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文軒見右師而驚曰 是何人也 惡乎介也 天與 其人與 曰 天也 非人也 天之生是使獨也
人之貌有與也 以是知其天也 非人也 澤雉十步一啄 百步一飮 不蘄畜乎樊中 神雖王 不善也

『論語』「鄕黨」에는 色斯擧矣 翔而後集 曰 山梁雌雉 時哉時哉 子路共之 三嗅而作 이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문장을 “새(까투리)가 사람의 눈치를 보고 날아오르다” 로 해석한다. 그러나 이 문장은 그렇게 간단한 의미가 아니다. 새가 인간의 桎梏과 煩憂를 바라보았을 때 안타깝고 애처로워 인간에게 嘲笑하는 몸짓이다.

『老子河上公章句』著者인 河上丈人은 漢孝文帝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漢孝文帝 말하기를 “그대는 朕의 땅에서 나는 곡식을 먹고 朕의 治下에서 살면서 나에게 禮를 올리지 않으니 잘못 되었소”라고 하니까 河上丈人이 곧 공중으로 뛰어올라 허공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땅에 속하지도 하늘에 속하지도 않소, 그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사람이요. 어찌 당신의 治下에 있다고 생각하오.”<帝曰 普天之下 莫非王土 率土之濱 莫非王臣....... 河上公卽拊掌坐躍 冉冉在虛空之中 如雲之昇去地百餘丈而止於玄虛 良久俛而答曰 今上不至天 中不累人 下不居地 何民之有 陛下焉能令余富貴貧賤乎>

새(까투리)는 자유혼을 상징한다. 그 超脫의 몸짓을 보고 孔子가 저 자유혼을 보라고 한 것이며 이를 알아듣지 못하고 子路가 까투리를 잡아서 바친 것이다.

皇侃도 이렇게 풀이한다. “저 까투리 한 마리 천하를 逍遙하는구나. 인간은 천하가 넓은 줄은 알면서 그 천하가 내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구나. 마치 저 까투리가 열 걸음에 먹이를 한번 먹고 백 걸음에 겨우 물을 찾아 마시는 수고로움이 있을지라도 어찌 천하(새장)속에 갇히기를 바라겠는가.”

이 자유혼의 精神을 『論語』「泰伯」에서도 이렇게 표현한다. “능력이 있으면서 무능한 자에게 묻고 많으면서 적은 이에게 묻고 가졌으면서 없는 사람에게 묻는다. 가득하면서도 빈 듯이 하고 침범을 당하여도 計較를 부리지 않는다. <以能問於不能 以多問於寡 有若無 實若虛 犯而不校 昔者吾友嘗從事於斯矣>

『孟子』에도 이런 이야기가 있다.

“가르침에는 여러 방법이 있다. 내가 가르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가르치지 않음으로써 가르치는 것이 나의 가르침이다.”<敎亦多術矣 予不屑之敎誨也者 是亦敎誨之而已矣>

다시 말하면 제자가 간절하게 배우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없는 가르침은 가르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라는 말인데 이들 문장은 가르침과 배움의 무차별, 능력 있다와 능력 없다, 많고 적음의 차별을 구획하지 않는 老莊的 思惟가 짙게 배인 문장이다. 儒家의 思惟地平도 老莊的 思惟를 벗어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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