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산성시장의 원조는 어디일까?

요즘 길을 지나가다 보면 원조 바지락 칼국수, 원조 춘천 닭갈비, 원조 천안 호두과자 등 원조라는 단어가 붙어 있는 간판들을 흔히 보게 된다.

원조((元祖)라는 뜻을 찾아보면 “어떤 일을 처음으로 시작한 사람”으로 나온다. 말 그대로 원조라는 뜻은 그 분야에서 제일 먼저 아이디어를 내고 개발하여 그 집만의 독특한 맛과 멋과 향을 간직하고 있어 대중들이 즐겨 찾는 즉 성공한 집을 말한다.

이와 같이 원조가 붙은 집은 다른 집과는 차별화 된 그 집만의 향이 있기에 그 맛과 멋을 음미하고 느껴보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우리 식당은 파리만 날리는데 원조가 붙은 집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진풍경을 보면서 이웃집에서도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앞 다투어 원조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원조가 붙은 간판이 많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을 해 본다.

그러면 공주 산성시장의 원조는 어디일까?

공주는 감영 도시로서의 이점 이외에 금강 수계와 사통발달의 도로망 덕택에 개항 이전부터 강경, 논산, 예산, 둔포 등과 함께 독자적인 ‘상품 유통권’을 가진 상업 중심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19세기의 경제사정을 보여주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따르면 공주는 모시, 담배, 면화 등을 중심으로 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해 일찍부터 외지인들이 몰려들어 꽤나 번성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옛날에는 어디에서 장이 열렸을까? 옛 공주시장은 대통교에서 우체국까지 봉황산 쪽 제민천변에 시장이 형성돼 있었고, 우체국부터 금강까지는 홍수 시에 물이 자주 드는 상습침수지역 즉 ‘미나리꽝’이었다고 한다. 그 후 1918년 공주시가지 정비계획에 의해 대통교를 중심으로 형성돼 있던 정기시장은 작은 사거리에서 큰 사거리에 이루는 제민천변으로 밀려나게 되었으며, 이때 공주 갑부 김갑순의 투자로 ‘미나리꽝’이 매립되면서 200여개에 달하는 점포가 들어서고 상권이 형성되었으며, 드디어 1937년에 1일과 6일에 열리는 정기 시장인 산성시장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공주시지, 2002 참조)

공주 시장의 변천사를 살펴보면 현재 산성시장은 1918년 공주시가지 정비계획에 의하여 ‘미나리꽝’이 매립되면서 형성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 이전에는 현재 오거리에서 장이 서고 있는 대통교 주변 제민천변이 공주시장의 원조였음을 알 수 있다.

주차시설이 잘 갖추어진 대형마트에 가면 원스톱으로 필요한 물건을 한 번에 구입할 수가 있는데 구태여 재래시장을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

국내 스마트폰 가입자가 3,000만 명이 넘어섰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다.  2009년 11월에 KT가 아이폰을 처음 도입하면서 스마트폰 시장이 열렸고, 3,000만 명을 돌파하기까지 3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3,000만 명은 국민 10명중 6명이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세상을 앞만 보고 달려가다 보면 몸과 마음은 지치고 멍들게 마련이고 이를 치유할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필요한 것이다.

현재의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삶을 뒤돌아 볼 수 있는 곳, 즉 심신을 치유할 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중 한 방법은 우리의 전통이 살아 있는 재래시장을 찾아가 우리 서민들이 살아가는 삶의 향기와 온정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 방법일 것이다.     

아직까지도 우리 고유의 장터 맛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 바로 공주시장의 원조인 오거리장이 아닐까 생각을 해 본다.

오거리장에는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우리의 입맛에 맞는 제철 식재료들인 호박잎, 비듬나물, 늙은 오이, 열무김치, 가지, 파, 마늘 등을 흥정을 하면서 저렴한 가격에 구입할 수 있으며, 또한 서로 등을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않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이웃 간 안부를 물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장사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오거리장인 것이다.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에 나오는 목적은 농산물을 직접 판매하여 자식들 학비도 마련하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듣고 친구도 만나며,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이 것 외에 또 다른 목적은 첩첩산중 산골에서 시부모 부양과 농사일을 하면서 싸였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목적도 있었던 것이다.

이곳에서 장사를 하는 할머니들의 경력을 보면 보통 30년 이상이다. 강산이 세 번을 변했을 긴 세월을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말 못할 사연들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까?.

장사를 마치고 집에 가기위해 중국집 앞을 지나가다보면 자장면을 한 그릇 먹고 싶어도 자식들 생각에 사 먹지를 못하고 집에 가서 보리밥으로 허기를 채우던 어렵던 시절... 이제는 자식들이 냉장고에 고기며 과일을 가득 채워놔도 입에서 받지를 않아 먹지를 못한다고 한다.   

넷째아들이 8년 만에 손자를 봤다며 장에 나온 할머니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서 하나씩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인정이 남아 있음을 볼 수 있었으며 나의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이 끝날 즈음에는 막걸리 판이 벌어지고 장터는 더욱 시끌벅적 해진다.

이와 같이 우리의 살아가는 이야기와 풋풋한 정이 있는 곳이 바로 재래시장인 것이다. 할머니 다음 장날에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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