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고도육성아카데미 3기 일본답사기 上

공주고도육성아카데미 3기 수료생이 4박 5일 간의 일정으로 일본답사기행을 다녀왔다.

이번 4박5일 답사는 공주시와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의 도움으로 8월 23일부터 27일까지 일본(오사카, 나라, 교토, 가나자와) 지역을 탐방하는 행사로 역사·문화도시 조성사례를 답사하여 공주시의 고도육성 정책에 일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공주 고도육성 아카데미 수료생의 사기증진 및 공주시의 창조적 고도육성 정책 추진에 필요한 선진 외국 도시의 역사·문화적 자원의 활용과 보존전략 등을 벤치마킹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번 답사는 인솔자인 정재윤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장과 공주고도육성아카데미 3기 수료생 총 32명, 라선정 고도육성담당연구원, 공주시청 문화재과 김두환, 이선화 직원 등 총 36명이 참여했다. 

 

▲ 백제왕 신사

 

우리는 8월 23일 오전 5시 공주대학교 인사대 정문 앞 주차장에 모여 인천 국제공항으로 출발했다. 

이번 답사 길의 인솔자인 정재윤 소장은 “아카데미 수료식에서 수강생 여러분들이 발표를 너무 열심히 해주셔서 감명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설명에만 치우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며 “고도로서 공주가 있게 된 역사, 문화의 정체성, 자부심을 가져야 모든 것이 거기에서 비롯된다. 이제까지 고도보존 사업이라고 해서 너무 부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보니 관광이다, 활성화다 이런 것을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보다 더 기본적인 것은 우리의 공주에 대한 ‘이해’”라고 설명했다.

이어 정 소장은 “공주에 대한 ‘이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주변의 이야기도 알 수 있고 자기가 할 일을 찾을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이번 답사가 공주라는 곳에서만 백제의 일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백제의 일화가 있는 것을 느끼고 생각 하면서 백제 웅진 문화의 내용을 확장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오사카(大阪)

첫째 날은 오사카(大阪) 도시에 인근에 있는 ‘백제의 숨결이 살아 숨 쉬는 곳’ 들을 둘러보기로 했다.

고대에 나니와(難波), 중세 이후에는 오사카(大坂) 또는 고사카(小坂)로 부르다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현재의 지명으로 고쳐졌다. 일본문화의 여명기인 아스카시대(飛鳥時代 6세기 말∼7세기 중엽)부터 세토나이카이와 수도 아스카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을 이루어, 한반도를 비롯한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문호로서 발전했다.

 

 

도쿄와 더불어 일본의 2대 교통중심지이다. 신칸센(新幹線)을 비롯하여 철도·지하철·도로가 발달하여 교토(京都)와 나라(奈良)·고베(神戶) 등 인근의 도시 및 관광지를 연결하고 있다.

오사카에는 교토·나라 등의 인근도시에 비해 관광자원은 많지 않으나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인 만큼 유적지가 많다. 오사카성(城)을 비롯하여,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의 하나인 시텐노사(四天王寺), 일본의 3대 민속제전의 하나인 천신제(天神祭)로 유명한 덴만궁(天滿宮) 등의 사찰·신사(神社)가 있다.

오사카는 한국 교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약 30만명)인데, 특히 시(市) 동부의 이쿠노구(生野區)는 전국적으로 보아 한국 교포가 가장 많이 사는 지역이다.

인덕천왕릉(人德天王陵)

답사 팀이 첫 번째로 이동한 곳은 일본 최대의 무덤 인덕천왕릉(人德天王陵)이다. ‘전방후원분’이라고 해서 무려 486미터에 달하는 세계최대의 무덤이다. ‘전방후원분’은 일본의 전형적인 무덤분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전방후원분이라고 부르지 않고 ‘전방후원형분’이라고 부른다.

 

▲ 인덕천왕릉에 대해 설명하는 정재윤 소장

 

현재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위치하고 있고 인덕천왕릉은 대지 위에 축조된 모즈고분군 중에 하나로 다이센 고분으로 부르기도 한다.

모즈고분군은 인덕천왕릉을 비롯하여 미산자이 고분(이중천황릉), 기타미쿠니가오카초 등 현재 훼손된 상태의 고분을 포함하여 전방후원분 21기, 원분 20기, 방분 5기가 확인, 총 46기의 고분이 남아있으며, 총 면적은 동서남북 사방 4㎞ 정도에 이른다.

이 왕릉을 보면 전방부는 좀 낮게 후원부는 전방부 보다는 높게 축조되었으며 특이한 것은 고분의 둘레에 도량을 파서 그 흙을 올려 만든 점이다. 이렇게 흙을 파 올려서 봉분을 만든 다음 봉분의 표면에 편석(무덤 표면을 덮는 돌)을 덮어서 봉분의 흙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는 축조법을 썼다.

 

▲ 인덕천왕릉을 둘러 싸고 있는 해자

 

능을 둘러싸고 있는 도랑처럼 만든 부분을 해자(垓字)라고 하며 성이나 공원, 능 등을 도량 밖의 산불이나 기타 피해로부터 귀중한 대상물을 방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것이다. 참고로 오사카성 둘레에 있는 해자의 폭은 70~90 미터 정도라고 한다.

사야마 저수지 박물관

자리를 이동해 일본 최고의 댐식 용수지, 사야마 저수지의 토목유산을 그대로 보존 전시해 놓은 사야마 저수지 박물관에 도착했다.

