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근대사 재조명 미흡해

문화유산이란 우리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다. 그것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국보급 유물에서부터 지방 민속자료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조상들의 물질적인 삶의 편린과 정신적인 문화의 흔적을 보면서 과거를 반추해 보고 오늘을 재조명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설계하는 것이다.

이것이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현시점에서 우리가 무엇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것인가를 되새겨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동안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유·무형을 막론하고 선사시대부터 고대를 거쳐 조선조까지의 문화유산에는 보존과 연구에 신경을 쓰면서도 우리민족의 뼈아픈 역사인 근대사에 대한 재조명이 사실 미흡한 상태였다.

역사는 우리가 살아온 삶의 흔적이자 발자취다. 그런 의미에서 공주의 근대건축물은 공주지역민들의 삶의 흔적이자 소중한 문화적 자산이다.

우리 근대사에서 공주는 충청도의 중심이었다. 1603년 조선 선조 때 충청감영이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된 이래 공주는 300여년간 감영 소재지였다. 1895년에 8도제가 폐지되고, 1896년에 충청도가 남도와 북도로 분리되면서 공주는 1932년까지 충청남도의 도청소재지로 발전했던 곳이다.

이런 공주에는 근대사의 흔적을 간직한 건축물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옛 읍사무소 건물과 이밖에 1937년에 프랑스 신부가 지은 중동성당, 예배보는 남녀 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ㄱ자 형태로 지은 공주제일감리교회, 영명학교의 선교사 숙소건물 등이 남아 공주의 시대변화와 발전상을 말해주고 있다.

근대건축물 중 영명중학교 본관, 엽연초생산조합, 충남잠종장 등 많은 건물들이 헐렸고 현재는 몇 개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금부터라도 이 역사의 건물들을 잘 보존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현재 남아있는 근대건축물을 사진과 함께 3회에 걸쳐 연재하기로 한다.


○중동 성당
◇ 소재지 : 공주시 중동 31-2
◇ 건립 : 1936년
◇ 규모 : 대지 - 6,548.66㎡  건축 - 379.45㎡
◇ 구조 : 벽돌/박공

중동성당은 유구읍 명곡리 요골공소(1884년)에서 현 위치로 이전되었고 1897년 5월에 부임한 진보안(陳普安) 베드로 신부가 1898년에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교리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되었다.

서양 중세기에 유행하였던 고딕 건축양식을 따르고 있는데 평면은 약간 라틴식 십자가형이고 내부는 3랑식(三廊式)이다. 가파른 언덕위에 높은 종탑을 세워 종교건물의 위엄을 표현하였다. 전통적인 목조건물에서 현대건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모습을 건축 세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건물은 1921년 6월 공주본당 제5대 신부로 부임한 최종철 마르코 신부님(재임기간 24년 5개월)께서 1936년에 착공하여 1937년에 완공한 천주교 성당 건물로 현재는 본당건물과 교육관이 남아있는데 최종철 마르코 신부의 삶이 묻어있는 건축물이다.

최 신부는 신학생 때, 폐결핵에 걸려 서품을 받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매일 밤 신학교의 성모님 상 앞에 가서 기도를 드렸다. “이대로 두면 이 아들은 신부가 못되고 죽는 길 밖에 없습니다. 오늘부터 손에서 묵주를 놓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이 묵주기도의 정성을 살피시어 다 죽게 된 저를 완쾌시켜 신부가 되게 해주시면 성모님께 성당을 지어 봉헌하겠습니다.”

1920년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공주본당 주임으로 발령받은 최종철 마르코 신부는 그 약속을 실천하였다. 1937년 5월에 공주 국고개 언덕에 아름다운 성당을 봉헌하였다.

1945년 11월 25일 세상을 떠난 최 신부는 자신을 성당이 보이는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으로 남겼다. 6·25사변 때 이 성당 사제관은 정치보위부와 인민재판소가 되었으며, 성당마당에서 최 신부의 형(최종수 요한)이 인민군에게 총살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기도 했다.

