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문화유산은 지역민들의 소중한 자산

문화유산이란 우리조상들이 이룩해 놓은 것을 통틀어 일컫는다. 그것에는 문화재로 등록된 국보급 유물에서부터 지방 민속자료에 이르기까지 많은 문화유산을 갖고 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조상들의 물질적인 삶의 편린과 정신적인 문화의 흔적을 보면서 과거를 반추해 보고 오늘을 재조명하면서 보다 나은 내일을 설계하는 것이다.

그동안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유·무형을 막론하고 선사시대부터 고대를 거쳐 조선조까지의 문화유산에는 보존과 연구에 신경을 쓰면서도 우리민족의 뼈아픈 역사인 근대사에 대한 재조명이 사실 미흡한 상태였다.

 현재는 몇 개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크지만 지금부터라도 이 역사의 건물들을 잘 보존하여 공주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공주의 근대건축물 다시보기 세 번째로 현재 남아있는 근대건축물과 지금은 사라진 건축물들을 사진과 함께 살펴본다.


○ 선화당(충남유형문화재 92호) ○
◇ 소재지 : 공주시 웅진동 332-9
◇ 건립 : 1833년
◇ 구조 : 목조/팔작기와

◇ 소재지 : 공주시 웅진동 332-9◇ 건립 : 1833년 ◇ 구조 : 목조/팔작기와

건물은 정면 8칸, 측면 4칸의 평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초창기의 건물이 정면 9칸이었던 것을 이전 복원하면서 원형이 변경되어 정면 8칸으로 변화되었다.

임금의 덕을 드러내어 널리 떨치고 백성을 교화하는 건물임을 뜻하는 ‘선화당(宣化堂)’이라는 현판을 앞면 중앙에 달았다. 조선중기의 수법이 남아있는 조선후기 관아 건축으로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화당은 각 도의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곳으로 고을의 동헌에 해당한다. 공주는 충청도 4목(공주목, 충주목, 홍주목, 청주목)의 하나로 감영청은 원래 태조 4년(1395)에 충주에 설치되었으나 선조 35년(1602)에 충주에서 공주로 옮겨와 충청도4목 15군 35현을 관장하는 지방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관찰사의 행정청이었던 선화당은 순조 33년(1833)에 건축된 건물인데 원래 공주사대부고의 부지내에 있었던 것을 후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 진열관으로 이용하다가 1988년 해체하여 현재의 국립공주박물관 옆 부지에 복원하였다.

○ 공주동헌 ○

◇ 소재지 : 공주시 웅진동 332-9
◇ 건립 : 1896년(1994년 복원)
◇ 구조 : 목조/팔작기와

공주 동헌은 전면 8칸, 측면 4칸의 목조건물로 5량식 구조의 팔작지붕위에 기와로 마감하였다. 이 건물은 고종 33년(1896)건립되어 1911년까지 목사(牧使)의 정청(政廳)으로 지방의 일반 행정 업무와 재판 등이 여기서 행해졌다.

감영 소재지인 공주는 관찰사가 목사를 겸임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목사의 생활처소인 내아(서헌이라고도 함)와 구분하여 그 동편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헌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동헌은 1911~1971년까지 공주의료원 부속 건물로 사용하다가 해체되어 1984년 황새바위 지역에 복원하였으나 1986년 초 건물일부가 화재로 인해 해체하여 보관하던 중 1994년 현재의 위치에 원래의 보습대로 이전 복원하였다. 현재 공주시 향토문화유적 유형 제1호로 관리되고 있다.

○ 포정사 ○

◇ 소재지 : 공주시 웅진동 332-9
◇ 건립 : 1896년(1993년 복원)◇ 규모 : 대지면적 - 51,896㎡
◇ 구조 : 목조(한식)/우진각기와

포정사는 전면 5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문루건물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우진각지붕 집으로 지붕 모양 이외에는 문루 건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찾아볼 수 없다.

조선시대 충청도 관찰사가 공무를 집행하던 선화당 앞에 서 있던 정문이다. 포정사로 되어있던 현판을 일제강점기에 금남루로 개칭, 공주는 충청도 전체를 관장하던 지방행정의 중심지로 감영에는 50여 채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선화당과 포정사 및 삼문, 부속건물 1채만 남아있다.

원래는 공주사범대학부속고등학교 옆에 있었는데 옛 공주군청 옆으로 옮겨지어 공주 제2감리교회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교동에 있던 것을 1993년 선화당 앞으로 복원하였다.

포정사 및 삼문은 다른 용도로 사용되면서 변형이 있었지만 조선 후기 관아건물 연구의 중요한 자료이다.

