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고구마를 많이 먹고 자랐다, 우리 또래가 거의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 어느 시인의 싯귀를 빌린다면 나를 살린 것은 3, 4할이 고구마였다!

일동장유가의 작가 김인겸 세미나를 주관하면서 고구마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고구마는 기근으로 죽음에 이르렀을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한 소중한 식품이었을 뿐 아니라, 쌀이 귀했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겨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고구마가 통신사의 일원으로 갔던 공주의 선비 김인겸 등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전래되었다는 것을 안 것은 작은 하나의 감동이었다.

나를 먹여 살린 3, 4할은

고구마는 원래 ‘감자’라는 이름이었는데 일본에서는 큐슈의 사츠마 지방 이름을 따서 흔히 ‘사츠마 이모(芋)’라고 부른다. ‘사츠마’라는 지명이 붙게 된 것은 에도 막부가 사츠마(가고시마)의 고구마를 가져다 전국에 보급하였기 때문이다.

어떤 오키나와 사람은 거기에 불만이다. 왜 ‘류큐 이모’라 하지 않고, ‘사츠마 이모’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일본의 고구마는 류큐, 즉 오키나와에서 들어갔기 때문이다. 중남미가 원산인 그 고구마는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유럽을 거쳐 아시아까지 온 것이다.

그리하여 1594년에 필리핀에서 남중국으로 그리고 10년 뒤인 1605년에 류큐의 한 총관(공물선의 사무장직)이 공무로 중국에 갔다가 항구도시 복주(福州)에서 오키나와에 가지고 들어오게 된다.

총관의 고향 마을 노구니(野國)에 심겨진 고구마는 1609년 사츠마의 류큐 침공을 계기로 오키나와에서 급속히 보급되었다. 임진왜란 직후 사츠마는 재정난 타개를 위한 방편으로 류큐 왕국을 침공한다.

항복한 류큐는 매년 쌀 1만석의 공납을 부담해야 했다. 이로 인해 야기된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하여 목숨 걸고 추진한 것이 고구마의 보급이었다. 뿌리식물인 이 고구마는 태풍이나 한발과 같은 자연재해에 강했기 때문이다.

류큐의 고구마는 그 후 기관 고장으로 오키나와 나하항에 입항한 오란다(네델란드) 선박을 통하여 일본 나가사키 현의 히라토(平戶) 상관(商館)으로 유입되어 큐슈에 퍼지게 되었다고 한다. 1615년의 일인데, 정작 이 ‘사츠마 이모’가 사츠마(가고시마)에 들어간 것은 훨씬 늦은 1698년이었다.

큐슈에 유입된 고구마는 1733년 대기근을 계기로 일본전역에 빠르게 보급되었다. 1764년 통신사로 일본에 간 조엄 일행이 쓰시마에 도착했을 때, 종사관으로 함께 간 공주 선비 김인겸은 이 고구마를 보고 눈이 버쩍 띄었다. 식량난을 해결할 절호의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이 씨를 얻어다가/ 우리나라 심어두고/ 가난한 백성들을/ 흉년에 먹게 하면/ 진실로 좋건마는” 한글로 지은 퇴석 김인겸의 장편 기행 시 <일동장유가>의 한 구절이다. 

이 씨를 얻어다가

오키나와에서 고구마를 처음 재배했던 마을은 지금은 가데나(嘉手納) 미군기지의 활주로가 되어 있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고구마를 처음 가져온 그 시골 노구니(野國) 출신 총관의 공덕을 기억하고 2005년 ‘감자전래’ 400년 행사를 성대히 치렀다.

그의 무덤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고향에는 동상을 세우고, 자료집을 만들고, 오키나와 역사 교과서에 기록하여 학교에서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일동장유가의 작자 김인겸의 시비는 금강변에 있지만 그가 고구마를 가지고 온 장본인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그것이 처음 어떻게 심어지고, 어떤 경로로 전국에 보급되었는지도 잘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그때 이후로 이 고구마가 오랫동안에 걸쳐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이다.

공주 선비 퇴석 김인겸의 무덤은 고향 마을 무릉동의 뒷산에 있다고 한다. 몇 년 전 향토문화연구회 회원들이 그 전언을 확인하느라 무릉동의 뒷산을 헤맨 적이 있다는 사실을 덧붙여 기록해둔다. 그의 묘소를 확인하지 못했다는 사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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