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문화의 고고미술사적 연구

공주지역의 상징이라 할 ‘금강(錦江)’의 어원이 ‘곰강’(熊川, 熊江)이며, 곰강을 한자의 ‘유음미자(類音美字)’로 표현한 것이 ‘금강’이라는 것은 이미 1935년 가루베의 주장이었다. 고려 초부터 쓰인 ‘공주’역시 그 어원은 ‘熊州(곰주)’에서부터라고 그는 주장한다.

사실 여부를 떠나서, 7, 8년의 공주생활 ‘외국인’으로서, ‘금강’과 ‘공주’의 어원을 1935년에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였던 가루베의 학문적 식견은 70년 세월이 지난 지금으로서도 놀랄만한 것이다. 그는 백제를 지칭하는 ‘쿠다라’의 어원에 대해서도 그 뜻이 ‘큰 나라’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견을 제안한 바 있다.

▲ 송산리 6호분 조사 당시 촬영한 기념사진

가루베의 관심은 무엇보다 공주에 흩어진 고분이나 성터, 절터와 같은 백제시대의 유적이었다. 그는 공주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많은 분량의 고분을 확인하였고, 아울러 처음으로 공주의 불교유적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공주에서의 그의 학문적 공헌을 요약한다면 첫째, 백제 불교 사원에 대한 연구, 둘째 공산성에 대한 연구, 셋째 백제고분의 연구, 넷째 백제 와전에 대한 연구 등을 들 수 있다.

이같은 주제는 모두 백제문화 연구의 중요한 주제이며, 그가 이같은 문제를 공주 거주 직후부터 집중하여 검토한 것을 보면, 연구의 전체적 방향에서 그 목표 설정이 상당한 정확성을 가진다는 생각이다.

고고학적인 면에서 그를 ‘아마추어’로 분류할 수는 있겠지만, 그를 ‘아마추어 학자’로 간단히 단정할 수 없는 이유는 이처럼 그의 학문적 면목에 범상하지 않은 점이 있기 때문이다.

백제 불교사원의 연구

가루베가 공주의 불교유적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공주의 백제불교가 바로 일본 고대문화 개화의 연원이라는 역사적 의미의 착안, 그리고 백제에 있어서도 불교가 문화적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백제문화는 처음 중국의 것이 이전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백제화하여 백제 독특의 내용을 갖게 되는 것으로 그는 파악하였다. 백제에 영향을 미친 중국문화는 주로 남조의 것이었지만, 북조의 문화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고 보았다.

▲ 6호분 벽화에 대한 가루베의 '상정도'

제문화의 원류를 남조 중심의 중국문화로 설정하고 계통을 파악한 것은 정당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이들 문화의 영향력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점은 오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주의 백제시대 절을 그는 평지 사찰과 산지사원으로 구분하면서 특히 서혈사 남혈사 등 석굴사원의 존재를 주목하고 이를 탐색하였다. 공주 거주가 시작된 1926년의 2월 그는 봉황산 뒤의 망월산 기슭에서 서혈사 터를 확인하였다.

그리하여 파손된 석불 3구, 석재 등과 함께  ‘서혈사(西穴寺)’의 이름이 들어 있는 기와를 수습하였고 산기슭에 계단식으로 조성된 절터와 석굴을 확인하였다. 그후 파손된 석불의 두부(頭部)를 민가에서 수습하여 이를 제 위치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역시 석굴이 있는 남혈사와 함께 이들 젙을 웅진시대 초기 창건의 것으로 그는 확신하였고, 그 연원은 북위의 영향에서 비롯되어 그후 남조에서 연원한 평지가람 대통사로 옮겨져  백제사원의 발전에 토대가 된 것으로 보았다.

1970년대 초 공주에서 사실상 최초의 학술적 발굴이라 할 수 있는 서혈사지 발굴이 가능하였던 것은 바로 가루베의 선구적 조사와 연구에 기초한 것이었다. 다만 근년에 이르기까지 그동안의 조사 결과는 서혈사, 남혈사 등을 웅진시대 초기의 가람으로 보는 가루베의 가설이 입증되지 않았다. 발굴 조사 결과 백제의 유구를 확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록상 평지가람의 백제 최초 예라할 공주시내 소재 대통사지의 구명에 주력한 것은 가루베의 또 하나의 업적이었다. 공주시 반죽동에 소재한 대통사지는 조선조 공주목 관아와 충청감영터 사이에 위치하여 있다. 즉 공주의 중심부에 위치하여 주택가로 변한 관계로 절터의 상황을 파악하기는 어려운 여건이었다.