○ 사라진 근대건축물 ○

△ 충청남도 잠종장 - 공주시 봉황동
· 건축년도 : 1924년

잠종장은 원래 1915년 11월 10일 산성내에 잠종보호고(빙고)를 설치하고 개소하였었다. 당시의 명칭은 ‘충남도원 잠종제조소’로 출발했으나 1916년 봉황동으로 이전하면서 ‘잠종장’으로 개칭하였다. 이 건물은 시청의 이건과 함께 1991년 철거되었다.

△ 제일은행 - 공주시 중동
· 건축년도 : 1920년대(?)

‘공산지’에 의하면 “1905년 광무 9년에 자본금 50萬으로… 한호농공은행(韓湖農工銀行)을 설립하고 금융 업무를 개시하니 이것이 은행으로서 충남에서 처음이며 감영소재지의 유일한 금융기관으로 발족하였는데 그 후 각지의 농공은행이 합병됨에 따라 농공은행 공주지점으로 개편하였다가 일제하에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으로 개칭하였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8년도에 헐려 지금은 대형서점과 문구점이 들어서 있다.

△ 충청남도립 공주의원 - 공주시 중동
· 건축년도 : 1920년대(?)

‘공산지’에 의하면 본원은 1910년 9월 5일에 ‘공주자혜의원(公州慈惠醫院)’으로 발족하고 1925년에는 ‘도립공주의원’으로 개명하였다. 현재는 구 건물은 모두 철거되어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서고 ‘공주의료원’이 자리하고 있다.

△ 영명중학교 舊 건물 - 공주시 중동

1925년에 건축된 연와조 2층으로 된 이 건물은 현재 중학교 신축을 위하여 매각돼 1973년에 목조건물 2동과 함께 헐렸다.

충남의 가장 오래된 근대 신교육기관으로 100여년 전 미국인 윌리암 선교사가 설립한 것으로 1921년에 건립 되었다. 이 학교를 거친 인물들 가운데는 3·1운동의 주역인 유관순, 근대정치인 조병옥, 신문학 초창기의 소설가 방인근, 교육자 임영신 등이 있다.

△ 영명여학당 건물 - 공주시 중학동

1916년에 건축되었으며 붉은 벽돌조의 2층 집이다. 이 건물은 아쉽게도 1987년 7월 22일 폭우로 붕괴되었다.

△ 공주여자사범대학교(현 공주교육대학)건물 - 공주시 금학동

1942년 9월 1일에 건축된  평수는 2020.2㎡의 건물이다. 공주가 ‘교육의 도시’로 자리매김하는데 한 몫을 한 옛 공주여자사범대학교가 자리하던 곳이었다.

△ 공주금융조합(현 엽연초생산조합) - 공주시 중동

이 건물은 1920년(?)대에 건축하였으며 연와벽돌조로 지은 건평 174.97㎡의 단층 건물이다. 이 건물은 1956년 이후 ‘농업은행 공주지점’ 혹은 ‘농업협동조합’으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엽연초생산조합’건물로 사용하다 주차장 부지로 쓰기위해 2003년 철거됐다.

△ 아루스사장과 문화이발관 건물 - 공주시 반죽동

시멘트로 지어진 2층의 허름한 이 건물에는 ‘문화이발관’과 ‘아루스사장’의 석간판이 그대로 건물 벽에 남아 있었고 이름 아래에는 ‘전화 120번’도 함께 새겨져 있어 세월의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일제 시대에 지어진 이 건물은 그 당시 번성했던 ‘공주군 1번지’로서의 반죽동의 역사를 알 수 있게 해주었다.

△舊 의당면 사무소 - 공주시 의당면 월곡리

1926년에 건립된 이 건물은 부지 내에 사무소와 주거시설을 포함한 부속 등 8동의 건물이 있었다. 사무소 부지는 마을 공유지였으나 관에 제공했다. 1980년 면사무소가 현 위치(청룡리)로 이전과 함께 월곡리 주민에게 다시 환원되었으며 몇 년 전 해체됐다.

△ 농촌지도소 정안지소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256번지 부근에 있었던 이 건물은 1950년대 건립됐다. 사설 우체국으로 인가받고 운영되다가 이후 농촌지도소에 임대하여 정안지소로 사용되었으나 2009년 8월 현 정안주민센터 신축건립으로 해체됐다.

△ 쌍화탕 다방

정확한 건축연대는 알 길이 없으나 반죽동은 충남도청이 위치하였던 곳으로 일제시대를 거쳐 최근까지 ‘공주군 1번지’로서의 역할을 하던 곳이다. 시청, 검찰청, 법원 등을 주위에 끼고 있어 그 당시에는 주요 인사들의 만남의 장소로 꽤나 번창하였던 다방이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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