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나라에서 가까운 나라로

먼 나라에서 가까운 나라로

가라시마, 카카라마, 가카라시마... 발음하기도 어려운 일본의 작은 섬 이야기를 들은 것은 4월 중순의 어느 날이었다. 역사과교사로 교직 생활 24년 만에 맞은 학습연구년으로 인해 은사님이신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윤용혁 교수님을 만남으로 부터였다.

▲ 우리 일행을 반기는 가카라시마 주민들

6월 초순에 일본 큐슈 가카라시마에서 무령왕 축제와 큐슈지역 역사 답사가 있는데 참여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권유에서부터였다. 대학시절부터 사랑으로 지도해주셨던 은사님이라 그 자리에서 O.K. 라고 대답을 하였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인 딸 은영이와 동행하기로 하였다.

드디어 일본으로 향하는 첫날인 6월 3일, 여명이 밝아오기도 전인 새벽 4시 15분에 공주에서부터 출발한 관광버스에 올랐다. 우리와 함께한 분들은 부산에서 합류하기로 한 국토연구원의 채미옥 박사를 비롯한 31명이 출발하게 되었다.

모두 공주에 사시거나, 공주를 사랑하는 분들이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란 이름으로 동행하게 되었다. 한 분 한 분 소중한 분들과의 여행이라 기대가 한껏 부풀어 올랐다.

우리를 실은 코비호는 오전 10시에 부산항을 출발하여 오후 1시에 하카타항에 도착하였다. 일본 땅에 생전 첫발을 내딛는 나로서는 속으로부터 탄성이 올랐다. ‘와우! 일본이다.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일본에 오기 전에 역사교사로서 일본에 대한 생각은 우리 국민들의 일반적인 감정을 벗어나지 않았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역사를 가르치는 과정에 서대문형무소, 경복궁내 건천궁 옥호루, 일본군 위안부 규탄 수요집회 등과 같은 곳에 학생들과 현장학습을 하다 보니 일본에 대하여 일본인에 대하여 그리 곱지만은 않은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이 일본에 대하여 감정적인 대응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시각을 갖도록 지도하던 나였다.

▲ 100년 전통의 일본우동

우리는 일본에서 첫 식사로 일본식 우동을 먹었다. 조금 짜기는 했지만, 100년 전통의 깊은 국물의 맛과 함께 일본 우동을 맛보는 즐거움을 갖게 되었다. 누군가가 ‘여행에서 잘 먹고, 잘 자는 것이 좋은 여행을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라 했던가? 이번 여행에 큰 기대가 되었다.

우리는 첫 번째 답사지인 후쿠오카시립 박물관으로 이동하여 관람하였다. 고대의 나노쿠니 시대부터 근대화 시기까지의 여러 전시물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역시 박물관의 가장 큰 자랑인 중국의 후한 광무제가 나노쿠니 왕에게 보낸 금인(金印)과 마을의 공동 제전(祭典)인 마쯔리를 모형화해 놓은 장면이었다.

공주회, 가라츠 무령왕실행위원회의 환대

우리는 첫날의 숙박지인 가라츠로 향했다. 해변가에 자리한 가라츠로얄호텔에 여장을 풀고 저녁 만찬을 준비하였다.

그 자리에 함께한 분들은 ‘공주회’(일제시대에 공주에서 살았던 일본인을 중심으로 현재 일본에서 결성된 모임)회원들과 ‘가라츠 무령왕실행위원회’ 분들과 백제문화제홍보대사인 이가와유카 등 일본인들이었다. 그분들은 우리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맞이하여 주었다.

▲ 공주회 야마구찌 회장의 인사말

비록 한국말은 서투르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만은 깊게 가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공주회’의 회장인 야마구치씨는 1935년에 공주에서 태어났다고 하니, 달리 생각하면 그 당시 공주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면 우리나라를 침략하고 못된 짓을 많이 한 일본인의 후손일텐데... 라는 불편한 마음도 금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분들이 참회하는 심정으로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져갔던 유물들을 공주향토문화연구회를 통해 2008년에 한국에 기증하였다는 소식들을 듣고는 마음이 조금은 풀어지게 되었다.

