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餘者損之, 不足者補之, 天之道損有餘而補不足, 人之道則不然, 損不足以奉有餘, 孰能有餘以奉天下, 唯有道者, 是以聖人爲而不恃, 功成而不處, 其不欲見賢.

韓龍雲 『님의 침묵』의 思想的 基底가 禪思想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禪思想의 根源은 老莊思想에서 나온 것이다.

輪廻라는 말을 살펴보자.

莊子는 “오직 사람의 육체를 받았다고 기뻐하나 사람의 육체는 장차 끝없이 옮아갈 만 가지 형태의 하나에 불과하다. 삶은 한 번의 조화(現生)로 끝나지 않고 여러 형태의 삶을 끝없이 이어간다.”라고 말한다.

般若의 의미를 살펴보자.

“般若는 모습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 비어있어도 만물을 비추어 보고 만물을 비추어 볼 때도 항상 비어 있으므로 세상과 뒤섞여도 혼란해지지 않는다.

반야는 온갇 변화 속에서 고요할 수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음에도 모든 것에 감응할 수 있다. 알지 않아도 저절로 알고 도모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聖以之靈 故虛不失照 無狀無名 故照不失虛 照不失虛 故混而不渝......萬動可卽而靜 聖應可無而爲 斯則不知而自知 不爲而自爲矣. 僧肇의「般若無知論」>

불교의 이상인 般若解脫을 설명하면서 老莊思想의 핵심인 ‘道’를 옮겨 설명한 것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다.

禪家의 宗旨인 不立文字, 敎外別傳 이라는 말도 물고기와 토기를 잡으면 통발과 그물을 잊고 뜻을 얻으면 말을 잊는다. 라는 말에서  禪家의 宗旨를 세운 것이다.<若忘筌蹄取魚兎 始可與言道矣>

三法印에서 涅槃寂靜 이라는 말도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한다는 의미 속에는 마음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으며 움직임 속에 고요함과 맑음을 涵潤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易傳』의 天行健君子以自彊不息와 『莊子』의 无爲無不爲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사람은 成佛할수 있다.” 라는 말도 『孟子』의 人皆可以爲堯舜에서 나온 말이다.

頓悟成佛도 謝靈運(385-433)의 「辯宗論」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聖人의 道가 요원하기는 하나 배움의 축적이 能至에 이르고 漸悟에 이른다. 그러나 無를 체득하고 통찰력이 두루 미쳐야 이치가 一極에 귀착한다. 이른바 頓漸을 華夷의 차이로 규정, 中國人은 悟를 중시하고 印度人은 배움을 중시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范曄(398-445)은 말한다.

“마음을 맑게 하고 번뇌를 벗어난다. 라는 가르침은 空有를 모두 물리치는 宗派로서 道家의 부류이다.”
『高僧傳』의  釋慧遠(334-416)의 말을 들어보자.

“대중이 實相義의 문제로 논쟁하는 것을 보고 혜원이 장자의 개념을 인용하여 설명하자, 마침내 미혹에 빠졌던 청중이 완전히 이해했다.”<釋慧遠本姓賈氏........難實相義 往復移時 彌增疑昧 遠內引 『莊子』 義爲連類 於是惑者曉然,『高僧傳』> 이른바 格義佛敎 라는 말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南北朝 時代에 老莊學으로써 佛學을 해석한 이들은 주로 有無, 動靜을 동일시하고 남과 나를 하나로 여기는 입장, 즉 『莊子』「齊物論」의 齊是非이론의 해명을 통해서 佛經을 해석한 것이다.

음식물은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떻게 소화시켜 흡수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外來宗敎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土着思想인 老莊思想을 援用하여 이해하였던 初期佛敎時代狀況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현대한국불교를 알 수 없는 것이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