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조동길 공주대 교수 몽골 답사기

새벽에 일어나 아내가 챙겨주는 삶은 계란과 커피 한 잔으로 요기를 한 후, 택시를 불러 타고 터미널로 갔다. 예매한 표를 찾아 6시에 출발하는 버스를 탔다.

▲ 자이승 전망대

꼬박꼬박 졸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8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짐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으나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많이 남아 있다. 식당으로 가서 순두부찌개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래도 9시밖에 안 되었다. 사람들이 별로 없는 곳으로 가서 가지고 간 “한국소설” 잡지를 펴고 소설을 읽었다.

단편 세 편을 읽고 나니 10시 반쯤 되었다. 슬슬 일어나 만나기로 한 곳에 가서 앉아 기다렸다. 내가 그쪽 사람들과 초면이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인데도 알아보지 못했다. 11시 반이 되어 이번 여행을 같이 할 사람들이 거의 다 모였다.

서울대 우한용 교수와 교원대 한철우 교수, 그리고 교육부에 있을 때 교과서 검정으로 만났던 박삼서 교장만 구면이고, 나머지는 모두 처음 만나는 분들이라 수인사를 나누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유라시아 포럼의 회장인 명지대의 홍태식 교수, 사무를 총괄하는 채길순 교수는 전화 통화를 한 인연이 있고, 거기에 충북대의 한석수 교수, 명지대의 김석환 교수, 신라대의 유철상 교수, 형남규 교장, 최석준 교장, 김순심 시인의 남편인 김태영 사장 등 남자 12명에,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중년 여성들인 시인과 시 낭송 전문가 여성이  8명이다.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회장님의 출정 인사를 듣고, 출국 수속을 했다. 우한용 교수와 일행이 되어 안으로 들어가 우 교수가 점심 대용으로 빵을 하나 먹는 옆에서 음료수를 한 캔 마시며 여러 이야기를 한 시간 넘게 나누었다. 충주에서 농사짓는 얘기며,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유라시아 포럼을 만들게 된 계기와 그 동안의 활동에 대해 소개를 받았다.

▲ 자이승 전망대에서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일행들의 모습

2시 2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는 몽골 국적 항공기는 약간 지연되어 2시 40분쯤에야 출발했다. 초면인 여성 시인과 한리에 앉아 기내식을 먹으며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몽골의 유일한 국제공항에 현지 시각으로 4시경에 착했다. 시차 한 시간을 포함하여 2시간 반 정도 걸린 셈이다.

최근 공항 이름을 사회주의 시대에 금지되었던 이름인 칭기즈칸 공항으로 바꿨다 한다. 간단한 입국 수속을 거쳐 공항 밖으로 나왔다. 몽골의 첫 인상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냄새 섞인 바람이었다. 후덕하게 생긴 처녀 가이드를 만나 공항 밖으로 나와 우리가 내내 타고 다닐 버스에 탑승했다.

우리나라 모 전자회사의 영문과 한글 글씨가 선명하게 남아 있는 버스였다. 중고 버스를 수입하여 관광객 수송용으로 사용하는 게 이 나라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버스를 타고 우 교수와 같은 자리에 앉아 가이드의 저기 소개와 몽골과 수도 울란바토르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들으며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수도를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는 자이승 전망대였다.

울란바토르는 동서남북의 네 개의 산과 강에 둘러싸인 해발 천오백 미터쯤의 분지에 위치해 있다는데, 이 전망대는 남쪽의 산에 있다. 자이승은 오래 전 어느 스님의 이름인데, 수행이 높은 전설적 인물이라고 한다.

이 전망대는 몽골 수도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외국 관광객은 물론 몽골 사람들도 많이 찾는다고 한다. 버스를 타고 중턱까지 올라가 거기서 108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이름은 전망대이지만 실상은 소련에서 2차 대전 종전 후 지어준 전승 기념탑이다. 원형으로 된 그림들은 독일, 일본 등의 침략에 맞서 소련과 협력하여 싸운 역사적 사건들을 형상화해 놓았다.

