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국 욕심낸 여진족, 몽골족, 왜구들

신라에 이어 고려가 건국되자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에 속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11세기 동북 여진족의 침입을 받으면서 폐허의 섬이 되어가고 말았다. 또한 고려는 거란과의 전쟁을 치르면서 심지어 우산국을 재건하려고도 하였으나 과거의 번영을 회복하지도 못하고 말았다.

▲ [「고려사」권 4 현종 9년 11월 병인조(條)-1018년]<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입을 받아 농업을 폐하게 되다. 이원구가 파견하여 농기구를 하사하다.>

이 기간에 중요 사실(史實)들을 문헌자료와 특히 독도박물관의「아름다운 섬, 독도 그리고 울릉도」에서 찾아 다음과 같이 정리·기록한다.

백성을 보호하고 당시 피난 수도였던 강화도에서 진행되었던 강화경판 고려대장경(팔만대장경)의 판각을 위한 재목을 조달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 [「박경래 독도의 사·법적인 연구」1965년 간]

1243년(고려 고종 30년)
대몽항쟁 중 崔怡(최이)에 의하여 울릉도로 주민을 이주시켰음. 후에는 익사자가 많아 이주정책이 중지됨.
1273년(고려 원종 14년)
원(元)이 이추(李樞)를 파견하여 대목(大木)을 요구하였으므로 2월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허공(許珙)을 울릉도 작목사(斫木使)로 임명해 함께 가게함. 벌목은 고려의 요청에 의하여 곧 중지됨.
1379년(고려 우왕 5년)
7월, 왜(倭)가 무릉도(武陵島)에 들어와 보름동안 머물다가 감.

▲ [일제(一帝)가 동양 3국 러시아, 중국(대만), 한국의 섬들을 자기의 것이라 주장함.]

그리고는 곧 조선 건국으로 이어지면서 계속되는 왜구의 출몰을 근절시키며 고을의 수를 줄여나가는 과정에서 울릉도와 독도는 주민의 거주를 금하는 ‘해금정책’하에 놓이게 된다. ‘해금정책’이란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적극적인 바닷길 통제정책으로 울릉도와 독도의 지역에만 설치된 것이 아니라 육지와 멀리 떨어진 남해안의 여러 섬에도 광범위하게 이행되기에 이르렀다. 다시금 이 시기의 중요 시설들을 간단히 소개한다.

▲ [「독도 우표」1945년 간]<일본은 이 우표가 붙은 한국 우편물의 배달을 거부하였었다.>

1403년(조선 태종 3년)
8월, 강릉도(江陵道), 무릉도(武陵島) 주민들을 나오게 함.
1407년(조선 태종 7년)
3월, 대마도(對馬島) 수호(守護) 종정무(宗貞茂)가 잡혀간 사람들을 송환하며 토물(土物)을 바치면서 무릉도로 옮겨 살기를 청하였으나 거절함.
1417년(조선 태종 17년)
8월, 왜(倭)가 우산 무릉(于山 武陵)을 노략질함.

▲ [일제시대 주민의 재판광경(일제의 강제재판)]

마무리로 들어가자.
이제껏 살펴봤듯이 독도란 울릉도에 딸려 있는 아주 작은 섬으로 두 섬 간에 바다로 조금만 나가면 서로 바라볼 수가 있을 정도이다. 두 섬은 하나의 생활권으로 옛날 우산국 사람들의 땅이었음은 물론이다. 우산국이 신라에 복속된 후 독도는 울릉도의 일부로서 겨레의 정든 영토이었다.
끝으로 지난 1997년 울릉도에 세운 독도박물관의 첫 관장이었던 고 ‘이종학’선생과 2005년 독도에서 춤마당을 벌인바 있는 ‘이애주’ 교수 두 분의 소개로 마무리를 할까한다.

▲ [초대관장 고 이종학]<개관식(1997)에 쓰인「팜플릿」표지>

독도박물관을 세우는데 앞장선 이종학(1927. 10. 1~2002. 11. 23)선생은 평생을 고문헌과 역사자료를 모으는데 심신을 다하신 분이다. 서울 종로에 있는 천도교 대강당 울안에 있는 수문회관에 사설 연구소를 두고 특히 울릉·독도자료를 모으기 위하여 일본에 오가기를 수 없이 했다. 1997년 8월이다. 울릉도에 세운 독도박물관에 필자도 초청을 받아 그때 선물로 받았던 개관 ‘팜플릿’이 지금도 있어 ‘개관사’의 일부를 여기에 옮긴다.

「자료수집 차 30여 년 전 부터 일본 등을 50여 차례 내왕하면서 지도, 신문, 잡지, 관보, 문헌 등 532점을 독도박물관에 기증하였다. 이제 모든 자료는 이미 저의 손을 떠났습니다. 바로 이 순간부터는 독도박물관은 국민 모두의 것이며 우리는 한 마음으로 독도를 지키는데 너와 내가 따로 없고 남과 북이 따로 있을 수 없음을 깨우치는 독도수호의 전진기지로서 또한 국민교육의 장으로서 그 소임을 다할 것입니다.」

▲ [이애주 ‘독도의 춤’ 사진/이은주]

또 한 사람, 지난 2005년 ‘독도문화심기본부’가 주최한「역사와 의식, 독도진경전」이 있었는데 그때에 이애주(서울대 교수,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예능보유자)선생의 독도에서의 ‘한춤마당’이 있었다. ‘해돋이 춤’, ‘터벌림 춤’ 등 ‘독도의 춤’은 영원히 살아 독도의 언덕 위에서 숨 쉬게 될 것이다.
(다음 옛 ‘우산국’을 찾아서(5)는 「서양 사람들의 ‘울릉도’ ‘독도’의 발견」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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