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공주대 조동길 교수 몽골 답사기

아침에 일어나니 비는 여전하다. 비를 맞으며 화장실로 가니 사람들이 북적여 얼굴에 물을 찍어 바르는 고양이 세수로 대신하고, 면도도 못한 채 식당으로 갔다.

▲ 에르덴조라는 사원 입구

외국인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식탁에 앉아 있었다. 아침 식사는 이 나라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는 빵과 야채 몇 조각의 초 간단 메뉴다. 할 수 없이 주최 측에서 준비해온 평소에는 멀리 했던  컵라면 한 개를 얻어다가, 옆에 앉은 여자 분이 고맙게도 포장을 뜯고 끓는 물을 부어 먹을 수 있게 해 주어 그것으로 허기를 달랬다.

심부름해주던 아이들이 줄 지어 손을 흔들어 주는 숙소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잠시 이동하여 에르덴조라는 사원을 찾았다. 입구 앞에는 열악한 수준의 주차장이 있었고, 그 반대편에는 가건물 형태의 조잡한 컨테이너 형태의 기념품 가게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었다.

허름한 옷을 입은 사람 몇과 아이들이 관광객을 대상으로 물건을 팔려고 따라다니는 모습은 후진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많은 외국인이 찾는 유명 관광지인데도 아직은 그 인프라나 지원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현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문화라는 게 역시 그 나라 경제 수준과 비례하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이곳은 예전 몽골 수도가 있던 곳에 건립된 유서 깊은 사찰인데, 가로 세로 4백 미터 부지 안에 크고 작은 건물과 각종 시설이 들어선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던 대규모 사원이다.

사원은 사방이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되어 있는데, 그 담장에는 정해진 규격에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곳곳에 하얀 색의 망루 비슷한 것이 서 있어서 위압감을 줄 정도였다. 그 망루 같은 것은 탑으로 모두 108개라고 한다. 이렇게 내부와 외부가 철저히 분리되어 있는 모습은 아마도 성스러운 공간과 세속적인 세계를 구분해 놓으려는 목적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아주 좁은 작은 문을 통과해야 한다. 문 위에는 몽골 문자로 쓰인 현판과 무언가를 상징하는 조각이 붙어 있었다. 우리가 안으로 들어가려 할 때 그 문 앞에서 한 소년이 맨땅에 무릎을 꿇고 문짝에 손을 얹은 채 무언가 간절하게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진지함과 경건함이 새삼 종교적 신성성을 말없이 대변하는 것 같아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 소년이 기도했던 내용은 무엇일까. 가족의 행복과 건강, 자신의 장래 소원, 아니면 세상 모두의 평화? 물어보지 못했으니 알 수는 없지만, 그 소년의 소망대로 모든 게 이루어지기를 나도 함께 기원하는 마음이었다. 인종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한들 사람 사는 세상에서 사람이 원하는 거야 다 비슷한 거 아니겠는가.  

안으로 들어가 보니 밖에서 기대했던 사원의 모습과는 딴판이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 서 있던 자리에는 잡초만 무성하고, 일부 건물이 남아 있는 부분을 제외한 전 지역에 발굴된 기와 조각을 모아 놓은 무더기와 주춧돌 몇 개만 쓸쓸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길옆에 거의 마모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가 새겨진 오래된 돌 비석만이 예전의 영화(榮華)를 상징하는 듯 추레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거대한 제국의 대표적인 사찰이 왜 이렇게 몰락했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종교를 인정 않는 사회주의의 야만적 횡포가 이 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무자비하게 파괴한 것이다.

1930년대 사회주의 시대에 이 사찰은 거의 대부분이 파괴되었는데, 당시 여기서 수도하던 승려 2천여 명도 한꺼번에 학살당했다고 한다. 도대체 이념이 무엇이고 권력이 무엇이던가. 결국은 평화 속에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경쟁의 도구 내지 제도에 불과한 것 아니던가.

그것을 악용하여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한 줌도 안 되는 욕망의 화신들, 그들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또 희생되었던가. 시간을 지내놓고 보면 막강한 권력이라는 것 또한 허망하기 그지없는 한 줌의 모래나 흘러가는 물과 같은 것,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오늘도 동분서주하며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어리석은 무명 중생들의 벗어날 길 없는 숙명이던가.

이런 안타까움은 비단 이 나라, 이 사찰만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서고금이 모두 마찬가지일 게다. 황폐화된 사찰을 바라보며 이런 상념에 젖어 있는 우리 또한 아직 허망한 이념의 굴레에 매여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아 있지 않은가. 누구를 탓하고 백안시할 일이 아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는 이 사원은 여기저기서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었는데, 인력이나 예산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서인지 작업 진행은 지지부진한 모습이었다. 발굴이 끝난 곳곳에서는 일부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고, 현재는 국가에서 이곳 전체를 불교박물관으로 지정하여 활용하고 있다고 한다.

건물 한 곳에서는 몇몇의 승려들이 신자들을 맞아 기도를 위한 시주를 받기도 했다. 또한 수행과 명상을 중심으로 한 전통 불교를 다시 회복하려는 움직임도 있다고 하는데, 사원 안에서 만난 몇 승려의 진중한 행보는 그걸 상징하는 듯도 했다.

