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타, 이삼평의 흔적을 더듬다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쳐 있었다. 몽골촌 ‘겔’에서 하룻밤이 다 가도록 울어대던 까마귀 소리에 깼다. 우리는 아름답게 정비된 몽골촌을 이른 새벽 산책을 했다. 햇살이 번지기 전 몽골촌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 이즈미야마 산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일행

초록빛 잔디와 놀이기구, 구릉으로 이루어진 작은 몽골촌은 하나의 문화관광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침략을 하던 다른 나라의 숙박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여 관광 상품으로 이용하고 있는 그들의 정신이 부러웠다.

그렇게 우리는 또 하루의 여정을 아리타로 향했다. 우선 도착하자마자 이삼평이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헤매다 적합한 흙을 찾아내 작업을 시작했다는 산언덕에 도착했다. 멀리 도자기의 원료인 도석 채취장에 흙을 파낸 굴이 보인다.

▲ 도조 이삼평을 비롯해 일본 도예공을 모신 신사

 일본의 자기 발상지라고 일컫는 아리타!

자기의 역사는 그렇게 조선인 이삼평이 이즈미야마 산에서 자기의 원료를 발견하면서 17세기 초반 새로운 한 장을 연다. 그런 까닭에 이즈미야마 자석장은 1980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이삼평의 자기 원료 발견으로 그냥 산이기만 했던 그곳이 하나의 도자기라는 신비스런 보물의 원산지가 된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 서서 끌려간 시기가 임진왜란 당시였다고 막연히 말하고 있고, 그의 나이가 한창 젊은 38살 정도 되었다고 하니 고국 땅을 그리워하며 말하지 못하는 심정으로 도예 작업을 했을 그날을 상상해 본다.

▲ 이삼평 묘소에 있는 술잔

 읽어보지는 못했어도 아리타의 ‘소설 이삼평’을 쓴 작가 ‘쿠로카미’가 함께 나와 우리의 답사 일정을 돕는다. 윤용혁 교수가 쓴 글에 의하면 이삼평이 일본으로 끌려간 시기가 ‘1592년’, ‘1593년’, ‘1598년’ 혹은 임진왜란 때라고 막연히 말하고 있다.

그리고 관련 기록에 의하면 1616년 아리타에서 도자기를 개발해 만들었을 당시가 38살이고, 77세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렇게 ‘금강도’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공주사람이고 15·6세기 학봉리 출신이라고 한다.

그런 이삼평의 14대 후손을 만나 기념비 신사를 돌아보고, 이삼평의 묘소에서 우리는 술 한 잔을 올렸다. 삶이 역사가 된 사람! 그런 그의 삶을 보러 우리는 이렇게 와서 우리의 혼을 더듬어 보고 있다. 보고 느끼고 그리고 우리는 돌아가 무엇을 할 것인지...

▲ 이삼평 묘소 앞에서 소리를 하고 있는 이걸재 관장

 그렇게 서 계시던 이걸재 관장(구석기박물관)이 소리를 한다. 조용하게 울려 퍼지는 그의 소리가 애처롭다. 이 관장은 후손들을 잘 보살펴서 잘 되게 해 달라고 염원하기도 한다. 아마도 그 마음은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정돈해본다.

이삼평 묘소를 돌아 나오며 후손이 운영한다는 가게에 들렀다. 작은 평수의 가게에는 조상의 가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달’과 ‘토끼’가 그려진 도자기를 보았다. 문득 이삼평 묘소에 새겨진 ‘월창’이란 글귀가 떠올랐다.

그랬구나. 무엇보다 마음을 담아내는 것은 이렇게 작은 일에서 시작되고 있구나 싶었다. 소박한 그림이지만 강하게 머리를 때렸다. 초승달을 바라보는 토끼의 눈빛이 작가의 마음일까.

▲ 이삼평 14대 후손 가게 앞에서

작은 도시 아리타에는 그렇게 이삼평의 후손이 운영하는 작은 가게가 있고, 그런 그곳에는 고국을 그리워하던 이삼평의 혼이 어딘가에 한줌 흩날리고 있는 걸까. 그래서 이렇듯 우리는 우리 문화의 뿌리를 찾아오며, 위안을 삼는 걸까.

아니면 다시 한 번 아픈 그 역사 속에 먼지 보다 작은 한줌 개인의 삶이 이렇듯 한 나라의 도조공으로 큰 획을 그어놓고, 그것을 계기로 더 견고한 도예의 역사를 만든 일본의 역사를 보고 있는 것인가.

그 흔한 유행가 가사 중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라는 노래가 생각나는 것은 무언지... 참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이다.

우리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흔드는 14대 후손의 손끝이 멀어질 때까지 바라보며, 어릴 적 보았던 드라마가 떠올랐다. 흑백텔레비전을 통해 본 드라마였는데, 일본 어떤 마을에 우리 도공들이 끌려가 그릇을 만드는 문제를 갖고 도예공들이 싸우고 있었다.

아마도 일본인들이 도자기를 만드는 마을 전체 사람들을 데리고 가 그곳에서 나무그릇을 사용하고 있는 자신들을 위해서 도자기를 만들라고 압박을 가한다. 한쪽은 일본인을 위해서 만들 수 없다는 쪽과 먹고 살기 위해서 만들어야 한다는 쪽이 팽팽히 맞서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얼과 우리의 정신 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식과 가족을 위해서 도자기를 만드는 사람이 살아남는다. 그 과정에서 빚어지는 갈등을 보면서 어린 시절 많은 생각을 했었다. 무엇이, 어떤 모습이 가장 자기다운 모습일까.

아픈 자식을 위해, 굶어죽은 가족을 위해 유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절실한 도자기를 만들던 사람들... 배반이라고 하기에는 더 절실한 삶의 한 장면...

▲ 이삼평 동상앞에 선 14대 후손 가네가에 쇼헤이 도공

 이삼평도 그랬을까. 원해서 갔든, 끌려서 갔든 우리가 그의 마음을, 삶을 읽어내는 일은 어렵다. 지금 우리도 상신리에 자랑스런 도예촌이 있지 않은가. 그곳을 1990년대 초반, 연구원 홍보실에 근무하면서 기획취재를 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00년 나는 그곳이 아닌 금강아트센터에서 1년 정도 도예를 배웠다. 그리고 또 다시 세월은 흘렀다. 올해 다시 상신리를 찾았을 때 취재했던 그분은 없고, 부인이 남아 도예를 하고 계셨다.

이제 2013년, 세월은 또 다시 흐를 것이다.

이삼평, 그 묘소 앞에서 생각했다. 모두를 잃어도 하나는 잃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절실히 했다. 그 하나는 나라를 잃지 않아야 한다는 것, 힘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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