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의 연구 편력

가루베 지온이 공주고보에서 교사로서 담당하였던 과목은 역사가 아니었다. 당시의 ‘국어’, 즉 일본어였고 보직으로 도서부장 등의 업무를 맡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일본으로 귀국하여 1948년부터 1970년 사망할 때까지 니혼대학(日本大學)에 복무하였지만 공주 등지에서의 백제사 연구 20년은 그의 교육과 연구의 가장 중심적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 1930년대 송산리고분군의 원경

이때 그는 백제의 산야를 직접 누비며,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고고학 잡지' 등 학계의 중앙 전문잡지를 통하여 정리 발표하였던 것이다.

가루베가 공주에서의 유적 조사 이후 전문 학술잡지에 처음 발표한 논고는 공주정착 2년이 지난 1929년 서혈사, 남혈사를 백제의 초기 불교사원으로 주목한 것이었다. 이것은 공주 백제의 불교미술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서 석불광배 혹은 백제기와에 대한 자료 보고가 이어졌다.

백제 불교문화에 대한 관심은 일본 고대의 아스카 문화가 백제로부터의 불교 전수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나름의 문제의식 때문이었는데 절(慈恩寺)에서 나고 자랐다고 할 만한 그의 불교적 성장환경이 자연스럽게 불교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사원지에 대한 조사보고 이후 그가 '고고학 잡지'에 백제 고분에 대한 글을 발표한 것은 이듬해 1930년의 일이었다. '낙랑의 영향을 받은 백제의 고분과 전(塼)'이 그것이다. 이후 백제고분에 대한 장편의 조사 논문을 1933년부터 1936년까지 8회에 걸쳐 '고고학 잡지'에 연재하였다.

▲ 1930년대의 공산성 원경

가루베 자신의 회고에 의하면 그는 공주에 근무하던 기간 “1천기에 달하는 백제 고분 등 다수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따라서 이들 많은 수량의 고분과 유적의 조사과정에서 상당량의 유물을 수습하게 되었던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고분 조사 작업은 특히 공주 근무 초기인 1927년부터 1932년의 5년간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 사이 738기라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조사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1933년에 조사한 송산리 6호 전축 벽화고분 및 1932년의 5호분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조사한 고분 가운데 조사시기가 명시된 148건의 고분을 연도별로 파악하면 1931년 한 해에 82건, 1932년 28건 등으로, 특히 1931년, 1932년에 작업이 집중되어 있다.

이 같은 가루베의 고분 조사에 대해서는 총독부의 전문 고고학자들에 있어서도 ‘연구목적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유례가 없는 유적의 ‘사굴(私掘)’ 행위로 비판된 바 있다. 당시에도 전문 연구자의 입장에서 보면 가루베는 어디까지나 아마추어 ‘향토사학자’에 불과 하였던 것이다.

1936년 가루베는 총독부에서 간행된 잡지에 공산성의 출토유물과 송산리 6호분에 대한 소개의 글을 게재하였다. 그는 공주고보 이후에 대전의 대동여고(대전여고의 전신)의 교감으로 승진하여 근무처를 옮겼는데 아마 1940년의 일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다시 1943년 승진하여 강경여중의 교장으로 옮겨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 6호분의 동벽 청룡도 실측도

해방 이후 본국에 귀환한 가루베는 이미 원고 작업이 완료되어 있던 ??백제미술(百濟美術)??을 출간하였다. 이 책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0월, 동경의 보운사(寶雲舍)에서 간행되었지만, 이미 1943년 말에는 인쇄가 가능한 형태로 원고가 마무리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쇄 작업이 끝나지 않은 1945년 3월 10일 동경에 대한 연합군의 공습에 의하여 넘겨진 원고가 모두 불타고 말았다. 그리하여 실제 책이 간행된 것은 가루베의 귀국 1년 쯤 뒤인 1946년 10월이었다. 이로써 생각하면 그가 공주를 떠나 대전, 강경 등지에서 전전하는 동안 그는 현장의 조사보다 기왕의 논문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 백제 미술사의 정리에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1945년 본국에 귀환한 가루베는 시즈오카현(靜岡縣) 미시마시(三島市)에 자리를 잡았다. 그 연고는 처가와의 관련이었다. 미시마 정착은 젊은 시절 활동기의 20년을 한국에서 보낸 그로서, 돌연한 귀국을 당한 상태에서 이렇다 할  특별한 연고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이곳에 자신이 직접 나무를 자르고 깎아서 가옥을 증개축하여 ‘제2의 인생’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1947년 때마침 집 가까운 곳에 니혼대학(日本大學)의 미시마(三島) 분교(分校)가 설립되었고 그는 교원으로 취임하여 이 대학(豫科)에 근무하였다.

식민지 한국에서의 교사 경력과 백제에 대한 저서가 있기는 하지만, 일본에서 대학에의 취업이 간단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원래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고 고고학자 사이토(齊藤 忠)의 회고에 의하면 “활달하고 명랑하고 붙임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이 같은 그의 적극적 성품이 그의 취직에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1947년 전임강사에 취임한 가루베는 ‘역사학/고고학’ 담당이었으며, 1951년 교양학부 조교수, 1956년 교수로 승진하고 이후 문리학부로 소속이 옮겨졌다. 니혼대학에 자리를 잡자 지역은 달라졌지만, 그는 예의 공주에서의 향토사적 고고학적 활동을 학생들과 함께 다시 시작하였다.

