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오랜 시간 축적된 습성이 굳어져서 만들어지는 성격의 아우라. 그것을 민족성이라 한다면 민족성은 지형적 특성에 의해서 형성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인들의 철저한 태도는 지진과 태풍이라는 커다란 자연재해를 숙명처럼 안고 사는 생명의 본능에서 파생되어진 성격이지 싶다.

△ 이삼평 도자장이 찾은 백제광 앞에서 기념촬영. 아리따 도자 역사가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리타(有田)

도자기 파편으로 조성된 도로, 즐비하게 늘어선 도자기 상점들, 그리고 고령토를 파내서 만들어진 인공 분지! 과연 아리타는 도자기의 마을답다. 

사가현의 아리타는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정유재란 때, 충청도 금강 부근에서 당시 사가번의 번주이던 나베시마에게 끌려 간 조선도공 이삼평에 의해서 세워진 도자기 마을이다.

끌려온 도공 이삼평은 큐슈 북부지역을 헤매다가 아리타에서 고령토를 발견하고, 조선의 오름가마 방식을 이용하여 가마온도를 1300도까지 올리는데 성공하면서 마침내 일본에서 '도자기'를  최초로 만들게 된다.

그 후 일본은 중국 명나라가 망하며 혼란한 틈을 타서, 유럽에 도자기를 수출하였고 명실공히 도자기 왕국으로 자리 잡는데, 일본이 도자기를 유럽에 수출하면서 풍속화 '우키요에'가  인쇄된 포장지를 사용했고, 그 포장지 그림을 본 유럽 인상파 화가들이 영향을 받게 되었다하니 인류문화의 발전의 경로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 도자기로 장식한 이마리 도자기촌 다리위에서 회원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이마리(伊萬里)도예마을

아리타에서 생산된 도자기를 수출하던 이마리 역시 마을을 소개하는 지도를 도자기로 아름답게 꾸민 것을 필두로 다리도 거리도 화장실도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이 도자기로 장식되어 있다. 무엇하나 소홀함이 없는 철저한 성격의 사람들답다. 다리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선 도자기 가게들. 골목을 따라 들어가니 곳곳에 신을 모셔놓은 상점들이 있다.

죽음을 숙명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환경이 만들어낸 특성일까? 일본에는 유독 신이 많다. 버스가 정차한 마을 한가운데 성처럼 자리 잡고 있는 납골당 또한 죽음을 삶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심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지 싶다. 납골당이 들어서는 것을 결사코 반대하던 데모대를 심심찮게 만나는 우리네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 아리따 도자전시관의 도자기로 제작된 시계. 이시계는 1시간마다 문이 열리며 종소리와함께 시간을 알리고 있다.

    (사진우) 문이 열린 상태의 시계

 

 

 

 

 

 

 

 

 

 

야메(八女)

일본의 대표적인 차 산지라는 야메에서 한국어를 가르치신다는 가게 사장님의 환대를 받으면서 일행은 차 시음을 했다. 유난히 다도를 사랑했다던 도요토미 히데요시.

선입견이 얼마나 무서운지, 조선을 침략한 장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예의를 기본으로 하는 다도를 사랑했다는 사실이 도대체 실감나지 않는다. 그러나 다도까지 사랑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인들에게는 힘과 아름다움을 모두 갖춘 영웅으로 존재하겠지. 관념은 참으로 무섭다. 

이삼평의 도자기 기술은 마을이 형성되는 뿌리가 되었고, 그의 숨결은 아리타 뿐 아니라 이마리와 야메시 백성들의 자긍심을 키워주는 힘이 되었다.

무령왕의 영혼이 살아나서 한일양국간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듯이, 아리타의 도신신사에 모셔진 이삼평의 영혼 또한 아직도 살아서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주고 있다.

한 사람의 기술이 한 마을을 형성하는 틀이 되고, 한 사람의 야심이 한 나라를  무너지게 하는 요인이 되니, 과연 마음이 우주라는 말이 맞구나 싶다.

▲ 야메시에서 차 시음을 하고 있는 일행

죽음- 삶의 꽃
아소산

세계최대의 칼데라를 자랑하는 곳으로 1934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곳, 아소산을 향해서 달린다.

도로 양쪽으로 평평하고 넓게 펼쳐진 고원지대와 삼나무 숲의 풍경은 평화스럽기 그지없다. 그러나 화산분출에 의한 용암으로 형성된 지형이기 때문에 지열로 땅이 들떠있어서 뿌리가 깊은 나무는 자랄 수가 없어 풀만 자라게 된 것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은 평화스럽게 느껴졌던 감상적인 감정이 자연의 엄정함에  눌리는 듯했다.   

날씨가 흐려지니 걱정스런 마음으로 가이드는 이야기를 다시 시작한다.
“어제 저녁 기도들 하셨나요? 아소산의 분화구는 보고 싶다고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구까지 갖다가도 뒤돌아 나오곤 하지요.

누군가의 기도 덕분일까? 우리 일행은 마지막 로프웨이를 타고 올라갈 수 있었다. 화산 중앙에 위치한 나카다케 분화구에서는 에머랄드빛 화구가 끓고 있고, 유황증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자연이 거부하면 여지없이 돌아 나와야 하는 곳, 자연을 함부로 지배하려는 사람의 오만함을 반성하게 하는 힘, 아소산엔 자연의 엄숙한 기운이 흐르고 있었다. 

▲ 아소산 국립공원

후나야마고분- 전방후원분, 죽음

역사기행의 마지막 장소는 후쿠오카에서 구마모토로 가는 길목에 있는 후나야마 고분이었다. 죽은 자의 무덤 앞에서 산 자들이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역사기행이라서 그런지 여행을 하는 내내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한다고 했던가. 이런 기회가 아니면 그저 스쳐 지나가기 십상인 곳, 윤용혁 교수님의 설명으로 간신히 가닥을 잡아 고분 안을 들여다본다.

“후나야마고분은 전방후원분입니다. 앞은 원형으로 되어있고 뒤는 방형으로 되어있어서 열쇠형태와 비슷하지요. 이는.." 고분의 형태를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윤 교수님 말씀이 실제로 와 닿질 않는데, 고분에서 출토된 금 신발과 금관 그리고 청동거울 등이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들과 비슷한 것이라는 설명을 듣고 나니 후나야마 고분의 주인공에 대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는 과연 백제인이었을까?

과거는 현재의 나를 돌아보게 하고 미래의 나를 생각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실감하면서,  역사는 상상력을 뿌리로 하는 학문이 아닐까하는 엉뚱한 생각으로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며 고분을 벗어난다. 

고분이 만들어지던 전부터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법한 고목들은 무심한 듯 바람에 몸을 맡기고  벌판에 자리 잡은 작은 꽃들이 재잘거리 듯 바람과 노닐고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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