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향토사대회가 10월 6일부터 7일까지 공주향토문화연구회(회장 최석원) 주최로 공주대학교 산학연구관 강당에서 개최됐다.

공주는 구석기시대부터 고대,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중심에 있었던 곳으로 이와 관련된 많은 문화가 산재된 곳이다. 월당(月塘) 윤여헌(尹汝憲, 향토사학자, 전 공주대 명예교수, 공주향토문화연구회 명예회장)선생은 공주향토사 발굴에 평생을 바쳐 온 공주 역사와 문화의 산증인으로 월당의 업적은 공주 향토사의 한 장을 기록하는 일이다.

이번 충남향토사대회에 윤용혁 교수가 발표한 ‘月塘 尹汝憲의 공주 향토사 연구’ 를 지상으로 3회에 걸쳐 연재, 지난호에 이어 두 번째로 윤여헌 선생이 공주 향토사에 남긴 발자취를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편집자주


▲ 월당(1957)
2. 공주향토문화연구회의 조직과 활동

공주는 백제의 왕도, 그리고 이후 1천 5백년 충청 지역의 거점도시로서 발전해왔다. 근대화와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이 공주의 이 같은 거점도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다.

그런 점에서 공주는 문자 그대로 역사도시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얼른 생각하면 역사도시라는 점은 향토사가가 자리를 잡기 좋은 토양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지역의 풍부한 역사가 바로 향토사 연구의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1930년 전후한 시기의 일인 교사 가루베 지온이 활발한 역사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공주가 갖는 이러한 역사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의외로 공주는 향토사가가 자리 잡기에 척박한 여건이 되었다. 해방 이후 공주지역에서 ‘향토사가’로 자타가 인정할만한 인물이 월당 윤여헌 1인 밖에 없다는 점이 이를 잘 증명한다. 역사도시 공주에서 오히려 향토사가가 자랄 수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역사 전문가의 존재와 활동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인구 3만을 헤아리는 소도시 공주에는 해방 이후 국립박물관이 자리 잡았고, 공주교육대학과 사범대학과 같은 고등교육기관이  있었기 때문에 공주라는 도시는 전문적 역사학자가 활동하는 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거기에 공주는 중앙의 학자들이 수시로 출입하고 학문적 견해를 발표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이 같은 전문 사학자의 활동 공간에서 향토사학자가 명함을 내밀 수 있는 여지는 오히려 극히 희박하였다.

▲ 무령왕축제(200. 6)

1960년대 이후 공주에서 전문가로서 향토사적 작업을 담당한 것은 김영배, 박용진, 안승주 등이었다. 우보 김영배는 공주박물관에 근무하는 것을 인연으로 공주에 대한 고고학적 미술사학적 논고를 발표하였지만, 그의 연구에는 향토사가적 풍모가 섞여 있기도 하였다.

공주가 가지고 있는 고고학적 자료의 중요성에 착안한 박용진과 안승주는 공주교대와 공주사대를 중심으로 백제문화연구소를 설치하는 등 전문가로서의 공주에 대한 학문적 업적을 축적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월당이 향토사가로서의 자기 기반을 갖게 된 것은 고서화와 고문서류에 대한 관심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개인적 취미의 하나로서 서화와 문서를 수집하기도 하고 자료를 연구하기도 함으로써 향토사가로서의 자기 기반을 축적하였다. 그의 전공이었던 법학은 고문서에 대한 분석에 일정 부분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월당 윤여헌이 공주지역의 향토사가로서 자신의 지위를 자리매김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1988년 공주향토문화연구회의 창립이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의 창립은 1988년(3월 5일) 시내 중국음식점 부흥루에서 열린 ‘웅진문화동호회’의 발기모임에서 비롯되었다.

▲ 아메미아 히로스케씨 유물기증(2007. 12)

참석자는 윤여헌 이외에 안승주·이철원·최석원·조성보·백기현·윤용혁·강헌규·최덕수 등 9명이었으며, 여기에서 월당은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으며, 총무에는 윤용혁을 지명하였다. 뒤이어 신용호, 이종완, 윤세중, 이상우 등이 입회하여 연말 회원은 13명이 되었다.

그해(1988) 10월에 단체명을 ‘공주향토문화연구회’로 변경하였는데, 이 단체의 특징은 향토사 연구단체이면서 공주사대의 교수들만으로 회원이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처음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공주사대의 교수동아리에서 출발하였던 셈이며, 이점 공주의 지역적 특성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창립한 그 해(1988) 말에 회지 '웅진문화' 창간호를 간행하였다.