니혼대학은 메이지(明治) 22년 창립한 일본법률학교를 모체로 하여 동경에서 설립된 4년제 사립대학이다.가루베가 담당한 과목은 동양사였는데, 실제 강의 내용은 거의 한국역사였다고 한다.

그리고 니혼대학(일본대학) 근무 시에도 여전히 학생들을 데리고 방학 등을 이용, 동경에서 조금 떨어진 치바(千葉), 이바라기(茨城) 등지에서 직접 유적조사를 하였으며, 학생들을 중심으로 ‘니혼(일본)대학 고고학협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일종의 고고학 학술동아리의 성격을 갖는 것이라 하겠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실제 고고학을 전문으로 하게 된 제자들도 여러 명이 배출되었다. 니혼대학 교원 취직  이후인 1953년 미시마(三島)시의 시지편찬위원장이 되어 1958-1959년에 상중하 전 3권 분량의 '미시마시지(三島市誌)'를 완간하였다.

이 시기 그는 백제에 대한 연구논고를 종종 발표하였고, 그 후 『백제의 역사지리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사망 몇 년을 앞둔 1967년 가을, 명지대학교 초청으로 그는 1945년 해방으로 일본에 돌아간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백제사에 대한 특강과 공주고보 제자들과의 만남, 백제 유적의 답사 등이 이때 이루어졌다.

니혼대학 근무 시절 그는 ‘쿠사오카(草丘)’라는 필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가루베 소큐(輕部草丘)’라는 이름으로 종종 시를 지어 발표하였다. ‘쿠사오카(草丘)’라는 이름을 자호(自號)한 뜻을 잘 알기는 어렵지만, 평생을 향토의 구석구석을 누비며 향토 역사의 발굴에 진력한 자신의 삶을 ‘초구(草丘)’에 비유한 것일지 모른다.

1971년 저서 『백제유적의 연구』(吉川弘文館)가 출판되었다. 이 책은 1962년 가루베 지온 선생 고희기념회(輕部慈恩先生古稀記念會)가 조직되어 출판을 추진한 것이었는데, 공교롭게 가루베 지온은 출판 전년인 1970년 10월 16일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대학 분규로 갑자기 병을 얻게 되어 결국 ‘불귀의 객’이 되었다고 한다. 향년 만 73세를 기록한 셈인데, 평상시 그가 사람들로부터 ‘건강의 전형’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건강하였던 것에 비하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희기념회는 대개 니혼(일본)대학에서의 제자들로 구성된 것이었다고 한다.

가루베의 연구 활동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특히 해방이후 일본에서의 활동과 연구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사후인 1970년 추도논문집으로 출간된 '슌즈(駿豆) 지방의 고대문화'가 매우 유용한 지식들을 정리하여 제공하여주고 있다.

이 책은 가루베가 작성한 논문, 혹은 조사보고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책에 수록된 가루베 저술 보고문의 분량은 도합 12편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모두 지역의 역사 고고자료의 조사보고로서 고분, 사지, 와요지 등에 대한 것이다.

공간과 시기는 달라졌지만, 공주에서의 활동과 유사한 학술적 작업을 그는 일본에서 꾸준히 재개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의 그의 고고학적 작업은 일견하여 전문성의 측면에서는 다소 미흡한 수준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학계의 주류에 속한 학문적 활동이라기보다는 지역에 토대하며 전문가와 일정한 유대를 형성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비주류의 향토사적 고고학 활동의 성격이었다고 생각된다.

가루베 지온의 해방이후 연구 경력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일본 귀국 후에도 여전히 백제사 연구를 포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망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백제를 주제로 한 논문을 발표하였다는 사실이다.

한국에 대한 학술적 방문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던 배경을 생각하면, 해방이후 그의 백제사 연구는 공주 거주시의 것과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본에서의 활동기에도 공주와 백제는 여전히 가루베 지온의 학문적 요람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작업의 결과에 의하여 그의 유저(遺著)라 할 『백제유적의 연구』가 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사망 이후 1970년에 출판된 이 저서는 그의 삶에서 차지하고 있었던 백제에 대한 비중을 확인하게 한다.

어떤 이는 “이렇게 도둑질, 약탈한 유물을 가지고 (가루베가) '백제유적의 연구'라는 저서를 펴냈다”고 말하였지만, 이 책은 전체적으로 유물을 토대로 한 고고학적 저서라기보다는 사료와 향토자료를 근거로 한 역사적 연구의 성격을 많이 가지고 있다.

논문의 내용이 제1편 '백제의 역사지리적 연구'이고, 제2편은 '백제 국호고(國號考)' '백제 왕성고(王姓考)' 되어 있는 것에서도 이 책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연구의 경향이 문헌에의 의존도가 높은 역사학적 연구로 기울어진 것은, 해방 이후 귀국하여 ‘백제의 현장’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던 사정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유적의 연구'에 사용된 삽도 자료는 '백제미술'에서 이미 사용되었던 자료와 1967년 방한 시 촬영한 사진 등의 자료 이외의 새로운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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