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향토사대회가 오는 10월 6일부터 7일까지 공주향토문화연구회(회장 최석원) 주최로 공주대학교 산학연구관 강당에서 개최된다. 공주는 구석기시대부터 고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많은 문화가 산재된 곳이다.

월당(月塘) 윤여헌(尹汝憲, 향토사학자, 전 공주대 명예교수, 공주향토문화연구회 명예회장)선생은 공주향토사 발굴에 평생을 바쳐 온 공주 역사와 문화의 산증인으로 월당의 업적은 공주 향토사의 한 장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번 전국향토사대회에 윤용혁 교수가 발표할 ‘月塘 尹汝憲의 공주 향토사 연구’ 를 지상으로 3회에 걸쳐 연재, 윤여헌 선생이 공주 향토사에 남긴 발자취를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 1953년

필자가 공주사범대학 역사교육과에 입학한 1970년, 월당(月塘) 윤여헌(尹汝憲)은 같은 대학 사회교육과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다.

짙은 눈썹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선비 풍모의 그의 얼굴은 누구에게나 깊은 첫인상을 남기는 스타일이다. 일견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는 영화배우 그레고리 펙을 연상시키는 수려한 외모를 가진 그의 전공은 법학이었다.

법학의 학문적 특성상 독일어에도 능하여 한동안은 주 전공이 무엇인지를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공주고에서는 독일어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공주사대에서의 강의도 처음에는 법학이 아닌 독일어 강의에서 시작된 것이었다고 한다.

문학잡지인 '문예'에 독일작가 하우프트만(1862-1946)의 중편작품을 번역할 만큼 그의 독일어는 정평이 있었다.  교양독일어 강의를 수강하고 역사교육과와 사회교육과는 사촌 쯤 되는 거리에 있었지만, 재학시절 필자는 한 번도 월당과는 개인적 관계를 가지지 못하였다. 인연은 1980년 이후 필자가 모교에 전임이 되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1988년 공주사대 교수들로 공주향토문화연구회가 만들어지면서 그는 회장에 선임되고 필자가 총무의 직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만 20년 회장 재임 기간 내내 필자는 총무의 직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향토사학자로서의 월당의 생애는 공주향토문화연구회와 떼어 생각할 수 없고, 그 20여 년 내내 필자는 거기에서 멀지 않은 자리에 있었던 셈이다. 이것이 본고를 집필하게 된 필자의 월당과의 인연이다.

‘향토사학자’에 이르는 길은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는 학창시절의 역사에 대한 취미가 발전하여 향토사학자가 되고, 어떤 이는 공무원 행정 업무를 통하여 혹 어떤 이는 농삿일을 하며 향토사의 길을 간다. 농삿일이나 향토사나 자신이 밟고 있는 땅을 기업(基業)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이에 비하여 월당 윤여헌은 논문 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법학자에서 시작하여 취미의 영역이었던 향토사를 선택한 경우이다.

▲ 1937년 4월 입학기념

▲ 1953년 在 법대 충청학생 일동

 

 

 

 

 

 

 

 

 

 

1. 공주의 ‘향토사학자’가 되기까지

월당 윤여헌은 1928년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에서 부 윤석철과 모 덕수이씨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러나 3, 4세의 어린 시절에 공주시내로 이사를 하였기 때문에 월당은 공주, 특히 공주 시내에서 생애의 대부분을 지낸 셈이 된다.

대학 진학으로 몇 년 공주를 떴던 것을 제외하면 그이만큼 철저하게 공주라는 한 지역에서 80여 성상을 지낸다는 것도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것도 철저히 구시가지의 구가를 아직 지키고 있다는 점에서 그 스스로가 어떤 점에서 ‘향토사적’ 존재이기도 하다.  

월당은 공주중학교 3년 재학 중에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후 그는 학제개편에 의한 3년의 고급 중학교를 다시 이수한다. 지금의 공주고등학교에 해당한다. 공주고보는 일찍이 가루베 지온에 의하여 향토사적 토대가 갖추어진 학교이다.

가루베 지온이 이 학교에 근무한 것은 1927년부터 대략 6년간이었고 이 기간 동안 ??충남향토지??라는 충남 지역 향토사 자료집을 간행하고 교내에 향토사 자료실을 만들어 운영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공주고등학교는 충남 향토사 연구의 ‘발원지’라 할 만한 곳이다. 가루베 지온이 만든 향토자료실은 6.25 때 폭격으로 모두 소실되어 재가 되고 말았지만, 제자들을 통한 향토사적 맥락은 충남 지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 1960년 4월 마곡사에서 의 월당

서울대 4년의 재학시절(1949-1953)은 6.25 전쟁의 소용돌이가 휩쓸던 시기였다. 졸업한 이듬해에 바로 모교 공주고로 돌아왔기 때문에 이 4년 기간은 월당이 공주를 떠나 있었던 거의 유일한 기간이 되었던 셈이다. ‘거의’라고 하는 이유는 공주사대에 재직하는 동안 1년  간의 일본 교토대학 파견 교수의 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1960년 4.19로 민주화의 바람이 불자 전국교원노조가 결성되고 공주고에 재직하던 소장(小壯) 교사 월당은 전교조의 충남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이듬해 5.16으로 정국이 반전되자 그는 교사에서 1년 간 해직 조치되는 아픔을 맛보게 된다.

법학도로서의 민주적 신념이 그를 현실에 참여하도록 부추겼던 것이다. 그로부터 거의 30년이 지난 1988년 대학에서 교수협의회가 결성되자 원로교수였던 월당은 교수협의회보의 창간호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을 피력하였다.