▲ 자이승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트로

위에서 내려다본 경관은 강과 산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었으나 자본주의화 이후 난개발로 어지러운 공사 현장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어 자본주의의 폭력이 여기서도 위력을 발휘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전망대 바로 근처에 푸른 천이 깃대에 걸린 돌무더기 성황당이 있었고, 아래로는 커다란 부처님 상이 서 있는 불교공원이 보이기도 했다. 독수리를 손에 들고 3달러를 내면 같이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권유하는 현지인도 있었다.

다시 버스를 타고 내려와 근처의 대암 이태준 기념관에 들렀다. 이름만으로는 소설가 이태준과 혼동할 수 있으나 그는 세브란스 의전을 졸업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로 동명이인이다. 몽골 마지막 국왕의 주치의를 지낸 인연과 연세대 의대 측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이 부지를 희사 받아 작은 기념관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는 현지에서 의사로 활동하면서 일제 강점기 때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금을 모아 전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친 공로로 우리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는 1921년 일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러시아 측에 의해 38세의 나이에 피살되었다.

▲ 이태준 기념관

기념관은 조촐한 규모의 게르 형태로 그의 생애와 활동을 정리하여 전시하고 있었는데, 디지털화된 역동적인 요즘 기념관의 전시 형태와는 달리 조용하고 가라앉은 분위기였다. 밖에는 묘비와 무덤도 있었으나 실제 시신은 이곳에 없다 한다.

커다란 추모비와 건립 경위를 새긴 비석들이 오히려 위화감을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산책로도 마련되어 있으나 풀이 많이 자라 발길에 차이는 등 정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근처의 불교 공원과 함께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 이태준 묘비와 무덤

다시 시내로 이동하여 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울란바토르 시내에만 한국 음식점이 80개가 넘는다고 한다. 그만큼 한국인이 많이 온다는 뜻일 게다. 오는 길에 가이드가 설명한 바에 다르면 몽골 인구는 현재 280만 명이고, 학교는 초중고를 구분하지 않고 12년 동안 공부하게 되어 있으며, 대학은 건물 하나만 있어도 개교가 가능해 사립대학이 셀 수 없이 많다고 한다.

경제 성장이 아주 빠르게 진행되어 연평균 성장률이 17%에 이른다고 자랑을 하는데, 그게 축복인지 재앙인지는 모를 일이다. 빠른 산업화로 인해 도시 곳곳이 공사판이고, 차량도 폭발적으로 증가해 교통난도 심하다고 한다.

▲ 이태준 추모비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 나라는 자동차 생산이 안 되기 때문에 주로 외국 중고차를 많이 수입하는데,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는 차와 왼쪽에 있는 차가 도심에서 함께 운행되고 있는 점이다. 그래도 별 문제가 없다니 이 나라 사람들이 운전을 잘 해서인가, 아니면 성격이 느긋해서인가.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투숙했다. 5성급 호텔은 전국에 하나밖에 없다고 하니 시설 좋은 호텔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우리나라 여관 정도의 수준이다. 우 교수와 한 방을 쓰게 되어 그나마 낯선 사람들과 지내야 하는 불편이 좀 덜어져 다행이었다. 
    
바뀐 낯선 잠자리 탓에 깊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며 두어 번이나 깼다 잠들기를 반복하다가 모닝콜이 울리기 한참 전에 일어났다. 같은 방을 쓰는 우 교수는 내가 잠들기 전까지 무언가를 기록하고 정리하다가 잠들었는데도 나보다 더 먼저 일어나 산책을 하고 방에 돌아와 글을 쓰는 모습을 보였다.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건강과 부지런함이 우연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가 지정한 시각까지 기다렸다가 1층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이미 다른 일행들은 식사를 마친 상태였다. 남아 있는 음식 가운데 빵과 계란 하나, 야채 조금, 소시지 한 조각 등으로 간단히 한 끼를 넘겼다.

