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영화를 본 적이 있나요? 재미없다구요? 맞아요. 한물간 영화지요. 1990년 캐빈코스트너가 감독하고 출연했던 ‘늑대와 춤을’ 이란 영화만 해도 제작 당시 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서부영화는 승산이 없다고 제작에 참여를 하지 않으려 했다네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캐빈이 직접 프로덕션을 설립하여 제작했는데 대 성공을 거둡니다. 아카데미 7개 부문, 골든 글로브 3개, 베를린 영화제 금상을 석권합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던 이 영화가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인디언들의 정신이 깃든 이름과 초원의 광활한 아름다움, 말이 통하지 않아도 충분히 소통이 되는 마음의 언어, 아주 많은 미국인이 쳐 들어올 것이라는 주인공의 말에 얼마나 되느냐. 한 50명 되느냐고 묻는 인디언 추장의 순진무구함에 가슴 저림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땅을 개척하기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 마을에 인디언들이 수시로 나타나서 가축과 여자를 데려가고 아이들을 죽이는 예전의 서부영화와 차원이 다릅니다.

그때의 인디언들은 야비함의 대상이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인디언들을 야비함의 대상으로 그린 영화들이 미국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그 후의 일이랍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이란 책을 좀 더 깊이 있게 읽기 위해서는 미국의 역사에 대해 조금은 알고 넘어가야 할 거 같네요.

인디언 부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1607년 영국의 이주민 100여명이 지금의 버지니아주에 정착을 합니다. 처음에 그들은 잘 지냈답니다. 그러나 정착민들이 담배를 재배하면서 땅을 뺏기 시작합니다. 이에 영국 정부는 인디언들과의 충돌을 막기 위해 이주민이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을 침범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나 1776년 이주민이 세운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자 이 약속은 무효가 됩니다. 이후 미국은 1830년 ‘인디언 이주법’을 만든 뒤 인디언을 서쪽인 캘리포니아나 오클라마 주로 강제 이주시키지요. 그러나 그곳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서부 개척시대가 열리고 인디언들은 쫓기고 쫓기게 됩니다.

이 책은 침략자인 미국인들이 인디언을 강제 이주시키고 난 뒤 인디언 구역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 도망쳐 나온 체로키 인디언인 외조모와 살아가는 ‘작은 나무’의 이야기입니다. 

잠시 본문을 살펴볼까요. ‘엄마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 내가 어디로 가야 좋을지 친척들 사이에서 말다툼이 있었다. 그 와중에도 페인트칠이 된 침대와 탁자, 의자 따위를 나누어 가지면서 말이다. 할아버지는 뜰 구석에 묵묵히 서 계셨다. 나는 한발 한발 다가가 할아버지의 긴 다리에 매달렸다. 친척들이 아무리 떼어내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았다.’

주인공 소년이 외할아버지에게로 가는 장면입니다. 첫 장면부터 긴장감이 감돕니다. 소년이 친척들에게 맡겨지지 않고 할아버지를 따라 가는 것에 안도의 숨을 쉬게 되지요. 숨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이 책은 우리를 황홀감에 젖어 들게 합니다.

유리가 쨍 하고 깨질 것처럼 맑고 신선한 공기가, 둥그런 수박을 반으로 쪼개 놓은 듯한 달이, 구부러져 돌아간 곳까지 그들의 앞길을 은빛으로 비춰주고, 그 길을 따라 그들은 집으로 갑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체로키식 삶의 생활방식이겠지요. 숲 바깥은 문명이 휘황찬란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숲 속에서의 ‘작은 나무’의 삶은 자연의 순리대로 급할 것도 없이 흐릅니다.

필요한 것 외에는 자연에서 절대로 더 빼앗지 않는다는 체로키 인디언들의 삶은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들을 왜소하게 만듭니다. 이런 왜소함이라면 얼마든지 작아져도 좋겠지요.

그러나 시간이 정지된 듯 살아가는 그들에게 평화로움이 깨지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자신들과는 다른 철학으로 살아가는 인디언들을 더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서 ‘작은 나무’를 강제로 고아원에 데려갑니다. 

‘작은 나무’는 고아원에서 갖은 학대를 받습니다. 사생아는 어차피 지옥에 갈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미워합니다. ‘작은 나무’의 부모님은 인디언 식으로 결혼을 했지만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요. 

‘작은 나무’가 채찍으로 맞아 등에 지렁이가 기어간 것 같은 부분은 너무나 생생하여 읽는 사람들로 하여금 분노의 눈물이 솟게 합니다. .어떤 직감 때문에 할아버지가 면회 오지만 작은 나무는 그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말없이 정류장까지 따라 갑니다. 무척 안타깝게 했던 장면입니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간절한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보는 ‘작은 나무’의 마음을 무언으로 자연과 소통하는 할아버지가 모를리 없지요. 할아버지는 그대로 손자를 안고 버스에 오릅니다.

집으로 돌아오지만 행복은 오래 가지는 못하지요. 조부모님의 죽음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인디언 연방을 찾아 어린소년은 방랑자가 되니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디에도 없는 인디언 연방, 소년이 갈 곳은 어디일까요? 백인 사회도 영어로 교육을 받는 인디언 구역도 아닌 게지요. 그래서 참 가슴이 아픕니다. 산을 넘고 넘을 어린 방랑자의 모습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한참을 따라 다녔답니다.

나와 다른 문화를 가졌다고, 혹은 친구는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고, 친구 부모님은 작은 차를 탄다, 고 속으로 무시했던 적은 없나요? 만일 그랬다면 이 책에서 백인들이 작은 나무에게 했던 행동과 무엇이 다를까요? 자신을 한 번 돌아보는 독후감도 좋지 않겠어요. 아니면 자연의 이치를 잊고 사는 현대인들에 대한 각성도 좋구요. 

우리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모든 욕망을 버리고 살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한 번쯤 고요해지는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우리에게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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