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히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나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우리나라가 제국주의 일본한테 침략 당해 나라 잃고 지내던 그 36년 세울. 그 세월에 정말로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의 마음을 잃지 않고 살아간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지식인으로서, 가운데서도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민족과 국가를 사랑하는 순정한 마음으로 일생을 살며 지조를 잃지 않았던 인물이 몇이나 될까? 언뜻, 만해 한용운 선생의 이름이 떠오르고 그 위에 다시 떠오르는 이름은 누구일까?

이육사 그분은 애당초 시인이기 이전에 독립 운동가였다. 애국자였고 혁명가였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이만한 시인 한 분을 우리가 가졌음은 영광 중 영광이다. 하지만 당사자의 생애는 얼마나 고달팠을까? 1904년 경북 안동에서 출생하여 1944년 별세. 윤동주의 27세보다는 훨씬 길지만 고작 40세에 마감한 생애다.

그런데도 일경에 체포되고 옥고를 치르기를 네 번씩이나 했다. 게다가 만주 봉천(오늘날의 심양)에 가 조선국관학교에 입교(1932년)하여 1기생으로 수료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니 그야말로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산 짧은 생애다.

그런데도 수월찮은 시를 남겼다. 그것도 오늘날 편편이 명편으로 평가받고 있다. 다행스런 일이고 고마운 일이다. 특히 위의 시 「광야」는 「절정」,「청포도」,「꽃」,「교목」과 함께 시인의 대표시로 인구에 회자(膾炙)되는 시이다.

광야! 평생을 드난살이로 일관한 시인의 일생을 표상하는 단어만 같다. 이육사 선생만 생각하면 꼭 나는 하이얀 무명 두루마기에 까만 신발을 신고 얼음 언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건너는 한 젊은 호걸풍의 남정네를 상상하곤 한다.

아마도 긴 머리카락을 눈보라에 나부끼며 동백꽃같이 붉고도 뜨거운 심장 하나로 독립 잃은 조국과 중국 땅을 오갔으리라. 그러나 사진자료로 만나는 시인의 모습은 호동그란 안경에 단아한 선비풍의 미남형이다.

우리가 선생의 이름처럼 알고 있는 육사(陸史)는 시인의 호이고 본명 원록(源祿) 또는 원삼(源三)이며 개명한 이름은 활(活)이다. 전하는 말로는 일본인들의 감방에 갇혔을 때 시인의 수인번호가 ‘264’번이어서 이를 이름으로 바꾸어 ‘이육사’로 했다는 말이 있다.

시인이 세상을 떠난 것은 용케도 민족해방 바로 한해 전(1944년)이라니 참으로 기박한 운명의 장난이었다 할 것이다. 시집도 단 한 권 1945년 광복되던 해에 『육사시집』(서울:서울출판사)으로 나왔다. 유고시집이었다. 

이육사 선생의 시는 한시 전통의 영향으로 전경후정(前景後情)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에 경치나 사물을 제시하고 시인의 마음이나 입장이나 정서는 뒤에 나오도록 배치한 것이다.

5연 가운데 1연은 처음 열리는  ‘하늘’이고 2연은 바다를 연모해 휘달리는 ‘산맥’이요 3연은 끊임없는 광음을 두고 부지런히 흘러가는 ‘강물’이다. 그 세 가지가 모두 ‘광야’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시의 소재 자체가 크고 목소리가 통이 크다. ‘웅혼하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4연에 와서야 슬그머니 시인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눈 내리는 겨울을 배경하여 ‘매화향기’와 함께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는 농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 노래란 어떤 노래일까? 민족의 노래, 민족을 사랑하는 노래가 분명할 것이다. 이러한 ‘광야’에서 시인이 그리워하는 사람은 ‘다시 천고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다. 그 초인으로 하여금 당신이 심은 노래의 씨앗을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소망이다.

이 ‘초인’이 바로 오늘날 우리들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들은 지금 얼마나 부끄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닐까? 이육사 선생에게 죄송한 심정이 아닐 수 없다.

올해 겨울처럼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 또 있었을까? 내리고 내리고 또 내리는 눈이다. 하도 많이 내리니 지겹다 그럴까. 유난히도 많이 눈이 많이 내리고 날씨마저 추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문득 이육사 선생의 「광야」를 읽어본다. 움츠리지 말자. 씩씩하게 살자. 다짐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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