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중국집 “부흥루가 돌아왔어요”

공주시 구도심 가구점 골목에 들어서면 1960년대 공주의 정겨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간판이 보인다.

▲ 사진좌로부터 둘째딸 정수란, 어머니 정이연 여사, 첫째딸 정수연, 막내딸 정연진(2012년 9월 24일)

復興樓!

졸업식 날에 엄마가 사주신 짜장 한 그릇이면 행복했던 시절, 부흥루는 우리들에게 아니 공주사람들이 모두 기억하는 추억의 장소다.

이곳에서 맞선을 보았던 처녀는 지금 두 아이의 학부형이 되었고 이곳에서 은사님을 모시고 사은회도 했고 또 동창회도 이곳에서 모였었다. 그런 특별한 날에는 좀 더 럭셔리한 메뉴(고작해야 탕수육이지만)를 시키면서 행복에 젖었던 추억의 중국식당이었다.

중국음식 자장면 집 復興樓(부흥루)!

한동안 보이지 않던 간판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정겨운 ‘復興樓’ 간판이 가구점 골목에 보이더니 환하게 불을 켜고 장사를 시작하고 있다. 이게 얼마만인가?

도시개발로 인해 요즘은 모두 신관동 강북 쪽으로 상권이 몰리고 있는데 이곳 강남 구도심 가구점 골목에 공주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하고 있다. 가구점 골목이 생기를 되찾아 가고 있다.

정이연 여사, 황해도 송림에서 공주로

부흥루의 안주인 정이연(85)여사가 남편 정춘양(1975년 작고)씨를 따라 이북 황해도 송림(松林)시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6·25때. 큰 딸 정수연(65)이 3살, 둘째딸 정수란(63)이 4개월 되던 해였다.

피난민 틈에 끼어 기차 지붕에 타고 서울 종로(중국대사관)에 도착, 학교 안에서 피난민들과 20일 동안 생활했다. 원래는 부산으로 갈 작정이었는데 영등포 사람 한씨가 “공주는 교육도시고 기찻길은 없지만 좋은 곳”이라면서 동행하게 된 것이 공주 정착의 계기가 됐다.

▲ 사진좌로부터 둘째아들 정권, 셋째 딸 정연진, 정이연 여사, 큰딸 정수연, 정춘양 사장, 큰아들 정걸, 막내아들 정위, 둘째딸 정수란(1968년 설날 1월 3일)

당시 모두가 궁핍했던 터라 정 여사는 금 3돈짜리 약혼반지로 박광래씨 부인에게 돈 2만원을 빌려 가족이 기거할 방 1칸을 얻어 살았다.

생활력이 강했던 정여사(당시 23살)는 중국 할머니에게서 배운 꽈배기 만드는 기술로 밀가루 1가마니와 기름 1통을 사서 하고개까지 아이(둘째 정수란)를 업고 다니며 장사를 했다. 솜씨가 좋은데다 남들보다 더 얹어주니 장사가 꽤 잘됐다.

‘장흥원(長興園)’에서 ‘복산춘(福山春)’으로
가구점 골목은  공주의 명동거리

이 후 공주 온지 3년 만에 한흥여객(구 명구의원 자리) 주차장에서 요리 장사를 시작했다. 처음 간판은 ‘장흥원(長興園)’. 이것이 부흥루의 시작이었다.

차부 단골손님도 늘고 다리 아픈 줄도 모르게 하루 몇 번이나 배달을 다녀도 돈벌이가 잘돼 힘든 줄도 몰랐다. 그러나 장사 4년 만에 큰 화재(10월 16일, 정 여사는 정확한 년도는 기억을 못해도 화재 난 날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로 모든 것이 재로 변해 빈털터리가 됐을 때의 암담함...

어린 자식을 쳐다보며 남편과 서로 위로하면서 재기에 나섰다. 상호는 ‘복산춘(福山春)’으로 내걸고. 당시 양장피, 난자완스, 물만두 등이 인기가 있었고 자장면은 150원(현재는 4500원)이었다. 그러나 개업 1년 만에 가게는 문을 닫게 됐다.

