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소노다씨가 전하는 제민천 회상의 글

<제민천, 70년 전의 추억>이 연재된 후, 필자 소노다 씨는 2회에 걸쳐 제민천에 대한 간략한 회상의 글을 다시 전해왔다. <다시, 제민천의 추억>이라는 제목으로 3회로 나누어 다시 연재한다. (번역자)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공주 도키와(상반)국민학교 1,2,3,4학년, 우리나이 7,8,9,10살 때의 추억이다.

겨울의 제민천은 한 장의 얼음이었다. 그러나 여울이 있는 곳만은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맑은 날 아침에는 4, 50마리의 송사리가 무리를 웅크리고 있다. 해맞이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 1943년 통천포 다리 밑에서의 소노다와 부친(엽총을 들고 있는 이)(소노다가 들고 있는 것은 청둥오리로서, 사냥꾼으로부터 매입한 것이라 함)

잠깐 보고 있던 나는 ‘잡아 볼까’하고 생각했다. 큰 돌을 찾았다. 어른의 주먹 4개쯤 크기의 돌을 두 손으로 어깨까지 들어 올려 장갑을 낀 채 송사리를 향하여 힘껏 던졌다. 그러나 실패였다.

돌이 송사리 떼 한 가운데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이다. 목표를 벗어난 돌에 얼음이 깨지는 경우도 있었다. 제대로 성공한 것은 꼭 한번 뿐이었다. ‘퍽’! 하고, 물소리와 함께 물보라가 치솟았다. 돌은 가장 이상적인 곳에 떨어졌다. 물결이 소용돌이치며 퍼져나갔다. 나는 내심 ‘잡았다’하고 생각했다.

눈동자를 응시하여 물결이 가는 방향을 보았다. 20마리 정도의 송사리가 파닥 파닥 뛰고 있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은빛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좋았다. 누군가에게 이 장면을 보여주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뛰어오르는 송사리를 손으로 잡는 것은 어려웠다. 손끝으로 겨우 집었다. 송사리 의 몸은 아주 차가워서, 손끝이 마비될 정도였다. 나는 바로 손을 뗐다. 추위 때문에 손가락을 펼 수가 없었다. 

두 손을 입에 대고 ‘하-, 하-’하고 몇 번이나 입김을 불어댔다. 얼은 손을 녹이기 위해서였다. 송사리는 금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영하의 아침이었다.  (2013. 4. 10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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