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두쇠와 바우덕이 이야기

남사당놀이 여섯 가지

옛날 ‘집시’로 통했던 남사당패의 옛 이야기는 이제 우리의 기억 밖으로 서서히 살아져 가고 있다. 한 패거리가 40~50명인 규모가 큰 이 떠돌이 예인집단(藝人集團)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8도를 누비며 서민을 상대로 했던 놀이패였다.

▲ 1917년 남사당패 놀이터

그들이 연희하는 놀이의 종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늘날엔 ‘농악’으로 통하는 ‘풍물놀이’부터 시작된다. 숙련된 상쇠가 앞을 이끌고 그 뒤로 20여명의 풍물 잡이들이 짜임새 있는 ‘판굿’을 노는 것이다.

다음은 ‘버나’라 불리는 대접돌리기를 하고 ‘땅재주’, ‘줄타기’, ‘탈놀이’에 이어 마지막 순서로 인형놀이인 ‘꼭두각시놀음’을 논다. 이 여섯 가지 놀이를 노는데 대여섯 시간이 소요되는 잘 짜여진 놀이였다.

꼭두쇠 바우덕이

남사당패는 남자들만의 조직이었는데 여자인 ‘바우덕이’는 최초이자 최후의 우두머리였다. 남사당패가 없어지기 시작했던 1900년 초 뜻밖에도 남자가 아닌 여자 우두머리 ‘바우덕이’가 나타났다.

바우덕이의 본명은 김암덕(金岩德)으로 그는 경기도 안성군 서운면 청룡리에 있는 청룡사(靑龍寺)를 본거지로 했던 안성패 남사당의 마지막 두목으로 지금도 청룡리의 고로(古老)들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당시 서민사회의 유일한 구경거리였던 남사당놀이에 도전이나 하듯이 중국과 일본에서 들어온 곡마단(曲馬團·서커스)과 신파극(新派劇)에 밀려 그 명맥의 유지도 어렵게 되었던 시절에 ‘바우덕이’는 마지막 타는 불꽃인양 반짝 타다가 간 여걸(女傑)의 한 사람이었다.

열아홉의 꽃다운 처녀로서 50여명 남자만으로 구성된 남사당패를 이끌게 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일본의 압력으로 풍전등화

앞에서도 잠시 지적했듯이 ‘서커스’나 ‘신파극단’에 밀려 인기가 없어지기도 하려니와 또 침략자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계획적인 압박으로 서민들의 자발적인 집단놀이가 금지되기에 이르러 남사당패의 생명은 풍전등화 격이 되고 말았다.

이때에 춤과 노래에 능했던 사당패(社堂牌·여자들만의 연희집단) 출신 바우덕이는 남사당패의 간곡한 요청에 의하여 두목으로 추대를 받게 되었다. 남사당패에서는 두목을 ‘꼭두쇠’라 하는데 이 꼭두쇠의 권한은 절대적인 것으로 패거리를 통괄하는 총수(總帥)로서 군림하는 자리였다.

일차적인 유지마저 어려웠던 ‘안성패 남사당’은 바우덕이를 꼭두쇠로 앉히면서 한동안 화려했던 지난날을 되살리는 듯 싶었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고만 들어도 돈 나온다
안성 청룡 바우덕이
소매만 걷어도 돈 나온다
안성청룡 바우덕이
치마만 들어도 돈 나온다

심지어 이러한 민요가 당시 바우덕이의 명성을 뒷받침하는 것인 듯 지금도 안성지방의 나이 많은 할아버지들이 부르고 있을 정도이다.

▲ 1930년대 떠돌이 ‘남사당패’들 사진

병들고 사랑하고

그러나 1년 남짓 꼭두쇠의 역할을 하며 줄을 타고 춤을 추며 노래를 했던 바우덕이가 갑자기 ‘가슴앓이’라는 고질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자 안성패 남사당도 그 빛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아마도 폐병인가 싶은 가슴앓이에 걸린 바우덕이는 피를 토하며 전신이 쇠잔해지다가 끝내 몸져 누워버리고 만 것이다. 바우덕이가 자리에 눕게 되자 한 사람의 은인이 나타나게 된다. 평소부터 바우덕이를 짝사랑해 오던 안성패 남사당의 뜬쇠(고참)중 한 사람인 ‘이경화’가 그의 뒷바라지를 맡고 나선다.

쓸쓸히 마지막 길을 가고 있는 바우덕이의 고마운 반려가 되어 준 것이다. 바우덕이의 나이 20세에 이경화는 50이 넘는 노총각이었지만 아낌없이 불태운 채 1년이 못되는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뜨거운 것 이었다 전한다.

바우덕이는 갔지만

함박눈이 무릎에 차게 퍼 붓는 한 겨울에 바우덕이는 이경화를 버리고 저승으로 가고 만다. 뿔뿔이 흩어졌던 안성패 남사당의 단원들은 바우덕이의 비보를 듣고 달려왔고 바우덕이의 장례는 초라하지만 엄숙하게 치러졌다.

파격이기는 하지만 꽹과리 치고 날라리 불면서 멍석에 둘둘 말린 채 청룡리 마을 가파른 언덕 아래 움벙가에 묻혔다. 시냇물이 눈앞에 흐르는 움벙가에 그의 유해를 모시게 된 것은 고인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 한다.

짧기는 하였지만 다사다난했던 팔자소관을 죽어서나마 물에 씻어 흘려보내고 싶었던 고인의 염원을 이경화가 받아들인 것이다.

바우덕이를 잃은 이경화도 얼마 후에 이곳 청룡리를 떠난 후 1년 후엔가 다시 들리고는 어인 일인지 소식도 모른다고 한 촌로가 읊조린다.

우두커니 움벙가에 앉은 나의 발끝에 거의 그 형태를 잃은 바우덕이의 봉분이 움직이듯 다가온다. 이끼로 둘러싸인 움벙 속에는 눈알만 생긴 송사리떼가 분주히 오간다.

푸른 이끼를 통하여 바우덕이의 유택(幽宅)과 분주히 왕래하는 저 송사리떼들,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저 미물들은 지금도 바우덕이와 무슨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호~

도화색(桃花色)환한 웃음을 보내며 신명진 남사당패의 풍물장단에 맞추어 팔도강산을 누볐던 여장부 바우덕이. 그의 임종을 지켰던 구원의 사랑 ‘이경화’, 그는 지금 어디에 누워 있는 것일까····.

땅거미 엄습하는 청룡이 휘어진 시냇가에 우두커니 넋 잃고 앉았던 나는 젖은 얼굴을 닦는다. 기구했지만 정겨웠던 한 인생의 잔영(殘影)을 되씹으며 움벙가를 떠난다.

나 이젠 어디로 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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