이전 평당 1~2전 하던 대전 토지는 도청 이전 이후 100원 이상으로 치솟았다. 30여 년 만에 1만 배가량 폭등한 셈이다. 충청도 지방 부호였던 그는 일약 전국적인 부호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그에겐 대전 토지 외에도 공주, 예산 일대에 1000만 평의 토지가 있었다. 공주와 대전은 김갑순의 땅을 밟지 않고는 돌아다닐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그의 땅을 관리하는 마름만 30~40명, 소작인은 수만 명에 달했다. 그는 매년 3만 섬 정도의 추수를 얻었지만, 소작료를 선납하게 하거나 지세를 소작인에게 대납하게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해 소작인들을 착취했다.

기업가 김 갑순

김갑순은 기업가로도 수완을 발휘하게 되는데, 공주~대전, 공주~천안 간 자동차 운송업에 뛰어들었고, 대전극장과 공주 금강관 등 영화관을 경영하고, 공주읍내에 시장을 조성해 200여 점포를 임대했으며, 유성온천주식회사를 설립해 유성온천을 개발하기도 했다. 또한, 일본어로 간행된 전국지 조선신문사를 인수해 경영하기도 했다.

김갑순의 친일 행각

그러한 김갑순은 중일전쟁(1937년) 이후 그는 기득권유지와 재산보전을 위해 본격적으로 친일대열에 가담 하고 이를 기화로 고위인사들과 친분을 쌓아 나간다.

일제 황민화운동의 첨병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결성 시 그는 발기인으로 참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이 연맹의 경성(京城)연맹 상담역에 취임하였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그의 부일협력은 극에 달하는데, 임전보국단의 이사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 혹은 흥아보국단 준비위원회 충남대표 그리고 그 외 각 부일단체의 간부로 앞장서 동포의 목숨을 담보로 일제를 위해 혁혁한 공적을 세운다.

그리고 항일독립운동을 하던 단군교 계열의 민족단체인 금강도교(金剛道敎)를 일경에 밀고하여 금강도교의 교두(敎頭)이하 간부 전원을 투옥시켰고. 이 사건으로 피검된 교도는 63명, 이들 중 3명은 고문 끝에 옥사하게 만들었으며 일제의 비호아래 금강도교 소유 단군성전을 압수하여 여기에 ‘역대 총독 열전각(歷代總督列傳閣)’을 건립하여 단군상 대신 역대 조선총독의 사진을 안치해놓고는 조선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하였으며 이곳에서 나온 목재나 건축 자재들은 가져다 자신의 호텔을 짓는데 사용하였다.

김갑순의 말년 공수래 공수거

그런 그는 총독부 고관이 공주에 오면 으레 집으로 데려와 대접했고, 꼭 만나야 할 고관이 만나주지 않으면 순금 명함 갑이나 순금화병을 뇌물로 건네는 방법 등을 써 기어이 만났으며 인맥 쌓기에는 정략결혼도 이용되었다.

김갑순은 7남 4녀를 두었는데, 결혼 전 사망한 두 아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세도가 집안의 자녀들과 혼인시켰다. 큰아들은 내장원경을 지낸 김윤환의 딸과 혼인시켰고, 일곱째 아들은 이완용의 증손녀와 혼인시켰다. 큰사위는 윤치호의 5촌 조카 윤명선이었다. 하지만 해방 이후 그가 쌓은 인맥은 김갑순의 몰락을 막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김갑순의 치부는 땅 투기와 함께 친일이 한 축을 이룬다. 1920년에 충남 도 평의원에 나서고 중추원 참의로 9년간 재임하며 친일의 열매를 맛본 김갑순은 1930~40년대에는 친일의 맨 앞줄에 나섰다.

일제 황민화운동기구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으로 나서고,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흥아보국단 준비위 충남대표를 맡았다.

김갑순은 일경의 비호아래 단군 숭배자들의 단군성전을 압수해 ‘총독 열전각’을 짓고 단군상 대신 역대 조선총독의 사진을 안치해 참배를 강요했다.

