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릉 발굴 40주년을 맞았다. 무령왕 없는 공주, 생각하면 아찔한 일이다. 이해준교수와 나는 그때 대학 2학년, 그리고 40년 세월이 흐른 것이다.

얼마 전 ‘고도보존’ 심화반에서 ‘공주인물’ 5인을 설문한 적이 있다. 그때 3명의 이름을 적어내는데 무령왕은 아예 제외하고 시작하였다.

‘공주인물’이라면 우선 무령왕부터 꼽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유구의 무령왕

오키나와에서 나의 과제중의 하나는 무령왕을 만나는 일이다. 꼭 10년 전인 2001년 가을 나는 가카라시마에 들어가 무령왕을 만났었다. 그리고 이후 10년째 무령왕 국제교류가 진행되고 있다.

정영일 회장의 ‘무령왕국제네트워크’는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다시 10년 만에 나는 또 한 분의 무령왕을 오키나와에서 만나려고 하고 있다.

유구왕국의 역사에도 무령왕(재위 1395-1405)이 있다. 백제 무령왕과 유구 무령왕은 약 9백년의 시간적 차가 있다. 그러나 똑같이 40이라는 나이에 즉위한데다 한자까지도 똑 같은 무령왕(武寧王)이다.

아쉬운 것은 유구의 무령왕은 백제 무령왕과는 달리 실패한 임금이었다는 점이다. 백제 무령왕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어지러운 국정을 안정시키고 백제를 중흥시키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오키나와의 무령왕은 반대로 쿠데타로 실권한 실패한 임금이다. 그가 무너지고 성립한 왕조가 상씨(尙氏) 왕조이다. 상씨왕조는 우리로 치면 이씨의 조선왕조에 해당한다.

유구왕국에 대한 기록이 우리나라 역사서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고려시대 말(창왕 원년, 1389)이다. 당시 오키나와는 우리의 삼국시대처럼 중산, 북산, 남산의 세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중산국의 왕 삿토(察都, 재위 1350-1395))가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

그는 왜구에 납치되어 온 유구의 고려인을 송환하면서 고려와의 통교를 희망하였다. 이 시기 삿토 왕통의 중산국은 명과의 조공관계를 성립시키고 해외 무역으로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그 왕통이 무령왕에 이어진 것이다. 무령왕은 처음으로 명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임금이다. 그러나 책봉도 무위로 그로부터 2년 만에 왕조는 무너지고 말았다. 

삿토 왕통에서 고려와 통교하고 명에 입공하여 책봉을 받는 이러한 대외관계의 강화는 결국 내부 경쟁자를 압도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무령왕 정권을 무너뜨린 것은 호족 쇼하시(尙巴志)였다.

유구의 상씨 왕조하에서 2백년 후에 만들어진 역사서는 한결같이 무령왕이 ‘폭군’이었다는 것을 강조 한다. 좋아하는 것은 정치 대신 여색과 사냥, 신하들은 두려워 간언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병’을 일으켜 무령왕을 ‘토벌’한 것이 쇼하시였다는 것이다.


유구의 무령왕이 실패한 임금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러나 무령왕에 대한 평가가 후대 상씨 왕조의 자료 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이를 글자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고려 말 우왕, 창왕에 대한 조선조 역사 편찬의 왜곡을 기억하면 이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폭군 무령왕?

무령왕을 무너뜨린 쇼하시는 북산과 남산을 차례로 격파하여 통일 유구왕권을 확립하고 왕도를 우라소에(浦添)에서 슈리(首里)로 옮겼다. 이 유구왕국이 조선왕조와 교류하고 대외무역으로 성장하였던 역사상의 유구왕조라 할 수 있다.

무령왕을 타도하고 성립한 유구왕국의 오키나와에서 무령왕의 실체를 찾는 것은 쉽지 않다. 무령왕의 최후 왕성이었던 우라소에성조차 1945년 4월 오키나와 전투의 치열한 포격전으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분의 무령왕을 이곳 오키나와에서 만날 수는 없을까. … 혹 왕릉 발굴 40주년이라는 명분이라면 안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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