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고도육성아카데미 일본 답사기

제5기 공주고도육성아카데미 일본답사가 2012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4박 5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 비조사 입구에서

이번 답사 목적은 공주고도육성아카데미 수료생의 현장 체험학습으로 일본 오사카, 나라, 교토, 카나자와의 역사 문화도시 조성사례를 답사하여 외국의 역사 문화적 자원의 활용과 보호전략 등을 벤치마킹하고 공주시의 고도육성정책에 일조하기 위해서이다.

바쁘게 짜여 진 일정을 보면서 과연 무엇을 보고 배워 올 것인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지만 여행의 짜릿한 맛을 기대하는 설렘도 있었다.

아스카베 신사와 관음총 고분(觀音塚古墳)

오사카부 하비키노시에 위치한 비조호 신사는 시골에 있었다. 좁은 찻길을 내려 포도밭으로 둘러싸인 시골길을 따라 한참 걸어가다 보면 비조호신사(飛鳥戶神社)라고 쓴 화강암 비석이 보는데 신사의 입구를 알리는 도리이(鳥居.torii)도 없다.

이곳이 백제 개로왕·문주왕의 동생이며 비유왕(毗有王)의 아들인 곤지왕을 제신(祭神)으로 모시는 신사이다. 곤지를 제신으로 모시고 있지만 신사의 규모가 아주 작고 초라하다. 신사 바로 옆까지 포도밭이 잠식해 있고 신사를 모시는 사람도 제관도 보이지 않는다. 

비조호 신사에서 200m 정도를 걸어가면 백제계 횡혈식석실분 관음총고분이 나온다. 7세기 초인 백제말기에 축조된 무덤으로 주변에 백제계 횡혈식 무덤이 죽 늘어져 있으나 개방된 것은 관음총고분 하나뿐이다.

이 무덤은 백제 곤지왕계의 도래인(백제의 이주민)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한다. 관음총고분은 귀중한 문화제로 나라의 지정사적으로 되어 있으나 관리가 허술한 것 같다. 비조호신사 일대는 곤지왕계의 백제인들이 많이 활동했을 것이고, 일본의 역사는 백제를 빼고서는 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 오사카부 백제왕 신사

백제왕신사(百濟王紳士)와 백제사터(百濟寺跡)

오사카부 히라카타(枚方)시 나시노초 나카노미야(西之町 中宮)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 백제왕신사는 8세기 중엽 일본의 통치자 쇼무천왕의 칙명에 의하여 건립되었고 그 후 칸무천왕도 이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천황이 백제왕신사를 세운 이유는 의자왕의 후손 백제왕자 경복(敬福)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경복은 당시 용오국 국수(군수급) 벼슬을 하면서 금광을 개발 성공하였고 동대사 불상주조에 필요한 황금을 기부한 인물로 천황은 그의 본거지에 신사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천황과 인연이 있는 백제왕신사에서는 지금까지 매년 한차례 궁중아악을 연주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백제멸망과 함께 일본에 건너간 백제인들은 난파(難波, 나니와)지역에 살다가 이곳으로 옮겨와 살며 번창을 누렸으며 의자왕의 후손 경복은 쇼무천황(724~749 재위) 대부터 역대왕의 총애를 받았던 명재상으로 외위대장(外衛大將), 어후기병장군(御後騎兵將軍) 등 왕실 최고 장군으로서 무공도 컸으며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백제사는 백제가 멸망한 후 일본으로 건너온 의자왕의 후손 경복(敬福)에 의하여 750년경 건립되었다고 한다. 일본으로 망명 온 백제계 왕족은 690년대 일본의 아스카시대 41대 지도(持統)천황으로부터 구다라노고니시기(百濟王)라는 성씨(姓氏)로 사성(賜姓)되어 의자왕의 아들 선광(善廣, 禪廣)을 시조로 하는 일본 씨후의 하나로 되었다고 한다.

이 후 쇼무천황(聖武天皇)의 칙명에 의하여 백제왕씨족의 조상과 경복의 숙부인 백제왕 남전(南典)을 제사지내도록 백제사와 백제왕신사가 창건되었다고 한다.

