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속’에 관한 바른인식

‘민속’이란 말이 그의 뜻에 대한 분별이 없이 애매모호한 상태에서 함부로 쓰여 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민속놀이’란 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민속’이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하여 거의 같은 뜻으로 뒤섞여 쓰여 지고 있는 ‘고전’, ‘전통’ 등을 살펴보자.

‘민속’은 한마디로 ‘민간의 풍속’의 준말이다. 그러니까 민속의 바른 뜻은 옛날의 풍속이 아니라 오늘의 일상생활 속에 살아 있는 풍속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속’하면 오늘이 아닌 과거의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컸다. 이렇게 된 데는 지난 우리역사의 발자취 가운데 주체적이지 못한 대목이 있는데서 오는 불행한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생성적 전승력이 오늘의 생활 속에까지 살아 있으면서 발전하고 있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고전’이란 앞에서의 자기 생성적 전승력은 지난 어느 시기에 단절되었지만 그 단절된 시기의 형태로 재구성·보존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춤 가운데 ‘살풀이’는 그의 염원이 원시 공동체사회의 제천의식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면서도 지금 이 시간에도 무당의 굿판에서 또는 전문적인 춤판에서 그리고 일반인의 흥 풀이에서까지 자기 생성적인 전승력을 지니며 추어지고 있음을 본다.

여기에 비하여 조선조 시기 주로 궁중에서 추어졌던 ‘처용무’는 심한 가뭄이나 장마 또는 나쁜 병이 돌 때 악귀를 물리치는 ‘구나무’의 하나였는데 실상 조선왕조가 끝나면서 이 춤의 자생력도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춤의 내용이 우리 춤의 발자취를 살피는 소중한 것이어서 그것이 자생력을 잃기 전의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다.

위에서 ‘살풀이’는 민속무용이라 하겠고 ‘처용무’는 고전무용이라 하는 것이 마땅한 표현이다. 나아가서 거의 같은 뜻으로 분별없이 쓰여 지고 있는 ‘전통’이란 앞의 민속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을 통틀어 지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그러니까 ‘처용무’를 민속무용이라 하면 틀리지만 전통무용이라 할 수 있겠다.

‘살풀이’는 고전무용이 아니라 민속무용 또는 전통무용이라 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본론으로 돌아가자. ‘민속놀이’란 전 시대의 조상들이 놀았던 옛 놀이가 아니다. 그것은 면면한 역사와 함께 우리민족이 생활의 슬기로 지녀오는 ‘놀이문화’인 것이다.

2 세시풍속과 민속놀이

세시풍속이란 것은 아득한 옛날로부터 한 공동체가 지켜 내려오는 남과 다른 습관을 말한다, 신앙, 생산수단, 의식주에 이르기까지 한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발전하면서 얻어진 전통적 생활양식을 우리는 풍속 또는 습관, 관습 등으로 부르고 있다. 풍속이란 생활공동체에 따라 서로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마디로 이런 것이요 하고 설명하기는 어렵다.

한편 ‘세시’란 1년 가운데의 때때를 일컫는 것이니 계절을 이르기도 하고 또는 달 달의 일이나 때맞춰 지켜지는 명절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인간이 한 평생을 지내는 것을 ‘통과의례’라 하여 ‘관(冠)’, ‘혼(婚)’, 상(喪) ‘제(祭)’를 든다면 세시풍속이란 한 공동체가 해마다 집단적으로 되새김하는 1년의 일정표인 것이다.

이러한 일정표가 짜여 지는 바탕으로는 풍토와 생산조건, 토착신앙 등은 물론이요 계절과 날짜, 시간을 분간하는 ‘역법’이 있다. 원초적인 방법으로 해와 달 등의 천체의 움직임에 따르는 것과 식물이 돋아나고 말라 죽거나 동물의 동면 등 생태·생활변화에 의하여 짐작하기도 한다.

동양에서는 일찍이 달을 기준으로 하는 ‘태음력’의 역법을 만들어 냈는데 중국의 경우는 삼짇(3월 3일), 단오(5월 5일), 칠석(7월 7일), 중구(9월 9일) 등을 명절로 삼았으나 우리 민족은 대보름(1월 15일), 유두(6월 15일), 백중(7월 15일), 한가위(8월 15일) 등의 달이 둥글게 뜨는 ‘보름’을 더욱 꼽는 명절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시풍속과 민속놀이와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가. 우리의 세시풍속을 소상히 알려주고 있는 ‘동국세시기’, ‘경도잡지’, ‘동경잡지’ 등을 보면 비단 1년 12달 농사짓고 고기 잡는 순서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염원을 하나로 모으는 정월의 ‘당굿’으로부터 계절에 걸맞게 가다듬고 풀면서 섣달그믐에 이르기까지 ‘일’과 ‘놀이’를 하나로 조화하매 다양한 공동체의 의견들을 통일시키는 의지가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다. 생산의 단계 단계에 일꾼들의 건강과 계절의 변화와 그리고 더 풍요한 생산을 위한 일정표로서 세시풍속은 짜여 지고 있다.