▲ 몽골의 옛 궁전 모양을 한 호텔 몽골리아

짐을 놔 둔 채 내려와 9시에 버스를 타고 약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는 호텔몽골리아를 찾았다. 여기는 울란바토르의 서쪽으로 부자들이 땅을 많이 소유하고 있고, 주로 여름 별장으로 많이 이용되고 있다고 한다. 가는 길에 도로 양 옆으로 밭이 많이 있었는데, 주로 야채와 과일 등을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이 나라는 요즘 경제 발전이 이루어져 국민들이 유기농 재배를 한 채소를 선호하는 까닭으로 그런 농산물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한다. 비닐하우스도 몇 곳 보였는데, 그 중 하나에는 한글로 농장 이름이 쓰여 있기도 했다. 호텔몽골리아는 몽골 전통을 살리면서 현대적 감각의 시설을 겸한 고급 호텔이다.

몽골의 옛 궁전 모양을 한 건물이며, 금속으로 만들어 세운 나무 모양의 상징물, 게르 형태의 숙박 시설, 거기에 요즘 젊은이를 위한 캠프파이어 시설, 현대식 춤과 노래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 등이 어우러져 전통과 현대가 잘 조화된 모습이었다.

또 넓은 초원과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소와 말, 무성하게 자란 큰 나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흐르는 풍부한 수량의 도르 강 등의 자연 경관이 잘 조화되어 매우 아름다웠다. 그래서 여기는 요즘 젊은이들의 결혼식 장소로 아주 인기가 높다 한다.

▲ 몽골의 옛 궁전 모양을 한 호텔 몽골리아

다만 비용이 많이 소요되어서 부자가 아니면 이용하기가 어렵다 하니 세상 어디를 가나 빈부의 차이는 있게 마련인가 보다. 우리가 갔을 때도 어느 젊은이들의 결혼식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당사자는 물론 하객으로 온 사람들도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있어서 흔히 볼 수 있는 몽골 사람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 보였다.

강변 쪽으로 나가 보니 앞과 옆의 산과 잘 어울리는 매혹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물은 매우 맑아 투명한 상태로 물밑에 있는 모래와 자갈이 유난히 반짝여 보였다. 산 위에 서서히 맴돌고 있는 독수리인지, 매인지 새 몇 마리는 운치를 더했다.

넓게 펼쳐져 있는 초록의 풀밭과 풍만한 여인의 살결처럼 기름진 잎을 매달고 있는 나무, 그리고 아이 피부처럼 생기 있고 고운 물빛, 그 위에 비치는 역동적인 강렬한 햇볕,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울려 자연의 아름다운 하모니를 연출하고 있었다.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부부가 작은 의자를 물가에 놓고 나란히 앉아 한가롭게 물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었다. 온갖 풍상을 다 겪고 말년에 이런 아름다운 곳에 와서 휴식과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자연 그 자체라고 해도 틀린 게 아닐 것 같았다. 결국은 사람이 바로 자연이고 또 자연이 곧 사람의 모체 아니던가.

그러나 거기서 한 발자국 옮겨 호텔 밖으로 나오면 먼지가 풀풀 날리는 혼잡한 도로 바로 옆에 자본주의 침략의 첨병으로 여겨지는 코카콜라 상점이 위압적으로 거리를 점령하고 있고, 고급 자전거를 탄 젊은이들의 요란한 장비와 고가의 옷이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들과 혼재해 있다.

그것은 마치 호텔 앞 한 구석에 돌무더기를 쌓아 만든 서낭당의 낡고 찌든 깃발과 그  옆에 주차되어 있는 고가의 외제 자동차처럼 이질적인 모습이기도 했다. 그게 바로 오랜 사회주의 시대를 청산하고 막 자본주의 길을 걷고 있는 이 나라의 현실이기도 했다. 우리도 그런 시절을 겪은 게 바로 얼마 전이지 않은가.

▲ 국제학술회의가 열린 몽골 국립대학

다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한식으로 점심을 먹고, 몽골 국립대학으로 향했다. 몽골  유일의 국립대학이라는 이 대학은 캠퍼스가 단과대학 별로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다는데, 우리가 행사를 진행할 곳은 그 중의 하나로 국제학술회의가 자주 열린다는 대강당이다.

안으로 들어가자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입구의 육중한 문이 높은 학문 연구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2층으로 올라가니 넓은 회의실은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자리마다 마이크 시설이 되어 있었다.