한글로 쓴 ‘어서오세요 가카라시마에’

드디어 우리 방문단의 메인 행사인 ‘제10회 무령왕 탄생제’에 참여하는 아침이 밝았다. 개인적으로 이번 여행을 출발하기 전에 여러 자료들을 수집하여 공부를 하였는데, 무령왕이 가카라시마라는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 그리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참여하였다.

가카라시마로 들어가려는 나고야항 부두에는 일본인들 뿐아니라 한국에서 온 많은 분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사전 조사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의 사진은 가카라시마 아이들과 주민들이 한국에서 온 일행을 맞이하는 일장기와 태극기를 나란히 들고 ‘어서오세요’ 라는 장면이었는데, 이번에도 가카라시마 아이들과 주민들이 환영하는 모습이 매우 감동적이었다.

▲ 가카라시마 어린이가 사진 속의 자기 모습을 가리키고 있다.

자그마한 섬, 그렇지만 무령왕을 통해 새롭게 조우하게 된 한국과 일본의 사람들, 그들은 헤어졌던 형제자매를 오랜만에 다시 만난 것처럼 서로 그리움으로 상봉하고 있었다. 처음 참석한 나에게는 조금 낯 설은 풍경으로 다가왔다. 곧바로 무령왕탄생기념비 앞에서 탄생제가 엄숙하게 진행되었다.

일본 전통 제례의식으로 진행된 행사에는 한국에서 온 이준원 공주시장을 비롯하여 민간교류단인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 회원들, 당진 로타리클럽 회원들, 가라츠시의 사카이 시장을 비롯한 가카라시마 주민들과 각지의 일본인들 등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였다.

이준원 공주시장은 ‘예수가 예루살렘 마굿간에서 태어났지만 인류를 구원하고자 십자가를 지었듯이 무령왕은 궁궐이 아닌 섬의 동굴에서 태어나 백제를 중흥시킨 위대한 왕이 되었으며, 그동안 민간단체가 중심이 되어 10년간 교류해 오면서 맺은 소중한 토대 위에 관(官)이 함께하여 더욱 우정을 두텁게 하는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라는 인사말을 하였다.

작은 섬인 이곳에 이렇게 기념비를 세우고, 한국과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무령왕 탄생을 매개로 지속적인 교류를 확대해 나간다면 서로에게 소통과 새로운 발전의 기회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 해마다처럼 가카라시마 주민들은 축제참가자들을 위해 싱싱한 해산물 바비큐를 준비하였다. 세심한 배려가 담겨있었으며, 아주 맛도 있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이어지는 순서로 우리측에서 준비한 최선무용단의 화관무와 교방굿거리, 소고와 북놀이 춤은 우리 전통의 가락과 한복이 어울러져 정제되면서도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어 많은 환호와 박수를 받게 되었다.

▲ 최선 무용단의 화관무 공연

가카라시마 학생들과 주민들이 준비한 집단체조와 북 연주 등도 일본인들의 절제된 단결의 힘을 보여주는 공연이었다. 이와 동시에 이번 여행을 주관한 금강뉴스 신용희 대표의 ‘무령왕축제 10주년 기념 한·일백제문화교류사진전’을 하였는데, 10년간의 교류의 여정들을 생생하게 볼 수 있어 좋았다. 가카라시마 초등학교의 한 아이는 자기가 찍힌 사진을 보며 매우 즐거워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태루오와 만남

공연이 진행되는 가운데 행사에 참석한 일본인들과 우리 한국인들 사이에 서로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모습은 실질적인 교류의 결정체를 보는 것 같았다. 나도 그 행사에 참여한 야마구치 태루오라는 분을 만났다.

그분은 화학공장에서 일을 하며, 한국어를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공주에 다녀온 이야기와 아마추어 무선햄을 통하여 한국 사람들과 이야기 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태루오는 아주 진솔하면서도 따뜻함으로 대해주었으며, 우리는 서로의 명함을 나누면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일본인과 처음으로 진심어린 대화를 나누게 되어 마음이 따뜻해지게 되었다.