이와 같은 세시풍속을 영위해 나가는데 있어 마치 기계에 쓰는 윤활유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놀이라 하겠다. 여기서 잠시 같은 이름으로 놀아지고 있는 오늘의 변질된 ‘줄다리기’와 본디의 것을 견주어 살펴보기로 하자.

요즘 각급 학교에서 운동회 때 줄다리기를 하는 것을 보면 거의 왜식(일본식)으로 놀고 있다. 화약 딱총소리를 신호로 죽기 살기로 상대를 당겨 어느 편이 상대를 끌어당기느냐를 3판 2승으로 가리는 왜식 줄다리기가 판을 치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본디 줄다리기는 아주 다르다. ‘동’, ‘서’ 양편의 마을이 줄(암줄 또는 숫줄)을 꼬아 그것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데서부터 놀이는 시작된다. 줄꾼들은 징소리를 신호로 끌어당기는데 엎치락 뒷치락 하루 종일 때로는 2~3일씩이나 이 집단놀이는 계속되었다.

놀이의 속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맺고 끊음이 없는 지루한 놀이라 비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의 속뜻이 아주 깊다. 이리저리 끌리다가 두 힘이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딱 맞수가 되는 순간이 있다. 둘의 힘이 더 큰 하나의 힘으로 팽배하면서 승화하는 순간인 것이다.

양편 줄꾼들의 발이 공중으로 붕하니 뜨며 풍물패들은 사물을 부서져라 마구 쳐댄다. 이 팽배의 아릿다운 경지를 만끽하는 것이 줄다리기의 맛이요, 정신인 것이다. 승부의 끝마무리 또한 깔끔하다. 이긴 편 마을은 논농사가 잘되고 진편 마을은 밭농사가 잘 된다고 한다. 시냇물 하나 사이에 그럴 리가 없다. 다 잘되자는 마음씨이다.

이번에는 ‘한가위’ 때의 민속놀이인 ‘강강술래’와 ‘거북놀이’를 알아보자.

강강술래의 시원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의병 술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 이러한 원무형식의 춤은 가장 원초적인 무리 춤(집단무용)의 형태로 보여 진다.

‘선소리꾼’의 ‘메김 소리’(앞소리)를 받아 일동이 함께 받는 강강술래의 낭랑한 가락과 춤사위는 바로 민중의 애환을 그대로 담고 있다. 손에 손을 잡고 한없이 돌아가면서 몸도 마음도 하나가 되어 집단놀이의 최고의 경지인 무아지경에까지 이른다.

거북놀이도 남다른 뜻이 있다. 수수 잎을 따 거북이 등판을 엮어서 등에 메고 엉금엉금 거북이 흉내를 내는 이 놀이는 중부지방에 널리 전승되던 한가위 놀이이다. 거북이는 용왕의 아들이라 한다. 용이란 비를 제도하는 영험한 상징적 존재이니 농사가 잘되고 못되는 것이 용의 마음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8월 한가위 며칠 전부터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른은 어른끼리 따로 ‘거북이 놀이패’를 짜 ‘지신밟기’와 흡사한 추념을 하며 집집을 돈다. 거북이를 앞세우고 풍물패를 뒤따르며 온갖 우스꽝스러운 어릿광개가 신명을 돋우는 가운데 집집을 찾아들면 주인은 형편껏, 성의껏 공식이나 돈을 낸다.

‘어린이패’는 그 수입으로 어려운 집을 돕거나 마을의 경로잔치에 쓰며 어른들 몫은 마을의 공공기금으로 다리도 고치고 길도 넓히는데 쓰이니 이 얼마나 보람 있는 일인가.

세시풍속과 민속놀이는 이처럼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기에 민속놀이를 ‘세시놀이’라고도 일컫게 되는 것이리라.

3 ‘민속놀이’는 왜 오늘에 전승되어야 하는가.

그러면 여기서 우리나라 이곳저곳에 고루 전승되고 있는 ‘민속놀이’의 이름을 순서 없이 열거해 본다.