“민족사를 강물로 비유한다면 향토사는 세류(細流)와 같다 할 것이다. 세류가 마르지 않고 흐를 때 강의 물줄기도 굵고 도도하게 흐르는 법이다.” 창간호의 권두언에서 월당은 향토사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그렇게 간명하게 요약하였다.

▲ 작고한 아메미아 히로스케씨의 아들인 아메미아 나오유끼씨와 함께(2010. 4)

창립된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 회장에 추대되면서, 월당은 꿈으로 가지고 있던 향토사가의 지위를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가 창립되고 회지 '웅진문화'의 창간호가 간행된 1988년은 월당 윤여헌이 회갑을 맞은 해였다. 윤여헌의 공주 향토사가로서의 공식적 출전(出戰)이 환력에 즈음하여 이루어진 셈이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의 창립은 사실 현재 동 회의 회장으로 있는 우경(牛耕) 최석원의 역할이 컸다. 그는 필자를 비롯한 학내의 몇몇 교수를 묶어 모임의 창립을 주도하였고, 오랜 기간 부회장으로서 모임의 운영을 뒷받침하였다.

그는 ‘돌을 황금 같이’ 여기는 지질학이 전공이어서, 얼른 생각하면 향토사와는 거리가 먼 과학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호고(好古)의 개인적 취향이 있는데다, 공주의 고고학자 우재(愚齋) 안승주 등과도 자별한 인연이 있어 고고학 현장에도 일찍부터 출입하곤 하였다.

뒤에 그는 공주대의 4대 총장을 역임하면서 학내에 청파 분청도예실, 공주대 교사(校史) 자료실을 설치하는 등 역사에 대한 관심을 대학 운영에 반영하였으며, 지질학을 문화재와 접목하여 석조문화재라는 학문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하면서 문화재청의 문화재위원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 재일본한국교수 자축연(1973. 2월 교토시청 풍장)

지금 생각해보면 원래 지질학 자체가 땅을 기반으로 하는 학문이라는 점에서 향토사와 연결되는 맥락이 있었던 것 같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는 월 1회 정기모임을 가지면서 주로 현장 답사를 시행하고, 종종 간단한 세미나 혹은 특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한편 연 1회 ‘웅진문화’ 회지를 간행하였는데, 회지는 2009년 22집까지 간행되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원래 공주사대 교수들의 일종의 학내 동아리모임이었다. 그런데 월당은 공주대에서 정년퇴임하면서도 회장직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를 합법화하기 위해서는 회원자격을 학외까지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실 향토회는 지역에 기반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시민 기반의 향토회가 바람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94년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회원자격을 학외(學外)에 개방함으로써 비로소 부족했던 지역기반의 성격을 크게 보완하게 되었다.

월 1회의 답사 모임은 일종의 시민 답사 여행의 성격을 겸하여, 공주 혹은 주변지역에 대한 탐방이 지속되었다. 대략 연 10회의 답사가 시행되었으므로, 그동안 현지답사는 200회 이상 지속한 셈이 된다. 답사에는 종종 역사, 지리, 문학, 고고학, 미술사, 민속학 등 관련 학문의 전문가들이 동행함으로써 답사의 질을 심화하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향토사 혹은 지역문제 관련의 세미나 혹은 외부 인사 초청 특강이 종종 이루어졌다. <충남도청 입지에 관한 심포지움>(공주문예회관, 1996.6.11), <무령왕릉 보존, 무엇이 문제인가>(공주대 자연대학 강당, 1997.9.11), <공주향토문화의 제문제>(공주대 인문대 세미나실, 2006.1.31) 등이 그 예이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의 운영과 관련하여 공주무령왕네트워크협의회를 자매단체로 발족시킨 것도 특기할 사항중의 하나이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는 2002년 7월, ‘제1기 공주향토문화학교’라 하여  4박5일 일정의 큐슈역사탐방 프로그램을 운영하였다.

34명이 자비 참가한 이 프로그램은, 2001년 필자가 무령왕의 출생지로 기록되어 있는 사가현 가카라시마를 방문한 것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으며, 부산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후쿠오카로 들어가 사가, 나가사키, 구마모토현 등 북큐슈 일대 한일관계사 유적을 탐방하는 것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같은 해 가카라시마에 무령왕탄생제가 만들어지면서 무령왕탄생제에의 참가를 포함하는 역사 탐방 프로그램으로 발전되고 보다 다양한 한일 지역 간 교류의 필요성에 의하여 2004년 무령왕네트워크협의회라는 단체로 나누고, 사업의 필요에 의하여 상호 협조를 도모하는 지매단체로 운영되고 있다.