“민주화란 다원화를 전제로 하는 것인 만큼 우선은 구성원의 다양한 의견에 대하여 귀를 기울어야만 한다. 민주화는 독선을 부정하는 것이다. 다양한 의견의 표출과 비판을 거쳐 타협이 이룩될 때 참여의 폭도 넓힐 수 있고 책임도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 2004년 공산성 비석군 앞

월당이 공주사범대학의 교원으로 부임한 것은 1964년의 일이었다. 마침 사회교육과가 신설되어 법학 전공자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1994년까지 공주사범대(공주대)에서 법학 전공의 교수로 재직한 것이 30년 세월이었다.

법학자로서의 월당은 그때 이러한 제목의 논문을 쓰고 있었다. 위헌심사제, 그 비교사적 고찰, 위헌 법령 심사의 제기술, 환경권, 일본헌법의 경우, 정치자금 규제법에 관한 고찰, 국회의원의 면책 특권 … 등이 그것이다. 월당의 ‘본업’을 확인해주는 것이다. 대학에서의 월당은 어디까지나 법학자였다. 법학자의 기본은 사리를 꼼꼼히 따지는 것이다.

이러한 법학적 소양은 업무를 맡았을 때 그 진가를 드러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월당은 30년 재직기간 중 다양한 보직을 역임하게 된다. 도서관장, 교원연수원장, 인문사회과학연구소장, 백제문화연구소장, 그리고 교무과장(지금의 교무처장에 해당) 등이 그것인데, 1980년대 5공 정권의 시퍼런 시절에는 무려 7년 동안 대학신문사의 주간직을 맡았다. 아마 그가 아니면 그 일을 감당할 교수가 없었을 것이다.

‘위헌 법령’과 ‘정치자금규제법’을 논하는 법학도로서의 그의 이미지와는 어울리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는 고서화에 두루 취미를 갖는 선비적 교양을 가지고 있다. 일찍부터 고서화 수집에 관심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본인에게 직접 확인한 것은 아니지만, ‘위헌 법령’과 ‘정치자금 규제법’을 미주알고주알 따지는 일 자체가 월당의 성미에 꼭 들어맞지는 않았던 것 같다. 고서화 취미는 이러한 점에서 그의 정신적 해방구가 되었던 것 같다. 40대 시절 월당은 대학의 교지에 실린 글에서 자신의 서화 수집에 대한 변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 적이 있다.

그림을 좋아하다가 글씨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림을 제쳐 놓고 글씨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과 글씨를 다 함께 좋아하게 되었다. 그림은 그림대로 좋고, 글씨는 글씨대로 좋아서 각각 좋아하게 된 것이지만, 이 두 가지를 다 같이 좋아할 수 있게 된 것을 나로서는 다시없는 안복(眼福), 다시없는 다행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서화를 수집하게 된 동기를 언급한 것인데, 그의 문화에 대한 깊은 애정을 여기에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40대의 나이에 이미 그가 고서화에 있어서 전문가적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림은 그림대로 좋고, 글씨는 글씨대로 좋아” 할 수 있는 그 안목이라는 것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는 법학자의 이면에서 이미 오랫동안 옛 것에 깊이 심취하여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고서화에 대한 취미 때문에 그는 종종 골동품 가게를 기웃거렸으며 거기에서 그는 정신적 안정감을 느끼곤 하였다.

골동품 가게는 마치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고향집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 (중략) 서찰이나 시축(詩軸)을 뒤적이며 실의(失意) 속에 살다간 선비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고, 맷돌 갈며 중노동에 시달리던 여인들의 애처로운 사연들을 그리기도 한다. 이와 같이 골동품 가게는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냥 감상에 젖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화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악(樂)에 대해서도 월당은 일가견을 가졌다고 한다. 직접 목도한 바는 없지만, 수준급의 아코디온 연주자로서 한 때 취미동아리의 악단 그룹 활동을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여기에 좋은 술 맛을 분별할 줄 아는 정도라는 것을 덧붙여 생각하면 삶을 관조하는 선비로서의 덕목을 월당은 두루 갖추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월당이 취미와 직업의 영역을 함께 만족시키는 새로운 문을 들어선 것이 지역에서 발견된 고문서를 분석하여 발표하는 작업이었다. 그 첫 작업이 ?공주목이액견차임과분등전수마련절목(公州牧吏額肩次任?分等傳授磨鍊節目)?이라는 공주의 관아 관련 고문서에 대한 분석 자료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것도 또한 법학 연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자료는 충청도관찰사가 공주목사에게 보낸 공문서로서, 전문적인 한문 및 고문서 독해 능력이 없이는 접근이 아예 불가능한 자료이다.

그가 어려서부터 닦아온 고전 학습, 그리고 그의 천부적 어학 소양이 이 난해한 문서 자료를 해독하는 열쇠가 되었다. 1977년의 일이었다.

그 후 월당은 마침 2년 동안 대학 부설 백제문화연구소의 소장의 직을 맡게 되었다. 연구소장의 주요 업무 중의 하나는 논문집 '백제문화'를 간행하는 일이었다. 역사도시로서의 공주는 백제역사가 중심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한편으로 백제 이외의 공주 역사에 대하여 소홀한 것에 대하여 월당은 자주 그 문제점을 제기하였다.

소장을 맡고 있는 동안 그는 조선시대 공주지역사에 해당하는 2편의 논문을 ??백제문화??에 게재하였다. 공주지방의 동계에 관한 연구 -부전동계를 중심으로-, 조선조 공주(충청) 감영고 - 위치·기구를 중심으로-가 그것이다.

전자는 공주지역의 조선시대 동계(洞契) 문서에 대한 분석이고, 후자는 공주에 있었던 충청감영에 대한 최초의 논고였다. 공주지역의 고문서와 서화에 대한 관심은 이제 전문적인 공주지역사 연구자로서의 자리매김을 하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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