류제경의 증언에 의하면 가루베는 공주고 근무시절 바로 이 절터 부근에서 거주하였다고 하며, 근무처인 공주고도 이곳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이곳 구석구석을 확인하고 특히 건축 혹은 상수도공사 등이 이루어지는 기회를 통하여 제반 상황을 관찰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발견되는 기와와 초석과 기단석 등 유물의 단편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백제시대  대통사의 터를 확정하고 아울러 가람배치의 개략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수도 공사 등의 기회를 통하여 현지의 상황을 확인하고 강당과 금당과 탑지 등의 위치를 추정하여 지도에 표시해 놓은 대통사지의 가람배치도는 소략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대통사에 대한 가장 중요한 기본 설명자료로서 전사(傳寫) 활용되고 있다. 그리고 2기의 백제 석연지(石蓮池) 등 당시 그가 확인한 절터에 대한 관찰 자료는 고고학적 조사가 불가능한 현재의 여건에서 중요한 증언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산성과 성내 유적에 대한 연구

가루베는 공산성이 백제 도읍기의 중심 거점이며 왕성이었다는 결론을 가지고 이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추구한 최초의 인물이다. 구한말까지 공산성은 군사적 거점으로 구별되는 지역이었지만, 일제하에서 군사적 기능이 상실됨으로써 읍민들의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1932년 유람도로의 개설과 같은 편의 시설공사가 실시되었고 이같은 기회에 중요한 몇 유적이 노출되었다. 가루베는 공산성의 유적 노출에 유의하여 유물을 수습하거나 일부지역에 대한 시굴 혹은 백제시대의 건물 배치 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왕궁이 공산성 동쪽에 있었다는 전제하에 공산성의 연구를 진전시켰다.

공주에 있는 동안 가루베는 공산성에 대한 조사 내용을 논문으로 발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35년 『충남향토지』에 간략하나마 중요한 요점을 소개하는 등 이에 대하여 지속적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정리하였고, 왕궁지 등 주요 건물의 배치에 대한 견해는 후에 그의 저서 『백제미술』 혹은 『백제유적의 연구』에 반영되었다. 그의 연구는 1970년대 말 백제문화권 조사 이전까지는 유일한 공산성에 대한 조사와 연구 자료였다. 

가루베의 공산성에 대한 자료중 흥미 있는 것은 성내 주요 유물 출토지로서 웅심각(광복루), 삼장비로부터 쌍수교 동상(東上)의 지대, 쌍수정 앞 광장 및 쌍수교 서쪽의 금강에 면한 경사지, 그리고 공북루 일대를 지목하고 있는 점이다.

공북루 일대는 현재 공주대박물관  팀에 의한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여타의 두 지역은 모두 기왕에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주요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다. 그 가운데 쌍수교로부터 서쪽 50m 일대에서 직경 1m, 깊이 1m 내외의 구덩이 십 수 개소가 확인되고 그 안에서 다량의 유물이 출토된 점에 대하여 비교적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그중의 하나는 지름이 불과 90cm의 구덩이로부터 어로용 토기 42점, 8엽연꽃무늬의 기와 1매, 백제 도기 2점, 토기 1개, 완형(碗形)의 석기, 석봉(石棒) 1개 등이 출토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주거(住居) 내에서 창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구덩이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공산성 출토의 유물로서 삼장비각 서측 50m 지점에서 출토하였다는 금동제 봉황형 금구(金具), 쌍수교 동쪽 약 40m 북쪽의 경사면에서 출토한 금동제 환상금구(環狀金具) 2점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공주대 박물관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이 지역 일대는 백제 혹은 통일신라기의 건물이 다양하게 들어서 있었던 지점이다. 건물지의 성격과 관련하여 유의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가루베의 주장 가운데 하나가 공산성과 옥녀봉 사이의 곡간지(谷間地) 일대가 백제시대의 궁원(宮苑) 등 주요 시설이 있었다는 것이다.

80년대 이후 공산성에 대한 조사를 통하여 상당히 많은 지식을 얻게 되었음에도 이 지점에 대해서는 조사가 미진하여 그의 주장의 진위 여부를 아직 가리지 못한 상태이다. 한편 그의 주요 주장 가운데 하나였던 공주의 백제 나성설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으로 수정 되었다.
 
백제 와전의 연구

가루베의 한국행은 낙랑의 평양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때 낙랑의 전돌 유구가 깊이 인상에 남겨졌고, 원래 백제불교에 대한 관련 자료라는 점에서 가루베는 백제의 와전에 대하여 처음부터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1932년의 백제 와당에 대한 논문은 후대 백제 와전 연구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가 공산성을 비롯하여 서혈사, 대통사, 신원사 등 절터에서 수습한 자료들은 공주에서의 백제문화, 특히 불교문화 이해에 있어서 퍽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근년 공주박물관에 반환된 가루베 소장 4점의 백제와당 역시 학술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것으로 논의된 바 있다.

