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得與亡孰病, 是故甚愛必大費, 多藏必厚亡, 知足不辱, 知止不殆, 可以長久.

人類의 종교사상은 모두 삶과 죽음, 존재와 허무를 論한다. 세익스피어와 니체는 이렇게 말했다.

“神은 죽었다.”,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그러나 神이 살았다거나 죽었다거나 하는 것은 지극한 道의 입장에서 無知한 말들이다. 韓龍雲은 「님의 沈黙」에서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라고 하였다.

老子도 太極에서 陰陽(兩儀)이 생기고 음양에서 萬物이 생겼다고 하였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그러나 莊子는 없음(無에)서 있음(有)이 생긴 것이 아니고 無有(있음이 없음)에서 有無(없음이 있음)가 생겼다고 말한다.<「庚桑楚」, 天門者無有也 萬物出乎無有 有不能以有爲有 必出乎無有 而無有一無有>

없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없다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하는 것이 진정으로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있다고 하지만 없다거나 있는 다는 것의 範疇(범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죽는다는 것이 삶을 벗어난 것이 아니고 삶이라고 하는 것이 죽음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 아니어서 인간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죽을 수 없으며 또한 어떠한 방법으로도 살수 없다. 라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삶과 죽음에서 도망갈 수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한때 절망과 죽음을 삶의 목표로 삼았던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극한의 절망과 죽음 속에서 진정한 희망과 삶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말한다.

삶이 삶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삶이요, 죽음이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진정한 죽음이다. 삶과 죽음은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도 아니요 죽음도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영원할 수 있다.

이것이 莊周가 말하는 죽은 자는 죽은 자들이 파묻게 하며 산자들은 살아있는 자들이 살게 하라는 말이다. 자살을 꿈꾸는者 결코 죽을 수 없다. 삶을 꿈꾸는者 결코 살아갈 수 없다.

이것이 無有이다. 죽음이 삶의 끝이라던가. 삶이 죽음보다 행복하다고 하는 말은 삶과 죽음의 근원을 모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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