자치기, 제기차기, 고누, 공기놀이, 비석차기, 그림자놀이, 땅따먹기, 술래잡기, 그네뛰기, 널뛰기, 줄넘기, 윷놀이, 관등놀이, 달맞이, 다리밟기, 지신밟기….

위의 놀이들은 변모의 과정을 겪고는 있지만 거의 전승되고 있는 것들이다. ‘겨룸놀이’로 씨름, 연날리기, 줄다리기 편싸움(석전), 장치기(격구), 활쏘기, 투호… 등 가운데 ‘편싸움’ 등은 사라져 버린 종목들이다.

실상 풍속이라는 것은 사회변동에 따른 생활양식의 바뀜에 따라 함께 바뀌는 것임은 하나의 상식이라 할 때 놀이도 예외일수는 없다. 비근한 예로서 옛날에는 손으로 모를 심고 논을 매고 거두어 들였는데 지금은 이것을 기계로서 하고 있다.

그러니 옛날에 논에서 일하며 불렀던 ‘일노래’들이 이제는 필요 없는 것으로 되고 말았다. 일노래란 일의 장단과 맞아 떨어지는 호흡으로 불러지는 것이니 아무런 효용가치도 없어지고 말았다. 옛날 골목에서 어린이들이 즐겨 놀았던 ‘자치기’를 지금은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창마다 유리를 끼었으니 당치도 않은 놀이이다.

돌을 던지며 용맹심을 길렀던 ‘편싸움’이며 들판에 불을 질렀던 ‘쥐불놀이’도 이제는 금기의 놀이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민속놀이를 되찾아 오늘에 심으려 함은 무슨 연유일까?

첫째로 민속놀이가 지니는 ‘공동체성’, ‘협화성’ 때문이다. ‘놀이’와 ‘전쟁’을 명확하게 분별하면서 ‘겨룸을 통한 얼싸 안음’을 터득한 조상님네 슬기가 너무도 고귀하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의 전래놀이 가운데도 ‘돈치기’니 ‘투전’ 등 도박놀이도 없지는 않지만 대부분 민속놀이들은 도박성이나 요행성 보다는 ‘슬기’와 ‘용기’, ‘인내심’을 길러 주는 건강성이 있음을 높이 사게 된다.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서구 취향의 놀이들이 상업주위적 안목으로 꾸며진 사행놀이(예로 컴퓨터 게임, 사격놀이 등)가 많은데 비하여 민속놀이(예로 공기놀이, 비석차기, 제기차기, 칠교놀이 등)들은 차분한 정신과 육체의 수련을 통하여 희열을 맛보는 것이니 이 얼마나 수중한가.

셋째, 민속놀이는 ‘일과 ’놀이‘를 썩 잘 조화시키고 있다는데 주목하게 된다. “도랑치고 가재 잡고 마른 논에 물대기”라는 속담이 있다. 물이 잘 빠지도록 도랑을 치고 보면 힘 안들이고 물고기를 잡게 되고 그 덕분에 마른 논에 물을 가득히 담을 수 있으니 어디까지가 놀이이고 어디부터가 일인지 도무지 분간할 수 없다.

일과 놀이가 이처럼 조화를 이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우리의 조상님네는 이와 같은 민속놀이들을 꾸며 내셨는지 모를 일이다. 벌써 언제부터인가 세상인심이 각박하여져서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다고 걱정을 한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놀고 있는 놀이들이 도박이 아니면 살벌하기 그지없는 것들이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무슨 큰 변을 당하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있다.

놀이라는 이름으로 쏘고 치고 자르고 태워 날려 보내는 끔찍한 장면들을 너무 자주 대하게 되고 보니 이제는 웬만한 것은 그저 덤덤하다고까지 한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인정스런 화합과 슬기로써 이루어진 민속놀이들을 서둘러 되찾아 오늘에 걸맞도록 재창조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야한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듯이 ‘민속’이란 민간의 풍속을 말하는 것이며 여기에 ‘놀이’가 덧붙은 ‘민속놀이’는 소비성향적인 사행놀이가 아니라 더욱 효율적인 생산을 위한 ‘쉼’의 뜻이 함께하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젖먹이의 ‘돌이돌이 잼잼’으로부터 ‘윷놀이’, ‘널뛰기’, ‘그네’, ‘씨름’, ‘줄다리기’, ‘연날리기’에 이르기까지 나이와 체력과 지능에 걸 맞는 밝고도 건강한 놀이들을 우리의 생활 속에 수용함으로써 역사 민족, 문화민족으로서의 긍지를 되찾아야 하리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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