우리는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오비야 동굴을 다녀온 후에 가카라시마 주민들과 작별을 하였다. 섬을 떠나오면서 아이들과 주민들은 우리 일행을 향해 다음에 또 만나자고 말하면서 아쉬움을 담아 우리가 탄 배가 눈 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 무령왕이 탄생한 오비야 동굴을 찾은 답사팀

나고야항까지 30여분을 나오면서 처음 일본에 올 때 가졌던 불편한 마음들이 많이 녹아졌음을 느끼게 되었다. 이론적으로 일본을 미워하지 말고 극일(克日)해야 한다는 생각들이 가득하였는데, 저들의 순수함을 보면서 이웃 나라에 대한 이해의 마음과 애정을 조금이나마 갖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 참석한 내가 그러했는데 하물며 오랫동안 무령왕을 매개로 교류를 해온 분들은 감회가 얼마나 더했으랴?

나고야와 도요도미 히데요시

가카라시마를 떠나 우리가 도착한 곳은 나고야항이었다. 이곳은 임진왜란때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성을 쌓고 조선침략을 위해 군사들을 모으고 출병한 곳이라 한다.

한반도와 일직선상에 위치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천혜의 항구로 보였다. 400여년전 도요토미히데요시 휘하의 군사들이 헛된 야욕을 불태우며 출정한 곳에 우리가 도달하였다하니 왠지 적진 한가운데에 온 생각으로 섬뜻한 생각이 들었다.

▲ 나고야 성터

우리는 나고야성터와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우리 일행 중에 성전문가로 동행한 공주대학교 서정석교수는 성을 공부하면 할수록 자신을 내세우기가 조금은 꺼려진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공동체 생활을 통해 먹을 것을 공유하였는데 점차 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자신을 방어하고 다른 공동체의 생산물을 탈취하기 위해 성을 쌓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고야 성을 굳게 쌓고 일본의 무사들을 불러 모아 조선 침략을 자행하였던 임진왜란의 역사를 생각하며 역사에서와 현재의 일본에 대하여 어떻게 성격지을지 조금은 혼돈스럽기도 하였다.

우리와 동행한 나태주 시인은 나고야 박물관에서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기 전에 남긴 싯구에 ‘이슬처럼 떨어져 이슬처럼 사라지는 내몸이여 나니와(오사카 일대의 옛이름)의 일들도 꿈속의 꿈이로다.’ 라고 기록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의 헛된 야욕이 동아시아 3국에 큰 비극을 가져다 주었음을 생각해보면서, 우리 인간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 내가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는 그러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몽골식텐트 게르(Ger)에서의 하룻밤

나고야성을 떠나 우리는 큐슈의 서쪽으로 버스를 달렸다. 730여년 전의 역사의 현장을 향해서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세계대제국을 향한 꿈을 실현하려 했던 몽골의 침략을 받았던 때였다.

몽골의 쿠빌라이칸은 여몽연합군과 남송인들을 결성하여 두 차례에 걸쳐(1차는 1274년, 2차는 1281년임) 일본 침공에 나섰다. 그러나 가마쿠라막부는 두 차례의 침략을 막아내어 일본불패의 신화를 만들었다. 바로 그곳이 우리가 가는 다카시마(鷹島)였다.

일본은 세계최강인 몽골에 대한 방비에도 철저했지만 때마침 불어온 태풍으로 몽골연합군의 함대는 심각한 타격을 입고 패퇴하였기에 일본인들의 자존감을 한층 높이는 역사적 현장과 사건이 되었던 곳이다. 이를 일컬어 그들은 가미카제(神風)이라 한다.

우리는 다카시마의 남단에 자리한 몽골식텐트인 게르(Ger)에서 하루 밤을 머무르는 색다른 체험을 하게 되었다. 유목생활을 주로 하는 몽골인이 양털과 천으로 만든 게르에서의 하룻밤은 시원하게 펼쳐진 넓은 잔디밭이 흡사 몽골 초원에 와 있는 듯하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게르촌 옆의 초원에서 흥겨운 시간들을 갖게 되었다. 일본에서 그것도 여몽연합군과 일본의 항전의 현장에서의 그 밤은 그렇게 깊어만 갔다.

▲ 가네가와와 이재황 한일도예가와의 만남

아리타 도조(陶祖), 이삼평

6월 5일 우리는 다카시마를 떠나 우리의 주 답사지의 하나인 아리타 도예촌으로 향하였다. 일본 도자기의 발상지인 아리타에서 임진왜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공주의 도공 이삼평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서이다. 우리 일행 중에 아리타를 가장 사모하고 기다렸던 한 분이 있었다.

