民之饑, 以其上食稅之多, 是以饑, 民之難治, 以其上之有爲, 是以難治, 民之輕死, 以其上求生之厚, 是以輕死, 夫唯無以生爲者, 是賢於貴生.

흔히 老莊哲學은 神秘的이고 形而上學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莊子는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 논리를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다.

그가 내뱉은 많은 寓言들은 日常의 틀 안에서 직접 체험하고 하나하나 精製되어 아름다운 寓話로서 탄생한 것들이다. 이른바 小國寡民 이라는 말도 그렇다.

사람들은 인류의 理想鄕인 유토피아를 그린 것이며「洪吉童傳」의 硉島國이나「許生傳」의 無人空島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小國寡民의 國은 나라가 아니며 民도 백성이 아니다. 小村寡人이다.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이기심과 배타심은 조직과 단체를 만들고 급기야 경쟁상대인 상대조직과 단체를 죽인다.

더욱 커진 조직과 단체는 국가를 형성하고 相對國을 무자비하게 죽인다. 그리하여 수천 년 후에는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애초에 조직과 단체를 만들지 말아야 인류는 평화롭고 온전하게 살수 있다는 것이 小國寡民의 의미이다. 인간세계의 조직과 단체의 弊害와 무자비함을 이렇게 逼眞하게 설명해 보여 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直觀이며 결코 추상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知止不殆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어릴 적 禪學院을 찾아 정일스님을 親見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무엇이 宇宙의 眞諦입니까?” “알려고 하는 것을 멈추고 是什麽를 觀하라”

侍子가 배웅을 하며 一柱門을 나오면서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是什麽는 어떻게 觀해야 합니까?” 갑자기 나뭇가지를 꺾어 허공에 던지며 侍子가 내뱉는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一柱門을 나서며 “禪家의 看話禪을 莊周가 망쳐 놓았구나.” 라고 생각하였다. 우주의 진리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한다. 우주의 진리는 끊임없이 변화하여 인간의 지식이라는 테두리에 갇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다.

우주의 진리는 끊임없이 변하고 변하여 인간의 갇혀있는 지식으로서 알기에는 不可思議 하고 無限하다. 設使 인간이 우주의 진리를 모두 體得하였다고 하더라도 宇宙內存在인 인간의 지식은 宇宙의 一部分에 불과하며 宇宙에 녹아들어 同化되는 것만 못하다고 한 것이 知止不殆라는 의미인 것이다.

이를 알지 못하고 아는 것을 버려야 진리를 알 수 있다 라고 하며 무의미한 話頭參究를 강요하는 禪師들의 어리석음은 朝鮮佛敎의 精神文化를 일천년 이상 후퇴시킨 것이다.

莊周가 말하는 小國寡民, 知止不殆는 유토피아라든가 아는 것을 멈추어야 비로소 보인다라는 말이 아니다. 인간이 우주의 진리를 알려고 하는 노력은 결코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모습을 이해를 하면 우리의 지식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가를 자각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가지도 않은 길을 가지도 않고 멈추어라 라고 말하는 것은 禪師의 어리석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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