백제사는 소실되고 현재 초석만 남아 있다. 가람방식은 우리나라 신라시대 감은사지와 같은 것으로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교류를 짐작케 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지금은 백제사적공원으로 정비되고 있고 ‘백제사적의 송풍’이라고 하여 히라카타 8경의 하나로 선정되어 있다.

▲ 평성궁터를 지나는 전철

평성궁터(平城宮跡)

평성궁은 나라의 고도(古都) 헤이죠코(平城京)의 헤이안시대 대궐구역이다. 710(和銅 2년)년에 도읍이 아스카(飛鳥)와 가까운 후지와라쿄오(蕂原京)에서 헤이죠쿄로 옮겨졌고 여기서 율령정치를 선포하고 75년간 화려한 귀족문화를 꽃피웠다.

평성궁터는 1998년 고도 나라의 문화재로서 도다이지(東大寺) 등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2001년부터 2010년까지 9년에 걸쳐 복원 완성되었다.

특이한 것은 주작문을 지나자 궁성 터의 한쪽을 가로지르는 전철노선이 놓여 있고 오사카와 나라시를 잇는 전철이 2~3분마다 한번 씩 왕래하고 있다. 유적지에 전철이 지나다니는데 어떻게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는지 의문이 간다.

정재윤 교수님은 “내가 문화재평가위원이라면 궁성에 전철이 지나다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세계문화유산 지정을 취소하겠다. 공주 고마나루 가까이에 공주보가 만들어져 있는데 평가단에 의해 안 좋은 평가를 받을 수가 있다”며 문화재 관리보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고분벽화 여자군상

나라마치(奈良まち)보존지구

이곳은 19세기 전통가옥을 보전·복원하여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곳이다. 에도시대에 들어서 원흥사 경내에 붓, 먹, 모기장, 이부자리, 술, 간장, 칼 등 여러 산업이 발달하여 상업도시로서 거리가 형성되었고, 현재는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시대 상가 모습이 남아있으며 1990년 나라마치 도시경관형성지구로 지정된 바 있다.

일행들은 사진을 많이 찍었다. 이곳에서 하루쯤 쉬었다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감이 가는 집 이었다.

담당교수님은 “처음에는 사람이 많이 들렸겠지만 나중에 찾지 않아 가게주인이 나가지도 못하고 유지하기 곤란해진다. 우리 공주도 고민해야한다. 시민의 세금으로 고도육성이 이루어지는데 시민들의 활용도가 높은 것을 만들어야지 투자만 이루어지고 빼지 못하면 애물단지가 된다. 시민들이 나서서 공주 고도를 만들어가야 하고 그때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 고 앞날을 걱정하며 이곳의 전체적인 디자인, 문양 등을 유심히 보도록 강조했다.

우리는 에도시대 전통가옥을 복원하여 문화상품으로 개발한 사례를 벤치마킹하여 공주고도육성에 어떻게 접목시킬지 고민을 했다.

▲ 석무대 고분 현실입구

석무대고분(石舞台古墳, 이시부타이고분)

일본을 대표하는 대형 횡혈식석실분으로 75톤이 넘는 거대한 화강암 30여개로 석실이 구성되어 있다. 현실은 횡혈식으로 길이가 7.7m, 폭 3.6m, 높이는 4.7m가 넘는다. 이처럼 웅장한 크기에 비해 부장품은 발견되지 않아 피장자의 신분은 물론 축조연대 조차 정확히 알 수가 없으나 6세기 강력한 귀족이었던 소아마자(蘇我馬子)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아(蘇我)씨가 정치적 일선에 등장하는 것은 소아만지(蘇我滿智)라는 인물로 이중천황(履中天皇) 2년(401년) 국사(國事)를 집행하였고 소아만지라는 인물은 475년 당시 백제 문주왕과 같이 남행(南行)한 목협만치(木脅滿致)가 왜로 건너간 이후 소아만지로 불리어졌다고 한다.
소아씨는 야마토 정권에서 약 100년간 세력을 떨친 백제계 가문이었다. 일본속의 백제문화를 이해하는데 핵심적인 가계로 소아씨를 빼 놓을 수 없으며 이 점에서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는 석무대고분을 소아마자로 추정하는 것은 당시 거대한 소아씨의 위력을 상징하는 조형물이라는 점을 역설적으로 말해준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가 답사하는 곳은 대부분 백제의 영향을 받거나 백제인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는 곳으로 새로운 감회를 느낄 수가 있다. 이시부타이고분 주변에는 벚나무가 울창하다. 이른 봄 벚꽃이 피면 장관이리라!

