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티가 내려가도록

팬티가 내려가도록

1944년 가을, 운동회 전의 일이었다. 나는 도키와(常盤) 국민학교(봉황초등학교)의 3학년이었다. 체조 시간에 교외(校外)로 나가 구보를 했다. 정문을 나서서 공주중학교(현재의 공주고교) 앞을 왼쪽으로 돌았다.

▲ 사진은 1943년 10월, 필자 소노다 씨(8세, 중앙)와 선친(園田竹次郞, 34세, 우측) (공주여자사범학교 소풍 때 찍은 사진으로, 장소는 우성면 통천포. 소노다 씨 제공사진)

잠시 후 우리 집이 눈에 보였다. 급우들은 “미카미군(三上君, 園田의 옛이름) 집이다”하고 주절댔다. T자 길의 모퉁이에서는 왼쪽으로 자전거포가 있었다.

그 건너 제민천의 천변에는 와카스기(若衫)의 집이 있었다. T자 길을 금강철교 방면으로 달리면 우측에 도립병원, 그 7, 80m 앞에는 왼쪽에 네기시(根岸) 선생님 집을 표시한 격자(格子), 다시 2, 30m 앞에는 오른쪽에 호리다상점(堀田商店)이 있었다.

식산은행(뒤의 제일은행)을 오른쪽 정면으로 해서 우리들은 왼쪽으로 방향을 꺾었다. 오른쪽 비스듬히 건너에 후지와라(藤原秀一, 현재 90세 넘어서 도쿄에 살고 있음)씨가 운영하는 문방구점이 있었다.

그 집 처마에는 1943년, 44년, 45년의 4, 5월경이면 매년 제비가 새끼를 키우고 있었다. 어미가 집으로 날아오면 제비 새끼들이 “삐-삐”하고 울면서 입을 잔뜩 벌리고 먹이를 조르곤 했었다.

제민천의 콘크리트 다리(‘대통교’인듯)에 다다를 무렵, 내 뒤에서 누군가 두, 세 명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달리는 모양이 우스운 모양이지”하고 생각하고 허리를 좌우로 흔들며 달렸다.

팬티의 고무줄이 끊어질 것 같아 신경이 쓰인 나는 왼손으로 팬티를 꽉 쥐고 있었다. 웃는 소리가 그치지 않아 걱정이 된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팬티가 내려가 엉덩이가 다 드러나 있었다.

뒤돌아보는 나를 보고 급우들은 더 폭소를 터뜨렸다. ‘몸빼’ 바지에 하얀 손수건을 꽂고 양손을 꽉 쥐고 달리는 네기시(根岸) 선생님의 시선과 나의 시선이 맞닥뜨렸을 때, 나는 얼굴에서 불이 나는 것 같이 창피하였다.

네기시 선생님도 나를 보시고 크게 웃으시는 것이었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으로 상(床) 파는 가게가 있었다. (2000년 8월 1일 밤에 씀)

(집필자 소노다 씨에 대한 소개)  

제민천의 추억에 대한 번역의 초고를 만든 후 나는 공주회의 회원 명부를 더듬어 이 글의 필자인 소노다 씨와 전화 통화를 할 수 있었다.

소노다씨는 1936년 부산에서 태어나(현재 76세) 3살 때 평양으로 옮기고, 1942년 6살 때 공주로 이사하여 공주에서 어린 시절 4년간을 보냈다.

도키와 소학교(현재 봉황초등학교) 4학년 재학 중 해방을 맞아 본국으로 귀국, 30여 년을 토쿄에서 고등학교 국어 교사(일본어)로 근무 하였고, 현재는 퇴직하여 사이타마현 소카시(草加市)에 거주하고 있다.

역시 국어(일본어) 교사였던 소노다 씨의 선친은 평양여학교를 거쳐 1942년 공주여자사범학교에서 근무 중 해방을 맞아 1945년 11월 원래 출신지인 일본 가고시마현으로 귀국 하였다. 공주에서 지낸 시간은 초등학교 4년에 불과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공주의 시간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되고 있다고 한다.

공주는 이 글의 필자 소노다 씨의  마음의 고향으로 지금도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공주회 회원들과 함께 여러 차례 공주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공주사대부고에 재직 했던 전순동 선생(충북대 역사교육과 퇴직)과 우연히 알게 되어 공주에는 지금까지 도합 19회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역자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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