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저물어 푸른 산 더욱 멀고
하늘도 차가운데 뼈저린 가난이여
사립문 밖에 문득 개 짖는 소리
눈보라 속 돌아오는 사람 누군가?

 올 겨울 들어 눈이 자주 내린다. 첫눈도 일찍 내리더니 요즘 며칠은 날마다 눈이다.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눈이고 한낮에도 질퍽하게 눈이 내려쌓인다.

세상이 온통 은빛, 백색의 세상이 되었다. 자동차를 타고 길을 가다보면 앞 유리창에 내려쌓이는 눈 때문에 와이퍼가 뻑뻑하여 잘 돌아가지 않을 정도다.

눈의 나라, 요정의 나라, 마치 영화 속 장면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여간 신비로운 게 아니지만 자동차 운전하는 사람들에겐 여간 고역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눈이 내려 세상이 흑백이 되는 날이면 문득 나에게 떠오르는 시 한 편이 있다. 그것은 한글시가 아니라 한시. 1959년, 중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열다섯의 나이. 6.25 전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은 온통 썰렁하고 너나없이 가난하고 춥고 배고프던 시절. 서천중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교실복도 게시판에 언제부턴가 새하얀 종이에 시 한편이 씌어있었다. 어떤 선생님이 베껴다 붙여놓았을까? 유리창마저 두어 장 깨져 나가 눈보라 찬바람이 드나드는 교실 복도를 구멍 난 목양말 신은 발 오그려 딛고 다니며 읽었다.

‘해 저물어 푸른 산 더욱 멀고…’ 그 마음이 내 마음이었다. 울고 싶을 정도로 그랬다. 어린 아이가 어찌 그걸 다 느끼고 알았을까? 조숙한 아이였겠지 싶다.

실은 누가 쓴 시인지도 모르고 누가 번역한 시인지도 모르고 그만 외워버리고 말았다. 나중엔 본래의 시에 들어간 단어를 제키고 내 마음대로 문장을 만들어 외우고 다녔다. 자라서 알고 보니 그 시는 중국 당나라 시인 유장경(劉長卿 709?∼785?)이란 시인의 시.

그리고 번역자는 신석정 선생(정음사 판 『당시선집』소재). 시인은 중당(中唐)시대의 시인인데 하북 사람으로 733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여 감찰어사에 올랐으나 모함으로 목주사마(睦州司馬)로 좌천되었으며 나중에 수주자사(隨州刺史)를 역임한 인물로 담박한 필치로 쓴 오언(五言)으로 쓴 전원산수시(田園山水詩)에 능하여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앞의 두 행은 눈으로 보는 세상, 즉 시각이미지를 살린 경우요, 뒤의 두 행은 귀로 들리는 세상을 표현한 청각이미지의 활용이다. 전혀 설명이 아니고 묘사다. 시인 자신이 나서서 이런 말 저런 말 지껄이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담백하게 풍경과 사실과 느낌을 던질 따름이다. 그것도 감정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지로 바꾸어 던질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시야말로 이미지즘시요 언어로 바꾼 그림이요 음악이라 할만하다.

무슨 말이든 이상한 말, 특별한 말, 그리고 이런 저런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면 좋은 시라고 생각하는 현대시인들, 이러한 한시를 공부하면서 매우 각성하고 반성하는 바가 있어야 할 줄 안다. 

원시의 제목은 ‘봉설숙부용산주인(逢雪宿芙蓉山主人-눈을 만나 부용산주인 댁에서 하룻밤을 묵다)’인데 시의 본문은 다음과 같다. 일모창산원(日暮蒼山遠)/ 천한백옥빈(天寒白屋貧)/ 시문문견폐(柴門聞犬吠)/ 풍설야귀인(風雪夜歸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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