아스카(明日香) 보존지구와 아스카보호재단

이와이도장은 연수숙박시설이다. 아스카무라(明日香村)는 약 1400년 전 100년간 일본의 수도였으며 법률을 지닌 첫 고대국가로 확립하였다. 미무라합병이라 하여 1956년(쇼와 31년) 7월에 아스카 촌의 3개 마을이 합쳐져 오늘날 아스카무라가 탄생하였다.

아스카보호재단은 아스카보존을 민간의 입장에서 추진하기 위해 1971년 국토건설부에서 설립하였으며 아스카무라의 신사, 절 등의 역사적 문화유적과 문화경관을 보호하는 것이 가장 큰 역할이다. 운영기금은 국가(5억엔), 기업 및 경제인의 기부금(5억엔)으로 총 10억엔을 가지고 운용하고 있다.

일행들은 민간단체로 운영되는 아스카보호재단에 대해 많은 관심을 보였고 사무국장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주민들의 반대는 없는지?’ ‘운영기금은 제대로 조성되며 운영은 잘되고 있는지?’ ‘관광객은 많이 찾아오는지?’  등 궁금한 사항을 던지는 것을 보고 5기 고도아카데미 수료생들의 공주고도보존에 관한 높은 관심도를 엿볼 수가 있었다.

▲ 석무대고분의 석총에서

비조사(飛鳥寺, 아스카데라)

나라현 타카히치군 아스카무라에 위치하고 있는 비조사(飛鳥寺)는 588년 창건된 일본 최초의 사찰이며 개창 당시 명칭은 법흥사(法興寺)였다. 비조사에는 백제인의 후손인 소가씨의 흥망이 얽힌 사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한반도 도래인들은 솟대를 세우고 하늘을 나는 새, 비조(飛鳥)라고 불렀다고 한다.

아스카시대의 정치가인 소아마자(蘇我馬子, 소가노우마코)가 지은 사찰로 백제의 건축기술로 지어졌으며 백제문화 양식을 보이고 있고 발굴 당시 백제기와도 출토되었다.

소아마자는 백제계 도래인의 후손으로 목합만치(소아만치)의 증손자라고도 주장하고 있으며 이시부타이(石舞台)고분과 아스카데라(飛鳥寺)는 소아마자와 관련된 유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아스카사 뒤편에는 수총(首塚)이 있는데 소가이루카(소아마자의 자손)의 머리가 묻혔다는 자리에 세운 석탑이다.

다카마쓰즈카 고분(高松塚 古墳)

비조사를 떠나면서 빡빡한 일정에 모두들 힘들어 하는 모습이 보인다.

버스에서 내려 다카마쓰즈카 고분을 찾는 데는 좀 걸어야 했다. 공주 무령왕릉 크기보다 좀 작은 다카마쓰즈카 고분 옆에 만들어 놓은 벽화관(모형관)에 들어갔다. 입장료가 대인 250엔이다.

다카마쓰즈카 고분은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에 조성된 고분으로 1972년 3월 조사에 의해 발굴되었다. 석실 내부는 길이 265㎝, 너비 103.4㎝, 높이 113.5㎝로 천정부에는 성숙도(星宿圖, 별자리), 서벽(西壁)에는 달과 백호, 남자군상, 동벽에는 해와 청룡, 여자군상, 남자군상, 북벽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는데 남녀군상 모두 고구려 사람들 모습이다.

이 벽화를 그린 화가는 고구려인 황문본실(黃文本實)이라는 것이 이미 밝혀졌다는데 일본학자들은 고구려인이 그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이 고분에서 거울, 유리구슬, 원형쇠장식 등 부장품이 출토되었으며 현재까지 일본에서 확인된 벽화고분은 다카마쓰즈카고분과 기토라고분 뿐이란다.

정재윤 교수님은 “ 고분 천정부의 별자리는 북위38도 위치에서 바라본 것으로 일본에서는 맞지 않고 고구려 땅에서 본 별자리이기 때문에 이 벽화는 고구려인에 의해 그려졌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하신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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