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공주대 조동길 교수 몽골 답사기

아침 일찍 일어나 1층 식당으로 내려가 간단한 요기를 하고, 다시 방으로 올라와 짐을 꾸려 로비로 내려와 체크아웃을 한 후 버스에 올랐다. 어제 강행군으로 행사를 진행한 피로가 좀 남아 있긴 했지만 준비한 프로그램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차질 없이 잘 소화한 홀가분함이 나를 비롯한 회원들의 발길을 가볍게 했다.

▲ 몽골의 광활한 초원의 모습

사회자의 말대로 시간이 지루하고 피로하다고 해서 일부 프로그램을 생략하고 축소했더라면 찜찜함이 남아 있을 수도 있을 텐데, 참가자 모두 논문 발표, 토론 질의, 자작시 낭송 등 자신의 역할을 한 번 이상씩은 수행했으니, 우리 여행이 단순히 놀러 온 게 아니라는 게 확실하게 증명되어 마음이 가벼운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포함하여 이번 참가자들 모두 몽골 여행에서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광활한 초원과 밤하늘의 선명하고 커다란 별을 보는 일이다. 참가자들 대부분이 글 쓰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작품 창작에 그런 대자연의 이색적 체험은 좋은 모티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나라 방문이 처음이지만 포럼의 대표와 기존 회원들은 이미 여러 번 다년간 적이 있다 한다. 그들은 초원에서 보는 별이 주먹만큼 크다느니,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낮게 떠 있어 별을 딴다는 말이 실감된다느니, 우리나라에서는 도저히 볼 수 없는 장관이라느니, 그런 경험담을 풀어 놓아 처음 참가한 사람들의 기대를 부풀렸다.

시내 외곽으로 나와 대형 할인점에서 필요한 공동 물품들을 몇 가지 구입하고, 곧 초원을 가르는 가느다란 강줄기 같은 도로에 접어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산 같은 게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풀이 자라는 끝없는 벌판, 아스라한 지평선이 버스 차창 밖으로 이어진다.

어쩌다 나지막한 구릉이 가끔씩 보이기는 하나 양과 소와 말이 풀을 한가로이 풀을 뜯는 초원은 눈 길 가는 끝까지 거칠 것 하나 없이 펼쳐져 있다. 이런 초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기에 시력이 좋아 4.0까지 되는 사람도 있다는 게 틀린 말이 아닐 것 같았다.

눈만 뜨면 매일 멀리까지 바라보며 가축들을 살펴야 하고, 또 공해나 시야를 가리는 인공적인 게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이드의 농담조 말에 따르면 유목민의 아이가 아침나절 멀리 바라보며 ‘저기 아버지 오네.’ 했는데, 점심 때 아버지가 도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한다.

▲ 풀이 자라는 끝없는 벌판

많이 과장된 말이겠으나 그 만큼 시력이 좋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노인들은 까마득히 먼 구릉에 있는 자기 소유의 소나 말을 잘 알아본다고 한다.

한참을 달리다가 도로 양 옆으로 유채꽃이 피어 있는 곳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유채꽃 밭의 규모도 어마어마해서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지평선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들이 돌보며 가꾸는 게 아니라 그저 밭에 씨를 뿌려놓기만 한 것이라 자연히 꽃은 우리나라 것처럼 탐스럽지는 못하다.

줄기도 가느다랗고 꽃도 한두 송이씩 애잔하게 매달렸다. 그래도 앉아서 바라보면 노란 꽃들의 물결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게 그야말로 장관이다. 거기서 사진도 찍고, 우스갯소리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 지평선을 이루고 있는 유채꽃밭

2차선의 도로는 포장이 되어 있기는 하나 군데군데 웅덩이가 패여 있는데도 많고, 울퉁불퉁해서 차가 빠른 속도로 달리지 못한다. 도로 공사를 중국 측 업체에서 했는데, 비용을 많이 들이지 못해 자재도 좋은 걸 쓰지 않은데다 급히 해서 그렇다 한다.

또 겨울이면 도로가 얼었다 녹기를 반복해 계속 보수 공사를 하는데도 이 모양이라 한다. 산이나 강이 없는 평지이기 때문에 도로는 거의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 도로 끝이 아득하게 먼 곳에서 소실점이 되어 사라지는 광경이 신기했다. 처음 볼 때는 그 광활 무변의 초원에 감탄을 했지만 가도 가도 변함없는 모습이 계속되니 지루하기도 하고 시큰둥하기도 해서 눈을 감고 잠을 청하기도 했다.