▲ 셋째딸 정연진(1976년)

당시 기관장 등 공무원들은 먼저 먹고 계산은 나중에 하는 ‘외상손님’이 많았던 것. 심기일전 ‘악양루’ 간판을 걸고 하던 장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라는 뜻의 ‘부흥루’라 지으면서 재기의 발판을 다져갔다.

이때 공주의 유지들은 다 다녀갈 정도로 부흥루는 ‘고급음식점’으로 자리 잡았다. 당시 공주대학교 교수님들은 물론이고 대학생들도 이 집의 자장면을 먹으며 연애를 하곤 했었다.

부흥루가 있는 가구점 골목은 공주의 명동이었다. 그 사이 정춘양씨와 정이연 여사는 두 딸 외에 큰 아들 정 걸, 둘째 아들 정 권, 셋째 딸 정연진, 막내아들 정 위 등을 낳아 3남 3녀를 두게 된다. 

주차장 없어 발길 뜸해져

세상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부터. 자가용을 소유하기 시작하면서 부흥루의 좁은 골목은 하나둘 사람들의 발걸음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1992년 부흥루는 문을 닫고 둘째 아들 정 권이 금성동에 ‘북경’을 개업, 2004년에 다시 가게를 접었다.

▲ 1994년 부흥루 앞에서의 정이연 여사

당뇨와 고혈압 등 지병으로 16년간 고생하던 남편 정춘양씨가 1975년 세상을 떠나고 장사도 힘들게 되자 가족들은 미국으로 이주를 하게 된다. 미국서 큰 식당을 경영하기도 했지만 무엇인가 항상 마음 한켠에 남아있는 것이 있었다. 공주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정 여사 가족에게 공주는 바로 고향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한번은 미국에서 공주사람을 만났는데 둘째 딸 정수란씨를 보고 “부흥루 딸 아니냐?”고 반기면서 “요즘은 공주에서 먹을 곳이 없다. 손님 대접할 만한 곳이 없다”면서 부흥루가 문을 닫은 것을 몹시 아쉬워하더라는 것. 

이후 정 여사 가족은 가족회의를 한 뒤 공주에 재입성하게 된다. 이때가 2012년 3월. 부흥루의 진정한 부흥이 시작된 것이다. 

정수란 현 사장은 말한다.

“인생은 60부터라는데 국적은 중국이지만 우리 가족 고향은 공주다. 앞으로 공주에 뼈를 묻을 각오로 다시 오게 됐다”며 “돈을 벌 목적보다는 봉사정신으로 살겠다”며 앞으로의 계획을 밝힌다. 

부흥루가 문을 다시 열자 옛날을 그리워하며 오는 손님이 줄을 잇고 있다. 부흥루의 옛날 그 자장면의 맛을 못 잊어서 또 추억을 찾아서...

▲ 어머니 정이연 여사

어떤 사람은 “미국에서 편하게 살지 뭐 하러 와서 고생하느냐?”라는 사람도 있지만 단골손님들이 반가워하는 것에 보람을 느낀다는 정수란 사장.

정수란 사장이 장사를 하면서 반드시 지키는 원칙이 있다. 첫째 신선한 재료를 쓸 것, 둘째 음식 양을 많이 담아 손님들이 배부르게 할 것이다. 생전 아버지(정춘양씨)께서 “손님에게 배부르게 먹이지 않으려면 음식장사 하지마라”고 하셨다고. 이 원칙은 오늘까지 꼭 지켜가고 있는데 이것이 부흥루의 ‘부흥’의 원천일 것이다.

정수란 사장은 “삶의 중요함은 돈이 아니라 명예와 사랑”이라고 말한다.

자! 오늘 점심은 부흥루의 사랑과 추억의 자장면을 먹으러 가 볼까나...

예약 전화 041)858-8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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