2006년 가카라시마 현지에 무령왕기념비를 건립하고, 2008년 ‘공주회’ 이사장 아메미야 히로스케(雨宮宏輔)의 반출 문화재 기증 사업 등은 무령왕네트워크와의 협력에 의하여 공동으로 추진한 사업들이다. 이 같은 사업에 월당이 공주향토문화연구회장으로서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물론이다.  

3. 월당 윤여헌의 향토사 연구

월당 윤여헌의 향토사 연구는 공주지역의 고문서와 고기록에 대한 관심이 그 뼈대를 이루고 있다. 그가 처음 공주지역의 연구 논문을 통하여 향토사학자로서의 길을 시작한 것도 공주 관아의 문서 분석이고, 이후에도 공주 지역 문서는 그의 주된 관심이었다.

공주 우성면 부전동(浮田洞) 동계(洞契)의 발견은 그의 학문적 업적이라 할 수 있고, 그밖에도 공주향교 관련 문서, 공주 민역청(民役廳)에 대한 자료 등이 그의 손에서 분석되었다. 다음은 이 같은 문서 분석의 글들이다.

공주지방의 동계에 관한 연구 -부전동계를 중심으로- 백제문화 18ㆍ19, 1989
호서 양사재의 설립동기- 웅진문화 6, 1993
공주향교 부설 양사재의 운영에 관하여- 웅진문화 7, 1994
공주목 견역청에 대하여- 웅진문화 8, 1995
공주목 민역청에 대하여- 웅진문화  9, 1996
<조선후기> 군사훈련은 이렇게 했다- 웅진문화 10, 1997

양사재에 대한 2편 글은 공주 향교에 부설되었던 장학 사업에 대한 자료를 발굴하여 정리한 것이다. 1850년과 1852년의 이 자료는 과거시험을 목표로 연수생을 선발, 집단적으로 교육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것이다. 연수생을 선발하여 향교에서 숙식하며 수학할 수 있도록 재정 충당 방안과 운영 지침을 규정한 것이다.

조선시대 지방 교육에 관한 자료를 발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견역청(?役廳)과 민역청 관련 자료는 공주향교 소장의 자료와 '공산지'의 추가 자료를 통하여 밝힌 것으로 이들 자료는 공주지역의 일종의 지방세 징수에 대한 자료이다.

견역청절목은 1782년 자료  ‘호적지사가(戶籍紙寫價)’와 같은 민(民)에게 부과되던 세금을 면제하고 대신 이를 충당할 수 있는 재원을 마련 운영하는 방안에 관한 규정이었다.

즉 민의 경제적 부담을 덜게 하는 방안으로 감영에서 일정액을 출연하여 이 기금을 운용, 그 이윤으로 필요한 경비에 충당하는 것인데 1782년 감영 출연 기금은 토지 105결, 현금 500량이었다.

민역청절목은 1716년 민의 경제적 부담을 위하여 설치된 기구로 호당 조세 2두를 갹출하여 이를 재원으로 삼아 ‘존본취식(存本取息)’의 방식으로 운용하기 위한 규정이었다.

부전동 동계 논문은 공주시 우성면 소재의 향촌 부전동에서 17세기 초 이후 300여 년 간 실시된 동계(洞契) 자료를 소개하고 아울러 그 중수(重修) 과정을 통하여 운영의 실태 및 향촌사회의 내부 변화를 고찰한 것이다.

이에 의하여 조선조 후기 공주지역사회 사족 동향의 일단을 밝히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후기 군사훈련 관계의 논고는 <조련홀기(調鍊笏記)>라는 자료를 발굴하여 군사훈련의 실제적 매뉴얼을 확인한 것으로 군사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내용이다.

이들 문서 자료는 해독이 매우 어려운 부분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원만한 한문의 지식이 있더라도 선뜻 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자료들이다. 이들 자료를 꼼꼼히 읽고 분석하여 정리함으로써 공주 지역 향토사의 한 부분을 밝히는데 공헌한 것이다.

공주가 조선시대의 충청감영의 소재처였다는 것에 대하여 월당은 무한한 긍지를 가지고 있었고, 때문에 고문서 자료 이외에 충청감영에 대한 논의도 그의 관심사였다.

공주감영 사령들의 행패-웅진문화 2ㆍ3, 1990
조선조 공주(충청) 감영고 위치ㆍ기구를 중심으로-백제문화 20, 1990
공주(충청) 감영고-웅진문화4, 1991

충청감영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감영 이전의 전말, 감영의 위치와 건물 등을 공산지와 실록 등의 자료를 이용하여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그 가운데 공주 감영의 개영시기에 대한 혼란을 각종 자료를 비교 검토하여 1602년으로 논증한 것은 매우 중요한 업적이었다.