한참을 졸다가 눈을 떠도 여전히 똑 같은 모습이 지속된다. 그 넓은 초원에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는 게 이해하기 힘들었다. 일부러 심지 않아도 저절로 날아온 씨앗이나 물에 떠내려 온 나무들이 잘 자라는 우리나라 사정과는 너무도 차이가 컸다. 그러나 가까운 곳에 아예 나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씨알머리 하나 없으니 어디서 씨가 날아올 가능성도 없고, 또 물에 떠내려 올 강이나 시내도 없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 엘승타스허에서의 낙타타기 체험 모습

몇 시간을 달려도 쉴 만한 나무 하나 없으니 가장 어려운 건 생리 현상의 처리다. 중간 중간에 사회자가 차를 멈추고 재치 있게 도로를 양쪽으로 나누어 ‘남좌여우’ 하면 남자는 왼쪽, 여자는 오른쪽으로 나뉘어 용변을 해결했다. 사람도 대자연의 일부이니 벌건 대낮에 부끄러운 곳을 내 놓고 배설을 해도 창피하거나 거리낄 것이 없다.

문명 세계에서나 예의나 제도가 필요한 것이지, 바람과 햇볕과 풀들만 무성한 자연 속에서 무슨 염치나 의리가 작동할 것인가. 저 원시의 광야에서는 사람 또한 한 점의 바람이나 한 덩이의 돌에 지나지 않는 것, 자연과 인간이 하나 된 이 공간에서 더 이상의 거드름이나 자만심은 한낱 흘러가는 구름 조각 같지 않겠는가.

가는 길에 휴게소도 없고, 식당도 없기 때문에 아침에 출발할 때 도시락을 주문하여 차에 싣고 왔는데, 그늘을 찾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햇볕이 내려쬐는 풀밭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몇 시간을 흔들리는 버스를 타고 왔으니 출출했지만 풀이 듬성듬성한 맨땅에 앉아 밥을 먹는 게 우리 경험으로는 낯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도 1시가 넘은 시각이라 배가 고파 도시락을 펼치고, 각자 가지고 온 밑반찬을 꺼내 밥을 먹었다.

▲ 낙타타기를 타고 모래언덕을 넘어가는 일행들의 뒷모습

예전 농사지을 때 들판 논둑에서 먹던 밥 생각이 났다. 밥도 먹고, 풀냄새도 먹고, 땅에서 올라오는 메마른 열기도 먹고, 짐승들 분뇨 냄새 섞인 바람도 먹고, 머리통에서 뜀뛰다 흘러내린 햇볕도 먹고, 흥겨운 농담의 웃음까지 먹다 보니 어느 새 배가 불러왔다.

점심을 먹고 다시 출발했는데, 가이드는 식곤증으로 깜빡깜빡 조는 우리들에게 직업의식인지 몇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몽골은 남녀 비율이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이야기, 농사는 밀이 가장 잘 된다는 이야기, 학교 방학은 6월에서 9월까지 석 달이라는 이야기, 밀  농사 수확 때는 학생들이 동원된다는 이야기, 국립대학 학비가 사립대학보다 훨씬 비싸다는 이야기, 원유가 나기는 하는데 정유공장이 없어 전량을 러시아로 수출하고 대신 휘발유와 경유를 수입해다 쓴다는 이야기, 1991년에 민주화가 되면서 여권이 처음 생겼다는 이야기, 여권이 생기면서 이혼율이 급증했다는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반수면 상태에서 들었다.

저녁 무렵이 다 되어 엘승타스허(모래의 단절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라는 곳에 도착했다. 280킬로의 거리를 거의 종일 온 셈이다. 여기는 고비사막의 서쪽 끝으로 모래사막이 약 80킬로 이어지는 유명한 관광지다. 버스에서 내리니 아주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 속에 모래가 섞여 있어 얼굴을 때리니 따끔거릴 정도로 아프다.

▲ 엘승타스허에서의 낙타타기 체험 모습

우선 바람을 피해 전통 게르 안으로 들어갔다. 게르 내부는 세 방향으로 침대 겸 앉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데, 입구에서 보이는 정면이 주인의 자리이고 그 양 옆으로 손님이 않는 자리라고 한다. 입구에서 주인 자리 쪽으로 가는 방향에 나무 기둥이 두 개 서 있는데, 절대로 그 사이를 통과하면 안 된다고 한다.