해방 이후 김갑순은 반민특위에 체포돼 공주 출신 제헌국회의원 김명동에게 신문을 받는 등 수모를 겪기도 했으나,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공세에 곧 무산되고 이로 인해 풀려나게 된다.

그래서 김갑순은 제2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명동에게 당한 수모를 갚기 위해 두 아들과 장손을 각각 지역구를 달리해 출마시켰지만 엄청난 선거비용을 쏟아 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낙선하고 만다. 당시에는 아이들에게까지 김갑순의 돈이 돌았다는 말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또한 농지개혁 과정에서 그의 토지는 대부분 유상 몰수돼 흩어졌다. 한국전쟁 와중에는 인민군에게 죽임의 위험에 처했지만 그가 데리고 있던 마름의 자식이 마침 인민군 장교로 있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부호로서 그의 명성은 해방 이후 조금씩 퇴색했지만, 김갑순은 1960년 88세를 일기로 사망할 때까지 부를 누렸다. 하지만 그의 사후 한 세대를 거치면서 그의 유산은 오간 데 없이 사라졌다.

그는 갖은 불법과 편법을 동원해 재산을 불려나갈 줄만 알았을 뿐, 건실한 사업체를 일으키지도, 재산을 대대로 이어나갈 후계자를 키우지도 않은 탓이었다고 본다. 아무튼 당대에 흥해 당대에 망한 보기 드문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가 김갑순인 것은 확실하다. 그러한 김갑순의 묘가 공주시 계룡면 구왕리에 있다는 이야기는 10년 전쯤 이곳 계룡산으로 온 이후 줄 곳 들어 왔던 터다.

그래서 이번에 한번 찾아보자고 마음을 먹고 주변의 지인과 함께 길에 들었다. 호젓한 산길을 걸어 10여분 기와가 수북이 쌓인 집터가 나타난다. 예전에 이곳 묘를 관리하던 묘지기의 집이 있었으나 무너진 자리라고 한다.

잠시 더 오르막을 오르니 좌측으로 폐허가 되어 흉물스럽게 남아 있는 건물이 보인다. 복락정(復樂亭), 제실이라고도 하고 김갑순 사당이라고도 불리던 건물이다. 건물 양식은 당대 권력을 상징하듯 웅장하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큰 절집보다 화려하고 장엄했던 갑부의 과거역사가 산산이 부서져 세월 속으로 사라졌듯이 건물 역시 돌보는 이 없어 스러져 가고 있다.

복락정 앞 송덕비.

비에는 그가 일제 때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를 지낸 경력이 자랑스럽게 적혀 있다. 제실 앞에 양각으로 새긴 복락정(復樂亭)현판이 하나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도 찾을 수 없다.
현판의 뜻대로 이 집안에 다시 ‘낙(樂)’이 찾아올 것 같은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다 허물어진 대문과 복락정 본 건물

지인의 말에 의하면 예전에 이곳에 김갑순의 초상과 여러 기물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김갑순의 묘를 지키고[?]있는 묘비

전면에 돈을 주고 산 공주군수, 종2품 가선대부라는 벼슬을 지낸 것을 자랑스레 새기고 있고 뒷면에는 그의 후손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당대 최고의 땅 투기꾼이요 적극 친일협력자였던 김갑순의 묘 최고의 갑부로 손꼽히던 그도 남과 크게 다르지 않게 그저 그런 넓이의 묘 속에 누워 있다.

그가 남긴 것은 그야말로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증거와 그가 늘 사용했다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부자는 모두 도둑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던 일본말 ‘민나 도로보데스’라는 한 마디뿐이다.

그의 묘를 돌아 내려오는 길, 문득 ‘군자는 대로행’이라는 글귀가 생각난다보다 더 큰길을 가지 못하고 자신의 안위와 치부에만 몸 바쳤던 한 가련한 인간의 죽음은 앞으로 살아갈 이들에게 큰 교훈이 되지 않을까?
혹여 작금의 황금만능주의에 젖어 사는 우리자신에게 던지는 화두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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