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기]- 박기영 공주시의회 의원

6월 1일 새벽 4시 30분, 가라츠시(唐津市) 가카라시마(加唐島)의 제 11회 무령왕 생탄제(生誕祭) 참관을 위해 서른 명의 방문단이 공주대 정문을 출발하였다.

▲ 무령왕의 탄생지인 오비야 동굴

이른 시간인데다 각기 다른 동네에서 거주하는 관계로 출발시간에 늦을까봐 서둘러 도착하였는데 다른 일행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정확하게 예정되었던 출발시간을 맞춰주어 시작부터 기분이 산뜻했다.

개인적으로는 수 년 전부터 방문하고 싶었지만 매번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겨 미루고 미뤄오다 이번에 큰 맘을 먹고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번여행은 4박5일의 일정으로 생탄제 참석과 주변의 유적지등을 방문하여 반도(半島) 한국과 섬나라 일본의 정치적 문화적 관계를 고찰하고자 함이 주목적이다.

답사 길에는 인솔자이신 공주대 윤용혁 교수님과 베스트셀러 ‘일본이야기’의 저자이신 고려대 사학과 김현구교수님 그리고 공주대 지리교육과 최성길교수님께서 동행하여 이동 간 강의를 해 주시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출발 전부터 기대감에 설레었다.

세 분 교수님 외에도 김동일 공주시의회 의원, 최창석 교육장, 심종훈 전 공주시 부시장, 신홍현 전 공주시 국장, 오영익 전 농협공주시지부장 내외와 이종태 전 KBS 아나운서 그리고 무령왕네트워크협의회 정영일 회장을 비롯한 회원들이 함께 하였다.

일정 중 특이한 것은 쉽고 편리한 항공편을 마다하고 굳이 부산으로 이동하여 뱃길을 통해 후쿠오카(福岡)현의 하카다(博多)항에 도착하는 경로를 택한 것이다.

▲ 마츠로관 기념관을 둘러보는 일행들

그 이유는 서기 461년 (개로왕 7년) 개로왕의 명을 받아 동생 곤지(昆支)가 무령왕을 임신한 왕비를 모시고 일본으로 항해했을 그 뱃길을 따라 일본 땅을 밟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롭고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부산항에서 하카다항까지는 213km로 쾌속선으로 3시간이 걸렸다. 부산항을 출발하여 한참을 가니 멀리 대마도(對馬島)가 시야에 들어왔다.

과학과 문명이 급속도로 발달한 지금에는 부산을 떠나 불과 1시간여 만에 대마도를 통과하였지만 백제시대 때 무동력 선박을 이용하여 그것도 백제 땅에서 일본까지의 여정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을까 상상이 갔다.

마츠로관(末盧館)과 농경문화

김현구 교수님의 강의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고대(古代)부터 4차례에 걸쳐 일본으로의 대규모 이동이 있었다고 한다.

▲ 마츠로관에 마련된 벼농사 체험장을 둘러보는 일행들

그 첫 번째가 기원전 3세기경 만주일대의 부여(夫餘)족과 한반도의 3한(三韓)중 진한(辰韓), 변한(弁韓)족이 일본으로 이주하였는데 당시 일본의 가라츠 지역은 마츠로국(末盧國)이, 남쪽에는 대우국(大隅國)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4세기 말 백제와 고구려의 전투에서 패전한 백제군과 주민들이 일본으로 유입되었으며 세 번째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삼국시대에 선진문명과 함께 이주한 백제인이 일본의 아스카(飛鳥)문화를 꽃피우는 주역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는 백제 말에 3,000 여 명 이상의 백제인이 대거 유입되어 일본의 율령국가(律令國家) 건설에 기여하게 된다.

하카다항에 도착한 일행은 간단하게 점심을 마치고 가라츠시내의 마츠로관(末盧館)을 방문하였다.

마츠로관은 농경문화가 시작된 곳으로 신석기· 청동기유물과 그리고 농경문화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유적지에 기념관을 세웠다.

이곳은 한반도에서 첫 번째로 이주한 이주민들이 정착한곳으로 추정되는데 그렇게 추정하고 거기에 이유를 달지 않는 이유는 출토된 유물이나 주거형태 등이 한반도에서 발견된 농경문화의 유물, 유적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혈통은 농경계열의 성향이 강하지만 문화는 북방의 여진과 말갈족의 유입으로 인하여 농경과 유목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 가당도 어린이들이 태극선과 태극기를 들고 답사팀인 박기영, 김동일 의원을 반기고 있다.