주인 자리 뒤에는 향 피우는 도구와 사진을 넣은 액자, 소중한 물건 등이 놓여 있다. 주인 여자가 손님인 우리를 위해 치즈를 말린 과자 같은 것, 딱딱한 비누 같은 요구르트 덩어리, 그리고 유제품으로 만들었다는 차 같은 것(마유주)을 내 놓는다. 모두 내 비위에는 안 맞는 것들이라 맛만 보다가 말았다. 낙타가 열 마리뿐이라 안에서 열 명이 대기하고, 나머지 열 명이 먼저 낙타를 타는 체험을 하기로 했다. 밖에는 여전히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

안에서 한참을 기다렸더니 먼저 낙타를 탔던 사람들이 돌아왔다. 우리 차례가 되어 밖으로 나가니, 주인이 앉아 있는 낙타에 타도록 도와준다. 안장은 있으나 손에 잡을 게 마땅치 않은데 낙타의 혹을 잡으라고 한다. 내가 탄 낙타는 큰 놈이 아닌데도 일어서니 꽤 높은 위치라 좀 불안했다.

▲ 전통 게르안의 모습

꼬마 아이 하나가 내가 탄 낙타와 다른 사람이 탄 낙타 두 마리의 고삐를 잡고 이끌었다. 낙타 두 마리의 간격을 벌려야 하는데 딱 붙여서 끌다 보니 발걸이에 걸린 쇠가 맨살에 닿아 좀 아팠지만 동행한 사람이 여성이라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풀밭을 지나 모래 언덕을 넘어 낙타가 앞으로 가는 동안 강한 바람이 불어 연신 모래를 얼굴에 뿌려 눈을 뜨기 어려웠다. 여자들은 스카프 같은 것으로 얼굴을 무슬림처럼 감싸 눈만 내놓고 모래 바람을 피했다. 원래는 한 시간 동안 낙타를 타기로 했으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 모래 언덕에서 사진을 찍고 나서 바로 돌아왔다.

낙타야 사람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겠지만 사람들의 돈벌이에 동원된다는 게 기분 좋을 리는 없을 것 같았다.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내리면서 나를 태워준 낙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40여 분 동안 나를 태워준 동물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였다.

거기서 다시 나와 이동을 하는 동안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이런 비가 내리는 게 아주 드문 일이라 사람들이 비가 내리면 아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잔뜩 기대했던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줄곧 내리는 비가 좀 야속하기도 했다. 30여 분을 더 가서 몽골제국의 13세기 경 수도였던 곳에 도착했다. 거기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당시의 것은 아무 것도 없고, 그 터전을 발굴하여 몇 가지 유물들을 찾아냈다 한다.

우리는 초원 위에 마련되어 있는 관광객용 게르에 투숙했다. 우리가 들어간 게르는 한 채에 3인이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한 가운데 난로가 놓여 있고, 주위로 침대 세 개가 달랑 ㄷ자 모양으로 놓여 있는 아주 단순한 구조였다.시설은 별로 좋지 않아 흐릿한 전구 하나가 천정에 매달려 있을 뿐 전열기가 전화조차 없다.

바닥에 깔린 오래 되어 너덜너덜한 카펫 주위로는 맨땅이 드러나 있고, 낮은 천정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였다. 공동 화장실과 샤워 실은 숙소에서 좀 거리가 떨어진 별도 건물로 되어 있었다. 비가 계속 내려 우산을 쓰고 화장실에 가 보았더니 좁고 시설도 안 좋은 데다 일본과 서양의 여러 외국인들이 뒤섞여 상당히 혼잡했다.

식당 또한 별도 건물로 되어 있는데, 비를 맞으며 거기로 가서 양고기와 야채 중심으로 된 저녁밥을 먹었다. 독한 술로 비위에 잘 안 맞는 음식 냄새를 중화시키지도 못하는 나는 음식마다 고추장에 버무려서 간신히 끼니를 때웠다. 밥을 먹고 나서 샤워는 엄두도 못 내고, 발도 닦지 못한 채 간신히 양치질만 하고, 얼굴에 발랐던 썬 크림만 겨우 닦아내는 정도로 끝냈다.

문명 세계에서 온 우리야 하룻밤 불편하게 지내면 그만이지만 여기 사람들은 평생을 이런 곳에서 살아오면서도 그 삶이 단절되지 않았으니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다. 하기야 요즘 우리의 서양식 문명이라는 게 언제 적 것이던가. 불과 백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조상들 또한 이보다 못한 환경에서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러고 보면 나를 포함한 사람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한 존재인가 보다.

비는 밤이 되어도 그치지 않았다. 게르 지붕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예전 시골집에서 창호지 문에 떨어지는 소리와 꽤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부름하는 아이들이 난로를 피워 주고 갔으나 나무가 푸석하여 금세 타 버리는 바람에 난로 불을 관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같은 방에 투숙한 교장 선생님이 섬세하고 꼼꼼한 성격이라, 모두 잠든 시각에 심부름하는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또 전화도 없는 상황이라 누구에게 연락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는데, 휴지를 불쏘시개로 꺼진 난로 불을 용케도 살려내 새벽의 추위를 면할 수 있었다. 이래저래 여러 분의 덕을 보고 사는 처지가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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