바로 계룡산 상하신리에서 도예촌을 운영하는 이재황씨이다. 이삼평은 공주 금강가에서 태어났지만 아리타에서 외롭게 지내면서 1616년 백자광을 발견하여 본격적인 도자기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이삼평 묘소에 준비해 간 잔에 술을 붓고 고향을 향해 그리움의 시간들을 감내한 공을 위해 묵념하는 시간을 갖었다. 그 자리에까지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나카사키에서부터 온 관광자원과 한국인교수와 일본인 교수 두 분도 우리 일행을 안내하였다.

이어서 우리는 아리타 시내 한편에 자리한 이삼평요 도자기 판매장에서 14대손인 가나가에 쇼헤이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이삼평의 도예기술의 맥을 이어 이곳에서 도자기를 빚어온 그 분은 400여 년 전 자신의 할아버지의 고향에서 온 우리들을 각별한 마음으로 맞이하였다.

▲ 이삼평 묘소

시대는 흘렀지만 우리들은 서로 간에 왠지 모를 연민과 사랑의 끈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우리는 도자기 공원인 포세린파크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 공주에도 역사적인 도예촌을 개발하여 현재화하는 작업에 대한 과제를 안고 아리타에서의 추억을 뒤로하였다.

운젠에서 족욕으로 피로를 풀고

다음으로 우리는 나카사키현의 운젠국립공원으로 향하였다. 차창가로 비추이는 푸르름의 바다, 울창한 삼림 그리고 불편한 도로이지만 한편으론 자연을 파괴하지 않은 일본의 아름다운 풍광들을 마음에 담으면서 온천을 향하였다.

우리와 함께한 일행 중 공주대 지리교육과 최성길교수님의 일본 지형에 대한 특강을 들으면서 우리는 일본에서 가장 위험한 곳 중에 한 곳을 향해 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렇지만 그러한 곳이 인간들의 관광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온천이라고 하였다.

운젠에 도착하니 산 중턱 여기저기에서 수증기가 끓어 오르고,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곳을 그들은 지옥이라고 표현하고 있으니, 정말 지옥을 체험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곳 온천물에 두발을 담그며 족욕을 하였다. 정말 시원하였다. 지금까지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 운젠에서의 족욕

우리는 어느새 시마바라에 도달하였다. 일본은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을 경계삼고자 화산폭발로 폐허가 되어버린 주택들을 그대로 보존하여 운젠산재해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화산폭발의 파편들로 인해 2층집의 1층이 묻히게 되고, 지붕만 남은 집들도 여기저기에 있었다. 지난번 동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현장의 비참함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일본열도가 있기에 우리나라는 조금이나마 지형적인 재해로부터 안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일본이 자연재해를 막아주는 일종의 방파제인 것처럼 다른 측면에선 한반도는 대륙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켜주는 바람막이가 된 역사를 생각해 보면서 두 나라는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될 운명적인 나라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였다.

시마바라는 온천의 도시이면서, 한때에는 천주교도들과 농민들이 합세하여 지배층에 항거한 시마바라 난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다. 이번 답사에서 일본의 신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음 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4일째 새벽에 일어나 숙소인 남풍루 주변 해변을 산책하였다. 혹시나 마을의 신사를 볼 수 있을까 하여 말이다. 가까이에 체육공원인 영구공원이 있어 들어가 보았는데, 그곳에는 마침 영구신사(靈丘神社)가 있었다.

그뿐 아니라 작은 부속 신사도 있었으며, 여기저기에 신사들이 자리하였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해신(海神) 장보고라는 드라마를 방영하였던 적이 있었다.

일본의 적산선원이란 절에는 장보고를 적산대명신이란 이름으로 모시고 있다는 방송 내용을 본적이 있어, 해상왕의 단계를 넘어 해신으로 대접 받는 위대한 인물이려니 생각 하였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일본에서는 많은 신들을 신사에서 섬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태양신, 천황신, 조상신, 학문의 신, 온천신, 심지어는 복권을 사면 당첨을 기원하는 신사가 있다고 하니..... 정말로 일본은 신사의 나라임을 절감해본다. 일본인들은 무령왕도 이러한 신들의 한분으로 섬기는 것이리다. 이러한 스토리가 있는 신들의 이야기는 그들에게 현세에 대한 위로와 안정감을 주고 있는 삶의 일부라는 생각이 들었다.