 

 

 

 

 

 

 

 

 

 

1998년 8월 김영환 타대오 신부가 제 17대 신부로 부임하여 대대적인 보수와 수녀원 신축 등 성당 100주년 행사를 하였고 1995년 3월 6일 충남문화재 기념물(제142호)로 지정되었다.

○ 공주디자인 카페(舊 공주읍사무소)
◇ 소재지 : 공주시 반죽동 221-1
◇ 건립 : 1920년
◇ 건축면적 : 194.94㎡
◇ 구조 : 붉은 벽돌/평슬래브

벽돌조 2층 규모(연면적 333.69㎡)의 이 건물은 규모는 그리 크다고 할 수 없으나 전면의 기둥처리가 장엄해 엄숙함을 느끼게 한다. 지방에 남아 있는 서구적 건축양식에 의한 근대건축물로서 희소성 및 건축적 가치가 높은 건물로 평가된다.

1920년에 충남금융조합 연합회의 회관으로 건립된 이 건물은 1930년부터 1985년까지 공주읍사무소로 사용되었으며 도청 시절에는 상공회의소로 사용하였다.

이후 1986년에 공주 읍이 시로 승격되면서 1988년까지 공주시청사로 사용되었으며 1989년에 이전하면서 개인소유로 몇 차례 소유권을 거쳐 사설 미술학원으로 운영되었다.

건물 매매 당시의 상황은 잘 알 수 없으나 공주 근대 역사를 간직한 건물을 꼭 팔아야 했는지에 대해서 아쉬운 부분이나 2009년 다행히 공주시가 다시 매입해 문화재청에 문화재등록을 신청하여 2009년 10월 12일 등록문화재(제443호)로 등록, 공주의 역사를 지켜갈 수 있게 됐다.

최근에는 카페와 사진전시회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면서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상단 중앙 에 ‘공주읍 충청남도(公州邑忠淸南道)’라는 석각이 새겨져 있는데 아쉽게도 ‘읍(邑), 남(南)’ 두 글자가 빠져나갔다.

○공주 제일 감리교회
◇ 소재지 : 공주시 봉황동 10
◇ 건립 : 1930년
◇ 구조 : 붉은 벽돌
 
공주 제일 감리교회는 1903년 제 1대 맥길(William BMcGill)선교사와 이용주 전도사가 파송되어 남부면 하리동(현, 앵산공원 서쪽)에 초가 2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남부지방 최초의 감리교회로 창설되었다.

◇ 소재지 : 공주시 봉황동 10◇ 건립 : 1930년◇ 구조 : 붉은 벽돌 공주 제일 감리교회는 1903년 제 1대 맥길(William BMcGill)선교사와 이용주 전도사가 파송되어 남부면 하리동(현, 앵산공원 서쪽)에 초가 2동을 구입하여 예배를 드림으로 남부지방 최초의 감리교회로 창설되었다.

이후 1905년에 샤프 선교사가 파송되어 오면서 부인인 사애리시가 명선여학교를 창설하여 교육 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06년에는 윌리암(F,E.C Williams) 선교사가 파송되어 영명학교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협산자(狹傘者) 예배당을 건축하였는데 협산자 예배당은 현, 공주 제일 감리교회의 효시로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할아버지의 헌금으로 1909년 봄 예배당을 새로 짓고 우산을 옆에 낀 사람이 바친 헌금으로 지은 집이라는 뜻에서 ‘협산자’ 예배당이라 불렀다.

건립당시 예배당의 지붕은 뾰족하고 예배실은 ‘┐’자형으로 되어 있어 예배 시에 남자 성도와 여자 성도가 서로 바라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다만 중앙에서 설교하는 목사만 보이도록 했을 뿐이었다고 한다.

1941년 일본에 의해 교회 폐쇄령이 내려지고 1950년 6·25전쟁으로 예배당이 파괴되어 구 예배당을 수리하여 예배를 보았다고 하며 1979년 6월 성전의 일부를 개축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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