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부디 그 걸음 어지럽게 하지 마시게
오늘 남긴 그대 발자국
마침내 뒤따르는 사람의 이정표라네.

그러니까 1998년도 초등학교 교장 자격 연수를 받기 위해 충북 청원군에 있는 한국교원대학교에 가서 공부할 때 본 글귀다.

기숙사 로비에 큼직큼직한 글씨로 쓰여진 아주 기다란 액자 하나가 터억 걸려있었다.

놀랍게도 글의 말미에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게다가 당신이 글씨 쓰신 나이까지 밝혀져 있었다.

아, 제게 김구 선생이 지으신 시로구나. 떠듬떠듬 한자를 읽어나갔다. ‘담설야중거… 눈 덮인 들판에서 발자국 옮길 때…’ 그것은 정말로 김구 선생다운 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김구 선생의 시가 아니고 조선의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했던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시였다. 일테면 김구 선생의 애송시였던 셈이다.

어쩌면 당신의 삶이나 생각과 너무나 닮은 구석이 있어 그 시를 평생 동안 외우고 다니며 마음에 맞는 사람, 기념해야될만한 장소에서 외우기도 하고 종이에 기록하여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결단이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마음속으로 암송했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하나, 그것도 복사본으로 남겨진 어떤 하나가 교원대학교의 기숙사 벽에 걸려 있다가 내 눈에 들어온 것이리라.

서산대사와 김구 선생, 그리고 나. 여기에 무슨 연결고리가 있고 만남의 필연성이 있었더란 말인가! 좋은 글은 이렇게 시간과 공간, 인간의 거리를 넘어 사람과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공덕이 있다. 놀라운 일이다.

서산대사가 생각하고 실천했던 삶의 태도와 생각을 김구 선생이 따르고 또다시 그 뒷사람이 계속해서 따르고 있다는 사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글의 내용 그대로는 할 수 없다 해도 그 비슷하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조금씩 좋아지고 밝아질 일이다.

오늘의 나의 삶과 행동과 언어표현이 나중 사람들의 이정표가 된다는 사실. 작은 일 하나에도 옷깃을 여미며 조신하게 처신하며 잘 살아야 할 일이다. 아니, 잘 살아내야 할 일이다.

이 시는 우리 고장 마곡사 어느 암자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그건 김구 선생이 한 때 그 곳에 피신해 있으면서 스님으로 수도 생활했던 일을 기념해서 그렇게 했겠지 싶다. 시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오란행(不須湖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燧作後人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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