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열 “계룡산 인근의 다른 성에 비하여 규모가 큰 것”

충청인의 영산인 계룡산에 성(城)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지만 학계의 보고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공주향토문화연구회(회장 이선자)에서 발간하는 웅진문화 26집에 수록된 ‘계룡산 성터와 출토 문자기와’에서 조성열(계룡산국립공원사무소)씨는 “해발 440m에서 처음 만나는 이 성은 자연지형을 포함하여 전체 둘레 3.8km이며 계룡산 인근에 발견되는 다른 성에 비하여 상당히 규모가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계룡산 성터와 출토 문자기와’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1.계룡산 성터와의 만남

계룡산국립공원 신원사 주차장에서 연천봉을 향한 탐방로를 따라 한 시간 남짓 올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돌무더기를 밟으며 그 곳을 지나게 된다. 무수한 돌들이 잔뜩 모여 있는 그 곳! 그 장소가 바로 계룡산의 오랜 시간이 남아 있는 성터이다. 해발 440m에서 처음 만나는 이 성은 자연지형을 포함하여 전체 둘레 3.8km이며 계룡산 인근에 발견되는 다른 성에 비하여 상당히 규모가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

▲ 성의 흔적(양쪽으로는 수목이 자라고 있다)

계룡산에 존재하는 이 성은 최초로 필자에 의해서 1994년 이후 여러 차례 현장 및 문헌조사가 실시되었고, 2003년과 2012년 계룡산국립공원자연자원조사 문화자원편 및 2004년「백제연구」제40집(충남대학교 박순발·정원재, 「공주 계룡산성」)에 수록된 바 있다.

2. 성터의 위치와 규모

계룡산국립공원의 연천봉, 문필봉, 관음봉, 쌀개봉의 능선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이 석성(이하 ‘성’으로 칭함)은 인근에서 발견되는 다른 성에 비해 매우 큰 규모지만 현재까지 그 실체에 대한 충분한 조사와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데군데 자연석을 다듬어 쌓은 성의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무너진 곳이 더 많은 그 곳에는 사계절 자연의 색이 성 터 주위를 물들이고 있으며, 성이 무너져 내린 자리를 비켜 그 양쪽으로 자란 나무들이 호위병처럼 서 있다.

▲ GPS를 이용하여 확인한 계룡산 성의 모습과 위치

GPS장비를 이용하여 확인한 성은 해발고 440m~820m 사이에 위치하며 바깥을 둘러싼 성(이하 외성)의 총 길이는 3.8km이며 안쪽 성(이하 내성)은 605m로 해발고가 다소 낮은 440m~560m의 계곡부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그림1). 성을 따라 십리가 넘는 그 길은 대체적으로 능선부의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조되었으며 상태가 대체로 양호한 부분의 성의 높이는 약 3.2m와 4.8m이고 폭은 약 6.0m이다.

성터를 따라 여러 곳에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산재해 있다. 성을 잇는 중간 중간의 평탄한 지역이 발견되는데 연천봉의 등운암 일대는 3,000㎡ 이상의 평탄지가 있으며 곳곳에 약 350㎡~480㎡(주변의 수목이 자란 부분을 고려한다면 그 이상의 면적이 될 수 있음)의 터가 10여 군데 발견되었다.

이 곳은 성과 관련된 부속 건물의 자리일 가능성이 높다. 1978~1979년에 산림 내 불법시설물 철거 사업이 실시되었는데, 당시 성터 곳곳의 평평한 대지는 무속인들이 가건물을 지어서 굿당  등으로 활용되는 곳이 많았다.

3.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서

1994년, 잠시 비운 계룡산사무소로 다시 발령을 받아 돌아온 필자는 그 시절 본격적으로 계룡산 성터의 현지 조사를 시작했으며, 쉽게 드러내지 않는 성터의 역사적 흔적을 찾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으로 향했다.

▲ 「동국명산기」기호중산수 중 계룡산

이 때 발견한 중요한 단서 하나, 바로 성해응1)이 엮은「동국명산기2)」의 기호중산수(記湖中山水) 중 계룡산 편(그림2). 이 내용을 해석해보면 (표1)과 같다. 또한 김부식의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표2)을 살펴보면 동국명산기에 나오는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 동국명산기 해석

 

▲ 삼국사기<백제본기 중 제31대 의자왕 편 중에서>

4. 성터에서 발견된 문자기와

글씨가 새겨진 기와(右)와 그 탁본(左) “계룡산방호별감7) 김○○” 글자가 보인다. 연천봉 인근에서 발견하였으며 같은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인근 지역에서도 추가로 발견되었다.

▲ 성터에서 발견된 문자기와

5. 계룡산 성(城)의 발견, 그 후!

계룡산의 역사를 간직한 말없는 성(城)의 흔적, 그 오래된 역사를 찾아 이어가기 위해서는 우리는 해야 할 일들이 아직 많다. 이미 학계에 보고된 계룡산 인근에 산재해 있는 산성(계룡면 경천리 양화산성, 계룡면 중장리산성 등)과 요지(와요지, 도요지 등), 계룡산에서 발견되는 와편 조각의 새김글과 각종 무늬, 그릇조각 등을 연구해 나간다면, 계룡산에 남은 석성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 나가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탐방로에서 쉽게 발견되는 각종 기와와 토기 조각 등 성의 흔적이 잘 보존되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 말없이 흔적만을 남긴 채 지금 우리한테 와 있는 계룡산의 석성. 지나온 긴 세월을 더듬어 역사를 찾아 가는 일은 쉽지 않겠지만 계룡산국립공원의 성터가 간직한 긴 비밀을 풀어나가는 일은 우리들의 몫이다.

▲ ‘大王(대왕)’ 글자가 새겨진 기와 조각(右)과 탁본(左)

 

▲ 성터에서 발견된 각종 각종 글자가 새겨진 기와 탁본

<참고문헌>
김부식, 「삼국사기」, 대경출판사, 1991.
성해응, 「동국명산기」, 경성:일한서방, 1909.
충청남도 공주대학교박물관,「문화유적분포지도 공주시」, 대문사, 1998.
최맹식,「백제 및 통일신라시대 기와문양과 제작기법에 관한 조사연구」, 문화재관리국,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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