송산리 6호분의 조사에서 중요한 것은 ‘梁官瓦爲師矣(양관와위사의)’라는 글자가 새겨진 명문전의 발견이었다. 고이즈미(小泉顯夫) 등에 의하여 6호분이 조사될 당시에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것인데, 조사 종료 이후 조사를 견학하였던 부여진열관장 오사카(大坂金太郞)가 폐쇄용 전 더미에서 찾았다고 한다.

가루베 지온은 처음 이 명문을 ‘梁官品爲師矣’라고 판독하였으나, 뒤에 한자 연구가 토미모리(富森茂彭)의 도움으로 ‘品’을 ‘瓦’로 정정하여 ‘梁官瓦爲師矣’로 판독한다고 밝히는 등 이 벽돌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1968년 가을 방한시에도 이 유물의 소재를 확인하고자 하였으며, 공주와 부여박물관에서 이 유물이 보이지 않자 퍽 ‘실망했다’는 것이다.

무령왕릉 혹은 6호분에서 사용된 여러 벽돌들이 시내 여러 곳에서 수습되고 6호분의 폐쇄용 벽 내부에서 무령왕릉 사용의 벽돌이 여러 점 확인된 점 등 와전에 대한 가루베의 조사 자료는 여전히 학문적으로 흥미 있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 이 명문와는 최근 명문의 판독에 있어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는 않다.

백제고분에 대한 연구
 
고분 연구는 가루베가 공주고보 근무 시절 가장 집중적으로 힘들여 조사와 연구를 진행하였던 분야이다. 처음 불교사원, 기와 등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분으로 옮겨가게 된 것은 무차별적 도굴이 진행되고 있던 당시 상황에 의하여 계기가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에서 민간인에 의한 공주에서의 백제고분의 도굴 행위는 극성하여 있어서, “수년 혹은 십 수년을 지나는 사이에 공주지방으로부터 백제고분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가루베가 염려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도굴 당한 약 1천 여기의 무덤을 돌며 그 가운데 주요한 것은 실측 촬영을 하였다는데, “백제고분을 실견(實見)한 실수(實數)는 1천 기를 넘고, 그 주요한 것은 백 여 기를 실측조사”하였다고 하였다. 그가 실측 조 사하였다는 고분 100여 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송산리고분  1-20호       교촌리고분  1-5호 
우금리고분  1-15호       보통리고분  1-27호  
금학리고분  1-6호        남산록고분  1-42호  
주미리고분  1-22호       능치고분    1-20호 
월성산록    1-9호        주미산록    1-16호  

이상을 합산하면 그 수치는 182기인데, 그중 측정불능 혹은 불명 등으로 실측치를 기재하지 않은 것이 71기이고, 자신이 처음 조사한 것이 아니거나 공적인 조사를 거친 것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한편 그가 분류한 백제고분의 유형(1-6유형)에 의하여 그가 확인한 수치는 1유형 6, 2유형 91, 3유형 35, 4유형 590, 5유형 4, 6유형 2 등, 도합 738기였다. 이들 조사의 대부분이 그가 확인한 것이며, 조사의 수준은 잔류한 유물을 수습하고 고분의 기본 구조를 파악하는 지표조사 수준의 것이었던 것 같다.

이같은 가루베의 고분 조사는 총독부의 전문 고고학자들에 있어서 ‘연구목적이라는 미명하에 이루어진’ 유례가 없는 유적의 ‘사굴(私掘)’ 행위로 비판되었다. 그러나 가루베 자신은 이 고분들 대부분이 이미 도굴된 유구였고, 그러한 상태에서 조사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가루베가 1931, 1932년 백제고분의 집중조사를 감행한 것은 백제고분 논문의 집필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 결과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6개 유형의 분류를 제안한 것이다.

가루베의 분류는 공주의 횡혈식 고분을 중심으로 한 제한된 자료 분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지만,  근대 고고학 초기의 당시 여건에서 재지(在地)의 학자로서는 퍽 수준 높은 제안이었으며, 이후 백제 고분의 연구가 구조 유형의 분류로부터 연구가 본격화되는 데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가루베의 백제 고분 조사의 종착점이 1933년 송산리 6호분이다. 송산리 6호분의 조사는 그가 성취한 ‘백제유적 조사’의 ‘하이라이트’였으며, 동시에 그가 고분의 연구와 조사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게 된 막다른 지점이기도 하였다. 송산리 6호분의 ‘성공’으로 그는 현장을 중심으로 한 학문의 세계에서 유리되는 길을 걷게 된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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