2002년 충청감영 4백주년 행사는 월당이 고증한 연대 고증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이때의 학문적 논의는 월당의 충청감영 연구가 그 토대가 되었다. 감영 관련 논고는 충청감영에 대한 선구적 연구 업적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월당의 관심은 공주의 유적과 건조물에까지 옮겨졌다.

공주 금강 8정-웅진문화 1, 1988
옥룡동소재 일본인묘 재론-웅진문화 19, 2006
다시 보는 문화유적-웅진문화 12, 13, 1999, 2000
살아 있는 역사박물관 ,공주문화가 살아있는 이야기-공주 1997
일제하 공주박물관 설치의 시대적 배경-'공주와 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2009

공주 금강 8정(錦江八亭)에 대한 논문은 세인들에게 잊혀진 ‘8정’의 존재를 다시 인식시키고, 8정의 배경이 되는 금강에 대한 지리적 역사적 관심을 환기한 것이었다. 근년 금강에 대한 정비 사업이 추진되면서, 금강 8정의 존재와 이에 대한 연구는 매우 유익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공주의 근대 사적에 대해서는 이제 공주에서 월당만큼 내용을 아는 이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근대 공주의 사정에 대하여 일단 월당에게 묻고 난 다음 자료를 찾게 된다. 이 같은 월당만의 지식이 담겨져 있는 것이 위에서 언급한 여러 글들이다. 금석문자료, 혹은 서화에 대한 관심도 향토사연구에 반영되었다.

없어진 ‘관찰사 이공익보 사적비-웅진문화 11, 1998
(속) 향토출신 근대서화가=웅진문화 16, 2003
무령왕릉 출토 매지권에 대하여-웅진문화 18, 2005
공주 근대향토작가 지상전-웅진문화 20, 2007

금강 변에서 인양된 관찰사 이익보(李益輔, 1708-1767)의 비석은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월당이 서둘러 자료를 정리해두었기 때문에 자료나마 남게 된 것이다. 비문을 통하여 이익보가 장대(將臺)를 설치하고, 1751년 공북루와 공산성을 개축하며, 금강 변에 벽허정(碧虛亭)이라는 정자를 건립한 사실들을 새로 밝혀냈다.

공주 출신 근대 서화가에 대한 논고는 월당이 아니면 아무도 논의할 수 없는 영역이다. 저명한 작가는 아니지만 그러나 어려운 환경에서 지역문화를 만들어가던 근대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이를 발굴 정리한 것은 지역의 문화 예술사적 측면에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월당의 논고 중 많은 부분은 공주에 대한 신 자료의 발굴을 토대로 한 것이었다. 이상에 언급한 논고 이외에도 지역의 향토사 자료를 다수 발굴한 것은 그의 공헌중의 하나이다.

공주시 정안면 운궁리에 있던 옛 서당 문회당의 <문회당기(文會堂記)>, 우성면 내산리 부전동의 <산제문(山祭文)과 천제문(川祭文)>, 경재(敬齊) 이해(李瀣, 1691-1719)의 계룡산 순례기인 <유계룡산기(遊鷄龍山記)>, <공주감영읍지>, 조선 서리의 진정서, 쌍수정 그림이 있는 청화백자, 1920년대 공산성과 배다리에 대한 세가야(世外)의 그림, 어사 박문수의 집터 확인(공주시 교동 52, 62-1) 등이 그것이다.

월당의 향토사 활동 중 논문과 자료 소개 이외에 지역문화에 대한 각종의 제언도 주목할 부분이다. 금강변의 승지 공주 ‘청벽(淸壁)’은 ‘창벽(蒼壁)’으로 불러야 한다, 월파당을 복원해야한다, ‘곰나루’는 ‘고마나루’로 불러야 한다, 대통사지를 조사하고 여기에 불교자료관을 건립해야 한다 등의 제언이 그것이다. 그의 주장 가운데 곰나루는 ‘고마나루’라는 이름으로 국가 사적 및 명승에 지정됨으로써, ‘고마나루’라는 이름이 공식화하였다.

대통사지의 ‘불교자료관’은 대통사지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한 것인데, 당간지주 주변에 대한 기왕의 조사에 대해서도 이곳이 원래의 대통사지가 아니라는 점과, 일대의 가옥을 매입 철거한 후 비로소 사지의 조사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경청할 의견임이 분명하지만 불교자료관 건립이라는 대통사지에 대한 제언은 아직 실현되고 있지 않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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