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老子 道德經은 難解하다.

멀리는 王弼『老子注』, 河上公『老子道德經』, 『淮南子』「道應訓」, 董思靖『道德眞經集解』, 蘇轍『老子解』, 林希逸『道德眞經口義』이 道德經을 풀이했고  가깝게는 朴世堂『新註道德經』, 栗谷 李珥『醇言』, 洪奭周『訂老』, 徐命應『道德指歸』, 李忠翊『談老』 等이 풀이했다.

古來로 최고의 解釋이라는 評을 받는 王弼, 河上公 註釋조차도 老子의 本旨와는 멀다.

例를 들면 『老子』48章의 “爲學日益  爲道日損” 을 王弼은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더욱 익힌다. 힘써 비어 있음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무엇인가 함이 있으면 잘못된 것이다.”<務欲反虛無也 務欲進其所能 益其所習 有爲則有所失>

河上公은 “욕심과 꾸밈을 덜어내어 自然之道에 契合하는 것이 道이다.”<學謂政務禮樂之學也  道謂自然之道也>

董思靖은 “內功을 쌓는 것이 學이고 內功조차 버리는 것이  비로소 道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因益以積功 忘功而體道>

蘇轍은 “道를 알지 못하고 學에 힘쓰면 見聞은 많아지지만 허물을 면치 못한다.”<不知道而務學 聞見日多而無以一之 未免爲累也>

林希逸은 “책을 많이 읽을수록 어리석음이 더욱 많아진다.”<讀書多者 無明愈多>

李珥는 사람의 본성에는 모든 善이 저절로 충족되어 있어 善은 더 보탤 필요가 없다. 다만 物慾 때문에 생기는 장애만 제거하면 된다.

黃茂材는 “모르는 것 없이 사물의 이치를 다 아는 것이 배움(學)이다. 그러므로 學은 날로 더하려 하는 것이다. 學이 體化된것이 道이니, 그러므로 덜어내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덜어내는 것이 저절로 덜어내지 못하면 다시 공부를(學을 더하는 것)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나는 말한다. “학문을 하는 것은 최종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단계로 進入하려는 前단계이다. 學問은 진리를 구하는 도구요, 방법이지만 배움을 멈추어서는 道의 세계에 이를 수 없다.

그러나 道를 이루었다면 학문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이것이 道는 덜어버리고 학문은 더한다고 하는 것이다. 老子는 “우리가 알고 있다.” 라는 지식체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은 모두 쓸모없는 것들이다. ‘어제의 지식, 오늘의 지식’을 버리고 ‘알 수 없는 지식’을 쌓아가야 비로소 道에 이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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