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첫 마음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첫 만남이라서 그랬을 것이다. 한용운 선생의 대표작을 들라면 세상 사람들은 선뜻 「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수의 비밀」, 「복종」,「사랑하는 까닭」 같은 작품을 들겠지만 나는 「나룻배와 행인」을 든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박목월, 신석정 선생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마음을 키울 때 우연히 구한 시선집 행태의 책 한권에서 문득 만난 작품이 바로 한용운 선생의 이 작품이었던 것이다.

얼핏 연애시처럼 읽혔다. 하기사 한용운 선생의 모든 시들이 연애시처럼 읽힐 가능성이 있다. 나를 '나룻배'로 하고 사랑하는 사람인 당신을 '행인'으로 표상한 그것이 영락없이 연애하는 사람들의 끌고 당김의 과정처럼 보인다.

실은 이 시 속에 나라 잃은 백성이 나라의 독립을 애타게 기다리며 기원하는 뜨거운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몰랐다. 더구나 수행자의 수행과정이 또 이중으로 오버랩되어 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 그 애달픔이 모두 그렇다. 한쪽은 기다리고 한쪽은 떠나가고… 함께 했던 시간, 즐거움의 날들은 짧고 덧없고 안타깝기 마련. 수행하는 사람들도 그렇다.

일단 스승(나룻배)을 만나 그 스승한테 배움을 얻어 수행을 하고 깨달음(강물)을 얻으면 그 배를 떠나 저 쪽 강 건너의 땅, 더 먼 나라로 가야만 한다. 그것이 운명이다.

애달픔이 있어도 어쩔 수없는 노릇이다. 아쉬움이야 남겠지만 스승이나 제자나 그것을 지나치게 애달파 하거나 집착해서는 아니 되리라. 그러한 일련의 과정을 이 시는 아름다운 파노라마로 보여주고 있다.

한용운 선생은 다면적인 인격으로 해석되는 인물이지만 먼저 우리의 신문학 초기에 아름다운 모국어로 시를 쓴 빼어난 시인으로 평가된다. 한용운 선생의 시에 나오는 퍼스나(話者)는 연약하고 섬세한 심성을 지닌 여성으로 되어 있다. 말하자면 여인의 목소리, 즉 ‘여성(女聲)’인 것이다.

이 여성성의 문제는 우리나라 서정시의 맥락으로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김소월, 김영랑, 박목월의 시를 비롯하여 광복 이전의 서정시 가운데 우수한 서정시들이 모두가 여성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성(男聲性)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다. 굳이 거론한다면 이상화의 「빼앗긴 들도 봄은 오는가」, 서정주와 유치환의 시 일부, 심훈의 「그날이 오면」 정도가 아니겠나 싶다. 어쨌든 우리 시사(詩史)에서 여성의 목소리는 아주 중요한 자리에 있는데 그 중심에 한용운 선생의 시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이 시도 여성의 목소리로 되어 있다. 그것도 인내심 많은 조선 여인네의 굴종에 가까운 삶의 형태를 표방하는 그런 여성의 목소리로 되어 있다. 나와 당신의 관계 설정부터가 그렇다. ‘나’는 나룻배이고 ‘당신’은 행인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룻배인 나는 당신 앞에 온갖 고달픈 일과 삶의 노역을 자청한다.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가는 일이 그것이다.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마다하지 않고 건너가는 소임이 그것이다.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는 데도 말이다.

만약 ‘당신이 아니 오시면’ 어떻게 하나? 그래도 나는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겠다는 고백이다. 그러면서 나는 ‘나는 날마다 날마다 낡아’간다는 것이다. 아름다운면서 안쓰러운 상상의 세계이다.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선생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우리가 부르고 있는 ‘용운’이란 이름은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이고 본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裕天), 만해(萬海, 卍海)는 법호이다.

고향에서 살 때 서당에서 공부했으며 동학에 가담했으나 실패, 강원도 백담사로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독립선언서 말미에 ‘공약삼장’을 추가로 작성해 넣은 장본인이 바로 선생이고 감옥살이 중에 일제에 끝까지 회유 당하지 않고 변절하지 분이 또 선생이다.

선생은 승려로서 불교 유신 운동에 앞장섰으며 여러 차례 불교잡지를 냈으며 신문에 연재소설을 쓴 소설가이기도 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님의 침묵』은 선생의 유일한 시집이고 그 밖에 다수의 한시를 남겼고 시조형식의 글도 남겼다.

생애 후반부에 서울의 성북동 골짜기에 심우장(尋牛莊)이란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일제에 항거하는 뜻으로 집을 북향으로 지은 것이 또한 유명한 일화다. 남향으로 집을 지으면 조선총독부를 바라보도록 방위가 되어 있어서 그러했다는 것이다.

한용운 선생은 일본인이 주는 ‘민적’이란 것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광복 한 해 전에 세상을 하직했다. 이육사 선생도 역시 그러했는데 우연 치고서는 너무나 섬찍한 우연이라 하겠다.

선생은 살아서 보다 돌아간 다음 시인적인 영광을 많이 누리고 있는 시인이다. 선생의 이름으로 얼마나 아름다운 시적인 사업들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모르겠기에 해보는 말이다.

한 시절 일본인들에 의해 나라의 주권을 상실했던 우리로서 만해 선생 같은 시인 한 분 우리에게 있었음이 얼마나 커다란 자존이며 위안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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