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후에 우리 사회는, 아니 사람들의 의식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요? 남들보다 앞서가고 싶은 인간의 욕망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헤르만 헤세’의 이 책을 읽고 나니 듭니다. 바뀌는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이 사람이지 싶기도 합니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읽고 난 후에 오래 가슴이 아린 글입니다. 천재 소년 ‘한스 기벤트라’는 수레를 끌고 남들보다 앞서 달리라는 어른들의 욕망에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한 채  결국은 수레바퀴 아래 깔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이 발표된 지가 100년이 넘었는데요. 작가가 살고 있었던 19세기의 독일은 지금 우리의 교육제도와 너무나 닮아 있어서 다시 돌아보아 집니다.

간단하게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이렇습니다. ‘한스 기벤라트’는 ‘슈바프츠발트’라는 작은 소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예민하고 감성적인 그는 낚시와 동물 키우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것마저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 마을의 희망인 그는 수업이 끝나면 교장선생님에게 따로 그리스어 수업을 받고, 주임목사에게 라틴어와 종교 과목을 복습하고, 수학선생에게 개인 과외를 받아야 했습니다. ‘한스’의 아버지 역시 자식만큼은 대학을 마친 뒤 관료를 시키려는 욕망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마을 사람들의 바람대로 모두가 선망의 대상인 신학교에 입학한 ‘한스’는 그곳에서 예술가적 기질을 가진 ‘헤르만 하일너’라는 친구를 만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에 눈을 뜨기 시작합니다.

‘하일너’는 ‘우린 ’호메로스의 오디세아‘를 마치 요리책처럼 읽고 있어. 대체 문법을 하나하나 따지고 분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강력하게 비판합니다. 학생들의 창의성과 자유로운 의지를 꺾어 버리는 교육에 대해 반항하면서 죽어라 공부만 하는 신학교 학생들을 대해서도 일격을 가합니다.

획일적인 교육에 대해서 아무런 비판도 할 줄 몰랐던 ‘한스’는 자신과 너무나 다른 생각을 가진 ‘하일너’에게 끌립니다. 자신의 마음속에 있던 감성과 만나는 것이지요. 그때부터 한스는 혼란스러워 집니다.

품행, 성적 어느 것으로 봐도 모범생이었던 ‘한스’의 성적은 떨어지고 한스는 두통으로 시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하일너’가 친구 ‘루키우스’와 싸워 처벌로 감금형을 받는데요. 문제아로 낙인찍힌 ‘하일너’ 곁에 아무도 가지 않습니다.

‘한스’는 우정에 갈등하지만 장래를 위해 하일너 곁을 떠나는 이기적인 행동을 합니다. 그러나 ‘한스’는 결국 ‘하일너’를 찾아가 다시 친구가 되자고 말합니다. 교장선생님은 ‘한스’에게 ‘하일너’와 가까이 하지 말고 공부에 매진하라고 타이르지만 ‘한스’는 ‘하일너’를 통해 자신이 놓쳤던 부분이 무엇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민하고 세심했던 한스는 내면의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두통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 학교로부터 의무적으로 산책을 나갈 것을 명령받습니다. ‘한스가 산책할 때 아무도 함께하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하일너‘는 ’한스‘와 함께 산책을 합니다.

그 일로 인해 ’하일너‘가 불명예 퇴교 처분을 받아 학교를 떠나자 ’한스‘는 외톨이가 되고 신경쇠약이 심해져 집으로 돌려보내 집니다. 당연히 고향에서도 그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고통을 극복하고 기계 수습공으로 일하면서 작은 행복감을 맛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죽음을 생각합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겨우 기계공을 하기 위해 그렇게 공부했느냐는 비난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지요.

저는 이 부분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기계공에 만족하지 못하면 다른 일을 찾으면 되지 않았을까요.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길이 있는데......

사실 이 책을 짧게 소개하기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부모 입장에서도 청소년 입장에서도 할 말이 참 많습니다. 

‘한스’가 ‘하일너’라는 친구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탄탄대로를 달렸을까요?

저는 같은 작가가 쓴 ‘데미안’을 꼭 같이 읽기를 권합니다. ‘싱클레어’가 친구 ‘데미안’을 만나 혼란기를 어떻게 극복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가는지 보았으면 좋겠거든요.

저는 여러분이 어디에 서 있든 당당한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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