▲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야메시의 일본인과의 만남

야메시의 한국어를 배우는 일본인

가카라시마에 이어 많은 여운이 남았던 곳 중에 하나가 야메시에서의 경험이다. 점심식사를 하는 도중에 우리 공주와 교류하는 야메시의 일본인들과 함께 자리를 하게 되었다.

그 분들은 한국어를 배우고 있었으며, 우리 일행을 극진하게 맞이하였다. 때론 일본말로, 때론 한국말로 또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그분들은 우리나라의 드라마나 가수들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분들을 위해 지리과 최성길 교수님은 이미자의 아씨라는 노래를 적어서 직접 불러 보아 흥겨운 시간이 되었다. 야메는 차가 유명한 곳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 전통 다도를 체험하기위해 서일본단기대학부속고등학교에서 일본의 말차라는 전통차를 우려내며 마시는 체험을 하였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우리에게 지극정성으로 소개하였다. 네트워크란 바로 이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냥 유적지와 현장만 보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속에 있는 문화와 마음까지도 나누며, 미래 지향적인 생각들로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것 말이다.

우리는 야메시에 있는 전방후원분인 이와토야마고분과 후쿠오카에 있는 큐슈역사자료관을 마지막 답사지로 둘러보게 되었다.

일본에서 우리나라에 전파된 전방후원분 묘제에 대한 설명과 큐슈역사자료관에 우리나라 계통의 여러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1,400여년 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우리나라와 일본 큐슈지역과의 많은 교류의 흔적과 역사를 더듬어보는 기회가 되었다.

▲ 야메시에서의 다도체험

미레지향적인 관계를 기대

우리는 일본에서의 마지막 밤을 후쿠오카 하카다역 앞의 클리오코트호텔에서 맞이하였다. 지금까지의 여정을 정리하는 쫑파티를 가졌는데, 우리 모두는 너나할 것 없이 그동안의 여행을 통하여 자신이 바라본 일본에 대하여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를 하였다.

이 자리에는 무령왕축제와 한일간의 교류를 위해 마음 다해 섬겨주신 백제문화제 홍보대사이기도한 이가와 유카씨도 함께 자리를 하였다. 그녀는 우리들과의 헤어짐을 앞두고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하였다. 그 눈물을 통해 우리들의 교류가 더욱 무르익어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6월 7일 일본에서의 마지막 조찬을 들고 우리는 하카타항으로 향했다. 부산행 배를 기다리며 우리들은 일본에 올 때보다 한 두 개의 짐이 더해졌다. 선물꾸러미가 더해진 것만큼이나 우리의 마음속에 일본과 일본인에 대한 우호와 사랑이 가득해진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하였다.

마음속에 가라앉았던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들이 조금씩 희석되어가며, 우리의 가까운 친구로 일본을 생각하게 됨이 이번 여행의 가장 큰 수확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국에 도착하여 공주로 오는 동안 우리는 못다 한 이야기들을 서로 하였다.

윤용혁교수님의 말처럼 우리는 한 배를 탔었으며, 이제 한 배에서 나온 사람들이라는 이야기가 가슴에 깊이 새겨지게 되었다. 그렇다.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를 통해 우리는 서로 만났으며, 일본인들과 거리가 좁혀졌으며, 새로운 많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고 돌아오게 되었다.

우리의 교류가 매우 발전적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순수하게 자발적으로 참여한 한 분, 한 분을 보면서, 10대 초등학교 학생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층이 참가한 이번 답사와 교류는 좁게는 공주시민들과 가라츠시민 사이에 나아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 새로운 우정과 교류를 두텁게 하는 미래지향적인 관계가 되었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다음에는 우리의 현존하는 미래인 청소년들을 인솔하여 올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번 여행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감동적인 여행이 되었다. 우선은 좋은 분들과의 만남이다. 공주에 계신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회원들, 가카라시마의 주민들, 이가와 유카, 야메 교류회원들, 공주회회원들, 나카사키대학의 교수와 친구분들, 한국에 대한 애정을 갖고 사랑으로 대해주신 많은 분들이 감동의 하모니를 이루었다.

이번 4박 5일의 여행은 짧지만 인생의 기승전결과 희노애락을 경험하고 삶을 배우고 즐기며, 여운을 갖는 시간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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