앞에는 발표자와 사회자가 사용할 탁자와 컴퓨터가 설치되어 있고, 원형으로 된 몇 줄의 방청석 뒤로는 빙 둘러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뉴턴,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현대의 아인슈타인까지 인류 역사상 걸출한 업적을 남긴 학자들의 초상이 조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1시 반부터 우리의 이번 몽골 방문 목적인 본 행사가 시작되었다. 홍 이사장의 개회사에 이어 몽골 국립대학 총장인 아 갈트바야르의 축사를 부총장이 대신 읽었다. 그리고 아유시 보양자야 몽골문인협회 회장이 축사를 했다.

몽골국립대학 아시아어학과 고트브 에르덴치맥 교수가 우리말은 몽골어로, 몽골어는 우리말로 통역을 했다. 양국의 참석 문인을 소개하는 순서로 개회식이 끝나고 곧 주제 발표가 이어졌다.

한국 측에서는 김석환, 채길순, 우한용, 유철상 교수와 내가 논문 발표를 했고, 몽골 측에서는 첸드 아유시 보양자야 몽골문인협회장, 데 바야스 갈랑 몽골과학 아카데미 언어연구소장, 야 바야라 몽골 국립 뉴스 에이전스 기자, 베 다이야리 몽골과학 아카데미 언어연구소 연구원 등이 논문 발표를 했다.

중국과 우즈베키스탄 학자는 부득이 참석하지 못해 사회자가 그들의 논문 요지를 발표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모든 발표에 양국 언어로 통역을 해야 했기 때문에 내용을 요약하여 한다 해도 예정된 시간보다 훨씬 늦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 국제학술회의 장면

발표가 끝나고 나서 토론자들이 발표 내용에 대한 질문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다 하는 바람에, 그 답변을 듣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거기에다 방청석에서도 몇 사람이 질문을 해서 시간은 더 지체되었다.

그렇게 1부와 2부 행사를 진행하고 나니 8시가 거의 다 되어 참석자들이 지치기도 하고, 매우 지루하기도 했다. 현장 참석자들의 질문을 식사 시간으로 미루자는 사회자의 제의에도 굳이 마이크를 잡고 말하려는 사람 때문에 회의 시간은 더 지연되기도 했다.

통상의 학회라면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프로그램을 신축적으로 운영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한 순서도 거르지 않고 꼬박 절차대로 진행하면서 모든 내용을 통역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중간에 밖으로 나와 화장실도 가고, 우리나라에서 가지고 간 믹스 커피도 마시고 했지만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오랜 시간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게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3부 순서에서는 한국 측에서 참석한 시인들의 자작시 낭송과, 논문 발표나 토론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의 애송시 낭송, 그리고  몽골 측에서 참여한 여러 시인들이 자신의 시를 낭송했는데, 언어 때문에 그 내용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시의 리듬은 언어를 넘어 세계적으로 공통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장시간의 행사를 마치고 식당으로 이동하여 몽골 전통 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몽골 문인들과 한국 문인들이 서로 섞여 앉아 술을 마시고, 표정과 몸짓으로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하면서 우의를 다졌다.

거기서 우리나라에도 작품이 번역되어 있다는 소설가 고나잡 아르요잔이라는 사람을 소개 받았는데, 말이 통하지 않아 영어로 간단한 대화를 나눈 외에 깊은 대화를 나누지 못해 유감이었다.

우리가 식사를 하는 동안에 몽골 음악을 공연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마두금을 비롯한 연주와 노래를 불렀는데, 목과 가슴, 배에서 각기 내는 소리로 노래하는 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음식은 좀 역한 냄새가 나서 내 구미에는 맞지 않았다. 술도 마시지 못하니 더 그런 것 같았다.

참석자 중에 오늘 생일을 맞는 분이 있어 주최 측에서 미리 케이크를 사다가 준비하여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깜짝 축하를 하기도 했다. 여기는 일몰 시각이 9시 반쯤 되어 우리 시각으로는 10시가 넘어도 어둡지가 않다. 호텔로 돌아와 온종일 피곤에 지친 몸을 간단한 샤워로 씻어내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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