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변 구 터미널 앞 대로변에는 큰 표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표석에 새겨진 글자는 단 석자, ‘유구로’이다.

아마도 유구읍으로 가는 대로(大路)라는 의미인 것 같지만 사람들이 거의 눈여겨보기 어려운 ‘뜬금없는’ 표석이다.

오키나와로 떠나기 전날 이 대로를 지나는데 비로소 그 표석의 세 글자가 나의 눈에 들어왔다. ‘유구로?’

유구로?

‘유구(琉球)’는 오키나와의 옛 이름이다. ‘유구로’라는 글자가 비로소 눈에 들어온 것은 내가 3개월 일정으로 유구로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정남쪽으로 쭉 내려가면 제주도 성산포에 닿는다. 더 남쪽으로 계속 한참을 내려가면 닿게 되는 곳이 오키나와이다. 즉 공주와 오키나와는 위도는 큰 차이가 있지만 경도가 같아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같은 것이다.

7월 1일 아시아 직항으로 2시간 만에 나하공항에 착륙하고 유구대학의 게스트하우스에 일단 머물게 되었다. 오키나와에서의 3개월간 나의 신분은 유구대학 객원연구원, 법문학부의 이케다(池田) 고고학연구실에 소속된다.

유구대학은 국립대학으로 말하자면 오키나와의 서울대에 해당한다. 원래는 수리성에 있던 곳을 ‘수리성을 수리하면서’ 지금의 캠퍼스로 이전하였다. 학생 수는 대학원생을 포함하여 약 8천, 학부(대학)는 7개 학부로 공주대의 6개 대학과 내용상 큰 차이가 없지만, 의과대와 함께 관광산업과학부가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

한국과는 제주대, 계명대, 연세대, 서울시립대 등과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있다. 유구대학 캠퍼스는 일본에서 세 번째로 넓은 면적을 자랑한다.

행정구역상으로는 니시하라(西原), 나카구스크(中城), 기노완(宜野灣)의 3개 시군에 캠퍼스가 걸쳐 있다. 그만큼 외진 곳이어서 갈 데라고는 정말 도서관 밖에 없다. 근년 일본에서 큰 정치문제화 하였던 후텐마 미군기지도 대학에서 가까운 위치이다.

오키나와는 오키나와 본섬을 중심으로 160개의 섬으로 구성되어 있다. 섬을 합한 면적은 제주도보다 약간 크지만, 인구는 140만으로 65만의 제주도보다 2배가 넘는다. 오키나와에 오기 며칠 전 공주에서는 홍길동 세미나가 있었다.

발표자의 1인인 설성경 교수는 일찍부터 공주의 홍길동이 조선을 탈출하여 만년에 오키나와에서 활동했다는 주장을 펴왔다. 유구왕권에 저항한 야에지마(八重島)의 영웅 ‘홍가와라’가 바로 홍길동이라는 것이다.

5백년 유구왕조는 오키나와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우리로 말하면 ‘조선’에 해당하는 유구왕국은 1609년 사츠마(일본 가고시마, 큐슈남단)의 침입을 받아 그에 복속하고 메이지유신 이후인 1879년 오키나와 현으로 완전히 일본에 합병되었다.

1945년 태평양전쟁 때는 본토를 위협하는 미군의 압박에 대한 격렬한 저항 거점이 되어 징용 한국인을 포함, 20만이 오키나와에서 목숨을 잃었다. 미군정하에 있다가 1972년 일본에 반환된 오키나와는 말하자면 ‘유구’라는 이름의 잃어버린 왕국인 셈이다.

유구로!

그 유구왕국이 건국되기 이전, 13세기에 고려 삼별초의 일단이 오키나와까지 내려갔다는 주장을 나는 한 적이 있다. 학회에 발표한 논문이 신문에 보도되고, 다시 역사스페셜에서 다루어진 적이 있다.

이 유구에서 삼별초를 만날 수 있을지, 홍길동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도 그렇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잃어버린 왕조 유구와 한국 역사와의 관련성을 찾아보는 것이 3개월간의 나의 작업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오키나와의 관문 나하 공항에 도착하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공주 구 터미널 대로변의 ‘유구로’, 그 표석이었다. 그 표석의 지시대로 나는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유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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