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한 시절 우리나라에는 전원서정을 올곧게 다듬어 시를 빚던 전통이 있었다. 실은 김소월부터가 전원서정이고 이육사의 「청포도」도 전원서정에 물을 댄 시요, 청록파 3가시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석정, 장만영, 김동명, 박용래 같은 시인들이 여기에 보태진다. 

이에 한 사람 더 추가하자만 김상용 시인이요, 작품을 말하자면 위에 적은 작품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다? 남으로 창을 내는 건 동향적 주거형태이다. 더불어 삶의 방법이다.

남쪽은 해밝은 쪽이고 비가 오는 쪽이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방위이다. 이런 데서부터 작자는 순한 삶, 자연스런 삶, 전통적인 인생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다음은 ‘밭’이다. 별로 넓은 밭이 아닌 모양이다.  ‘한참갈이’라 했으니 한나절쯤 갈면 되는 모양이다.  ‘괭이로 파고’ ‘호미’로는 ‘풀’을 매겠다 했다. 결코 왁자지껄한 생활이 아니다.

그저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그대로의 삶이다. 핵심은 그 다음에 나온다. ‘구름이 꼬인다’ 해도 결코 따라 가지 않겠다고 했다. 하나의  배포다. 더불어 ‘새’의 노래는 공짜로 듣겠다고 했다. 더욱 여유로움이다.

그런 다음, 작자는 슬그머니 청유형으로 말하고 있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이 얼마나 정답고 은근한 말투인가? 삶이란 것은 어제나 오늘이나 고달프다. 고달픈 삶 가운데 이런 이웃이 있다는 것은 또 얼마나 소중한 위로이겠는가.

‘왜 사냐건/ 웃지요.’ 아, 이건 시에서 가장 격이 높은 촌철살인(寸鐵殺人)이다. 인생에 대한 대답 가운데 이보다 더 좋은 대답이 더 있을까? 굳이 이 시를 두고 예이츠의 시나 이백의 「산중문답」같은 시(問余何事栖碧山/ 笑而不答心自閑)를 들먹일 필요는 없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더러는 이 같은 시를 폄하하는 경우가 있다. 순응적이고 소극적인 인생관, 은둔적인 생활을 빌미로 그러지 싶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편벽(便辟)이다. 왜 이 시가 비난받아야 한단 말인가?

다만 이 시인은 이런 인생을 선택했을 따름이다. 취향에 맞지 않는다면 비껴가면 되는 일이 아니겠나? 남의 인생을 두고 투덜거릴 필요는 없는 일이다. 

김상용(金尙鎔 1902-1950) 시인은 영문학자이기도 했다. 호는 월파(月坡). 일본에 유학했으며 돌아와 보성고보 교원을 거쳐 이화여전(오늘의 이화여대) 교수를 했다.

교수 시절, 노천명과 같은 시인의 스승이기도 했다. 시집으로 1939년에 발간한 『망향』한 권이 있는데, 위의 시는 물론 그 책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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