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 동해의 지킴이 ‘안용복 장군’

조선 숙종(1675~1720)시대의 기록들

지금도 일본은 울릉도에 부속되어 있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면서 저희나라 영토임을 주장하며 별짓을 다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 년 전인 숙종시대에는 울릉도까지 송두리째 삼키기 위하여 이 섬도 역시 ‘다케시마’라며 외교권을 전개했었다.

이러한 억지를 당당히 극복하고 오늘의 승리를 이끈 것은 국록을 먹고 있는 정부의 관리가 아니라 한 순박한 어부에 지나지 않는 안용복(安龍福)이란 서민이었다.

▲ 부산광역시 수영구 ‘우영공원’에 위치한 안용복 장군 사당 ‘수강사(守疆祠)’ -‘수영야류’ 예능보유자 태덕수 선생 제공-

그는 경상도 동해 사람이었다. 수영의 수군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왜관’에 출입하면서 일본어에도 능숙하였다. 숙종 계유년(1693)여름 폭풍에 표류하며 울릉도에 도착하니 일본 선박 일곱 척이 먼저 정박하고 있었다.

안용복은 이를 분하게 여겨 쫓아내려 하니 오히려 그 놈들이 화를 내며 대들지를 않는가. 오히려 안용복을 붙잡아 저희 나라로 가 오랑도(五浪島)란 섬에 구금하고 말았다.

이에 안용복은 도주(島主)에게 말하기를 “울릉도와 우산도(독도)가 본디 조선의 소속이었다는 것은 고대로부터 이미 분명한 것이 아닌가! 지형으로 논하더라도 조선은 하룻길 정도로 가깝고 너희 나라 일본은 5일 길이나 멀리 떨어져 있으니 우리 조선의 땅임이 분명하도다.

조선 사람이 조선 땅에 갔거늘 어찌 구금을 하는가?”하니 도주는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를 호오키주로 보냈다.

‘호오키주’의 도주는 손님을 예절로 대하면서 양곡을 넉넉히 주니 안용복은 이를 사양하며 말하기를

▲ 「수강사」에 모셔 있는 ‘안용복 장군’ 동상 -태덕수 선생 제공-

「원컨대 일본은 다시금 울릉도 일로 시끄럽게 하지를 말고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여야 할 것이요. 양곡과 돈을 받은 것은 나의 뜻이 아니외다.」하자 도주는 이를 허락하고 ‘에도부’에 뜻을 전달하고 오히려 문서를 만들어 주었는데 그 내용인 즉 울릉도는 일본의 소유가 아님을 확인·기록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안용복을 조선으로 송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출발하여 ‘나가사키’에 도착하니 도주는 ‘대마도’와 짜고 그 문서를 빼앗아 ‘대마도’로 보내고 말았다.

‘대마도’ 도주는 그를 가두어 두고 이 사실을 ‘에도막부’에 보고하니 ‘에도막부’에서는 다시 문서를 만들어 보내면서 두 섬에 침범하지 못하게 하고 안용복을 조선으로 호송토록 하였으나 도주는 듣지를 않고 다시 문서를 빼앗고 50일간이나 가두어 두었다가 동래 왜관에 압송하고는 다시 그곳에서 40일 동안 억류한 뒤에 송치를 한다.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고약한 짓이었다.

▲ 「안용복 장군 충혼비」-이승진 선생 제공-

당당한 안용복 장군의 당당하고 바른 길

안용복 장군은 이 모든 사실들을 상부에 호소하였으나 동래부사는 조정에 보고하지도 않고 도리어 국경을 오갔다하여 형벌을 주어 옥에 가두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때 왜관은 울릉도의 일을 트집 잡아 불화의 단서를 일으키려고 공갈이 심했는데 부사는 끝내 이것이 대마도의 속임수인 줄을 알지 못했다.

안용복은 엉뚱하게도 갇혀 있다가 뒤늦게 석방이 되었으니 그때는 2년이 지난 을해년(1694)이었다. 석방된 안용복은 그 뒤에도 수차례 일본인들의 침략을 방어하며 아국의 뱃사람들을 모아 강한 방어망을 세웠으니 한·일간의 불화를 바로 세우는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 이 글은 안용복 장군의 국토수호의 빛나는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 박정희 대통령이 1967년 1월 18일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비’에 받친 것임.

그런데도 한때는 경상도 관찰사가 조정에 장계를 올려 안용복을 서울까지 압송하여「국경을 넘어 끝내 불화만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사형에 처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

다행히도 영돈영(領敦寧) 윤지완(尹趾完), 영중추부사 남구만(南九萬) 등의 의견에 의하여 사형은 감하면서 귀양을 보내기로 했었다.

당시의 조정은 눈앞의 일에 대하여 엉뚱한 논쟁만을 계속함으로써 국토의 일을 등한시 했으므로 안용복 장군의 특출한 공로는 알지도 못했었다. 오히려 형벌을 내리고 귀양을 보냈으니 이 어찌 분개함을 금할 수 있으랴.

「...문헌비고를 편찬할 때 이러한 사실들을 여러 사람에게 말하니 여러 사람들이 매우 칭찬하여 ‘문헌비고’ 가운데 자세히 기록하니 옛 일을 고증하는 자료로 삼을 수가 있었구나!」

안용복 장군의 공적이 수 백 년을 지나 지금에 이르러 비로소 들어난 것이로다. 그런데 이와 같은 호걸 안용복과 같은 장군이 또 얼마나 있었을까?

아아 슬프기만 하도다.
안용복 장군이시어 만세 만만세!

▲ ‘울릉도 개척사’ 비석 -독도박물관 제공-

이상의 글은 ‘참고문헌’ 모두를 샅샅이 뒤졌으며 특히 ‘장지연’「일사유사(逸士遺事)」를 중심으로 삼았다.

[참고문헌]
1. 이익(李瀷) 호 星湖, 실학파 거장, 숙종 8년(1682생) 안용복「星湖傳說」2. 장지연(張志淵) 구한말 황성신문 주필, 실학파 거장, 안용복「逸士遺事」
3. 신석호(申奭鎬) 전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東海의 哨兵 安龍福」 1965년 박우사 刊 人物韓國史Ⅳ
4. 한찬석(韓贊奭) 국방부 전사관, ‘독도의 비밀 역사 安龍福 ?傳’(동아일보 1963년 2월 17일~20일자 연재)
5. 김화진(金和鎭) 「동래부사의 야욕과 애국자 안용복」(1965년 동국문화사 刊 五百年 奇譚逸話)
6. 오인택 「부산을 빛낸 안용복」(부산교육대 교수)
7. 안용복 장군 기념사업회 「수강사지」(2004년 안용복 기념사업회 刊)
8. 김태주 「대조선인 안용복」(1!2편 장편소설 2005년 늘푸른소나무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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