사야마 저수지는 7세기 초에 만들어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댐식 용수지이다. 사야마 저수지의 개수(改修)에는 나라시대의 승려 교키가, 마쿠라 시대의 승려 죠겐, 에도시대의 무사 가타기리 가쯔모토 등 역사상의 유명한 인물이 참여해 왔다.

1,400년의 역사가 쌓여있는 제방, 물을 빼내는 송수관, 제방의 미끄럼을 방지하는 목재틀 등의 토목유산에는 각 시대의 지혜와 연구가 활용되고 있다.

 

▲ 사야마저수지 박물관에서 정재윤 교수의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팀

 

사야마 저수지 박물관은 이러한 귀중한 토목유산을 미래에 계승하고 고대부터 사람들의 삶에 깊이 관계되어 온 치수, 관개와 토지개발의 역사를 현지에서 옮겨 온 토목유산을 중심으로 영상이나 모형 등을 사용하여 알기 쉽게 소개하고 있다.

현재 김제 벽골제와 공동으로 한·일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마침 그 곳에 도착 했을 때 박천수(경북대 고고인류학과)교수와 고야마다(사야마 저수지 박물관)설립자를 만나볼 수 있었다. 박 교수는 현재 오사카대학에 1년간 연구하기 위해 와 있다고 했다.

백제 것이 일본에 있는 것이 안타깝다. 왜 일본사람들은 백제인이 필요했었을까? 일본·물자·권력 두 나라가 서로의 필요에 의한 상생과 당시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견양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건축의 실체를 보면서 백제인들이 어떤 영향을 끼쳤던 것인가와 이 지역의 문화에 얼마나 많은 기여와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사마야저수지 박물관에 수로를 그대로 전시해 놓음

 

백제인의 힘의 원천지 비조호신사(飛鳥戶神社)

‘곤지’의 발자취를 쫒아서 이동했다.

비조호신사(飛鳥戶神社)는 무령왕의 아버지인 곤지(昆支)왕을 제신(祭神)으로 모신 곳이다. 아스카베 신사의 원래 이름은 ‘곤지왕 신사’였다.

현재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위치하고 있다. 한반도 도래계 집단의 무덤으로 보이는 비조천총(飛鳥千塚), 고안천총(高安千塚), 호미산천총(乎尾山千塚) 등 대규모의 무덤이 조영되어 있으며 한반도 관련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 비조호신사 벽에 성금을 낸 주민명부

 

서문(西文)·선진(船津)·갈성(葛成)씨 등의 많은 도래계 씨족의 활동이 보이고 있어 고대 한반도 도래계 집단이 많이 이주했던 지역임을 알 수가 있다.

비조호신사는 아스카 지역의 명신대사(名神大社)로서, 웅략천황 때 도왜 전승을 가진 백제계 비조호조 일족의 조상신인 비조대신(飛鳥大神)을 제사지내고 있다. 이 비조대신은 바로 곤지(昆支)라는 인물이다.

곤지는 비유왕(毘有王)의 아들이며, 개로왕·문주왕의 동생이다. 한성이 함락되고 웅진 천도 후 귀족이 발호한 위기 상황에 귀국하여 비록 그 또한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으나 그의 아들인 동성왕과 무령왕이 연이어 왕위에 올라 그의 위력을 짐작케 한다.

 

▲ 비조호신사

 

그는 개로왕 7년(461) 왕의 명령에 의해 왜에 파견되며 16년간 왜국에 머무르게 된다. 실제 곤지가 장기간 체류한 것은 바로 단순한 청병사가 아닌 야마토 왕조의 묵인 내지는 협조 하에 카와찌 지역의 이주민들을 규합하기 위람이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다.

신사에 들어서자 한쪽 벽에는 지역의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낸 성금액과 이름들이 빼곡히 적혀져 있다. 신사 보수와 유지에 사용할 수 있도록 곤지의 후손들이 헌금을 한 것이다. 무령왕의 아버지인 ‘곤지’가 이국땅에서 얼마나 힘을 썼는가와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근처를 조금 걸어서 관음총으로 자리를 옮겼다. 백 개 이상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보니 백제시대의 무덤총 1,000개의 무덤이 있다.

 

▲ 관음총 고분을 둘러보고 있는 답사팀

 

관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고 설명표지판도 허술하기 그지없었으며, 풀이 산더미처럼 자라있어 답사팀 모두가 화가 난다는 표현으로 목청을 높였다. 역사 속에 사라져간 백제인들에 대해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관음총은 무령왕의 고분과 거의 흡사했다. 10명 정도의 인원이 들어가면 못 들어갈 정도로 비좁고 작았다.

 

▲ 백제인의 무덤 관음총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백제왕신사까지 오늘 들려야 내일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우리 답사팀은 강행군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다시 답사 일정을 시작했다.

백제왕신사 제신은 백제왕이며 조성 시기는 성무천황(724~749)시기이다. 신사를 조성한 인물은 백제왕 경복(敬福)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왕씨(百濟王氏)는 백제멸망 후 도왜한 백제인 집단으로 일본정부에서 왕성한 활동을 벌인 일족이다. 백제왕씨의 시조는 의자왕의 아들인 선광(禪廣) 또는 (善廣 : 젠코우)이다.

 

▲ 백제왕신사 현판

 

현재 일본열도에는 백제 멸망 후 도왜한 백제계 유민들과 관련된 여러 유적들이 전해져오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백제왕신사는 도왜 이후 대화 정부 내에서 유력 집단을 형성하였던 백제왕씨 집단의 열도 내에서의 정착 활동과 이를 중심으로 한 백제계 유민들의 통합에 대하여 전해주고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사진 정필석 시민기자 1478@kknews.co.kr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