당시 주거형태를 복원한 움막안의 아버지의 얼굴에서 그리고 아버지를 꼭 빼닮은 딸의 미소에서 그 옛날 3한의 후예인 신라, 백제인의 모습을 보았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일본서기에는 나라가 시작되었다고 볼 정도의 3명의 천황에게 ‘神’자를 붙였는데 가공시조(架空始祖)인 신무천황(神武天皇), 구주왜(九州倭) 시조인 숭신천황(崇神天皇), 대화왜(大和倭) 시조인 응신천황(應神天皇) 3명이다.

나라의 체계를 갖춘 시기는 숭신천황 때로 보며 응신천황 때 비로소 진한계, 변한계 토착왜가 화합하고 나라가 안정되어 공존이 시작되었다.

어서오세요. 가카라시마(加唐島)에

공주를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공주를 찾는 가장 큰 이유를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답변은 아마 무령왕일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무령왕에 대하여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저 공주에 도읍했던 백제시대의 한 왕으로서 왕릉이 발견되었고 그 능 속에서 주인을 알 수 있는 지석(誌石)이 발굴되었다는 정도가 전부일 것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461년 4월 개로왕은 동생 곤지에게 임신한 부인(王妃, 武寧王의 母)을 주며 일본으로 건너가 천황을 섬기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 정영일 네트워크협의회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6월, 항해 중 산기(産氣)를 느껴 인근 가카라시마(加唐島)의 오비야우라동굴(‘허리띠’의 일본말은 ‘오비야’. 왕비가 허리띠를 풀고 아이를 낳은 동굴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에서 출산하였다. 이에 그 아이의 이름을 시마끼시(島君, 섬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시마)라 지었다. 후일 백제의 제25대 무령왕(재위, 501-523)이다.

당시 곤지에게는 이미 다섯 아들이 있었고 479년 둘째가 귀국하여 동성왕(東城王, 재위 479-501)에 즉위한다. 모두 일본서기에 기록된 내용들이다.

한국 학자들이 일본서기를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개로왕이 동생에게 임신한 부인을 하사했다느니 동성왕이나 무령왕이 일본에서 귀국하여 왕에 즉위했다는 등의 내용들이다.

그러나 일본에는 1천 년 이상 요직을 독점해온 가문이 있고 임신한 부인을 총신에게 하사하는 풍습이 있었던 점을 미루어 무령왕에 대한 출생이야기나 동성왕과 무령왕이 귀국하여 즉위하였다는 사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가라츠의 무령왕 생탄제추진위원회는 매년 6월 첫 번째 토요일에 무령왕의 탄생지인 가카라시마에서 생탄제를 개최한다.

정영일 회장과 김동일·박기영 시의원 그리고 최창석 교육장이 일행을 대표하여 헌화하고 예를 올렸다.

1500 여 년이 지난 지금에 무령왕의 탄생지를 찾아와 예를 갖추는 후손들을 바라보는 무령왕의 마음은 과연 어떠하였을까?

▲ 답사 일행들이 무령왕 탄생지인 오비야 동굴 앞에서 예를 올리고 있다.

 

생탄제를 마치고 한바탕 걸쭉한 사물놀이가 이어졌다.

꽹과리, 북, 장고, 징소리가 초여름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카라시마의 지축을 흔들어 놓았고 현지인들로 구성된 ‘아버지 Flavors’의 노바디가 가라츠시 하늘에 메아리쳐 울려 퍼졌다.

무령왕의 호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고 일행의 어깨춤은 한동안 이어졌다.

무령왕 별로 부활

생탄제의 2부 행사로 소행성 ‘무령왕 명명식(命名式)’이 거행되었다. 웅진시대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던 무령왕이 우주속의 별로 재탄생하는 가슴 떨리는 행사였다.

▲ 윤용혁 교수가 공주시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다.

 공주와 가라츠에서 동시에 화상을 통한 명명식 장면이 중계되고 축하의 메시지를 교환하였다. 지난 10여 년간의 민간교류가 결실을 맺고 무령왕 생탄축제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윤용혁 교수는 “무령왕이란 이름으로 명명식을 갖은 소행성은 사이타마 현(奇玉縣)에 거주하는 아마추어 천문가 사토 나오토(佐藤直人)씨가 같은 현의 지치부(秩父)시 교외에 있는 자신의 천체 관측소에서 발견했다”고 전하면서 “무령왕이 별 이름으로 명명돼 이제 세계적으로도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공주의 역사적으로도 큰 의미 있는 일”이라고 평했다.

무령왕이라 명명하는데는 일본 가라츠 시내의 어린이들이 응모한 이름 중에서 선정되었고 그 내용이 요미우신문과 마이니찌신문 등 일본의 주요일간지에 소개되어 그 의미를 더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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