다행스럽게도 한쪽의 사원 건물들은 파괴되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그 사찰 건물은 우리에게 익숙한 그런 모습은 아니었다.

해설사가 나서서 몇 가지 설명을 하고 가이드가 통역을 했는데, 세 건물에 각각 전세와 현세, 내세의 부처님을 모셨다는 설명은 그런대로 이해할만 했지만 우리에게 낯선 라마불교의 흔적과 현지의 전래 신앙인 샤머니즘을 습합한 모습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질감을 주기도 했다.

물론 사람 사는 곳마다 그 방식이 모두 다르고 또 생각하는 게 차이나는 법이니, 우리 식으로 보아 이질감이니 뭐니 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일지 모른다. 마땅히 섣부른 문화절대주의 관점에서 벗어날 일이다.

부처님 앞의 시주함에 가득히 쌓인 시주금은 이 나라 사람들의 간절한 기원의 상징일 테니 까짓 제도나 형식 같은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저 간절한 마음 하나면 될 테니, 그 마음 밖에 무엇을 더 따질 일이 있는가. 그래서 부처님도 일체유심조라고 가르치시지 않았던가.

법당 안에서 특이했던 것은 우리나라 불상과 달리 모든 부처님들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되어 있는 점이었다. 아마도 여기 차가운 기후 같은 것과 관련된 현지화 된 모습이 아닐까 싶었다.

또 한 가지 우리와 다른 특이한 것은 법당의 구조인데, 중국 사찰과 마찬가지로 신발을 신고 들어가게 되어 있는 것 외에 사방이 회랑 식 복도로 되어 있는 점이었다.

그 출발점에서 큰 징 같은 악기를 한 번 크게 울리고 소원을 말한 후 이 복도를 한 번 돌아오는 동안 그 소리가 그치지 않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이 있었는데, 일행 중 몇 명은 그 체험을 하기도 했다. 인종과 종교와 문화를 넘어선 공통되는 신앙의 한 형태일까.

그 세 채의 건물에서 계단을 내려오면 좌우로 건물이 몇 채 남아 있는데, 우리로 치자면 요사 채 비슷할 그 부속 건물 안에 들어가 보니 몽골의 전통 신앙과 관련된 오래된 그림들이 벽에 걸려 있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어떻게 되는지 사후 세계를 그려 놓은 것도 있고, 이 나라의 특이한 동물과 자연의 모습을 신앙 형태로 해석하여 그려 놓은 것들도 있었다.

그 중에 장례 풍속을 그려 놓은 것도 있었는데, 새들에게 시신을 먹이로 먹히는 것은 망자가 천국에 간다는 것을 뜻하고, 개나 늑대에게 먹이로 제공되는 망자는 지옥에 간다는 뜻한다고 했다.

▲ 초원에서 만난 풍경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이들 나름의 신앙을 보여주는 그림들도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인도에서 보았던 힌두교 풍속과 유사한 것들도 있어서 종교라는 게 전파되다 보면 당연히 그 현지의 풍속이나 신앙과 결합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떠오르게 했다. 

사찰 관람을 마치고 이른 시각에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귀환 길에 올랐다. 350킬로의 거리를 저녁 무렵까지 가야 한다고 한다. 어제 올 때와 마찬가지로 끝이 안 보이는 망망한 초원에 난 길로 무미건조한 주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미리 질리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허름한 휴게소에 들러 점심을 먹었다. 몽골 전통 음식을 네 가지 시켜서 조금씩 맛을 보라고 하는데, 양고기와 쇠고기를 재료로 요리한 국수나 국물이 썩 입맛에 당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먹어야 산다는 생각에 그나마 역겹지 않는 음식 몇 가지를 일행들이 가지고 온 장아찌와 고추장 등으로 입맛을 달래며 한 끼를 때웠다.

단조로운 풍경이 연속되기는 했지만 굳이 시간에 맞춰 일정을 서둘러야 할 필요가 없으니 여유만만하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양이나 말이 모여 있는 곳이 있으면 차를 세우고 한참씩 구경하면서 쉬기도 했고, 물이 보이면 또 멈추어서 의자에 앉아 있느라 지친 다리를 풀어 주기도 했다.

맥주를 드신 분들이 용변 욕구를 말하면 아무 데나 차를 세우고 대자연 풀밭에 소변 공양을 드리기도 했다. 그게 그거인 것 같은 풍경을 또 카메라에 담기도 했다.

지루한 주행 중 도로 옆에 하얀 색깔의 특이한 모습의 조각이 하나 보여 멈추었는데, 다가가 보니 코끼리 등 위에 원숭이가 앉아 있고, 그 원숭이 머리 위에 토끼 한 마리가 앉아 있고, 토끼 위에는 비둘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모습이었다.

주변에는 신성한 것을 뜻하는 푸른 천이 걸린 돌무더기와 기도를 하는 시설도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기원했는지, 향 피운 흔적과 돈을 바친 상자도 있었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모두 이 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신성시하는 동물들을 하나로 합쳐 놓은 신앙물이라고 한다.

저녁이 다 되어 울란바토르 시내로 들어와 한국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아무 하는 일 없이 자리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종일 차를 타고 온 피로가 느껴졌다.

그 긴 거리를 운전한 분도 있는데 편하게 앉아 온 주제에 피로를 말하는 게 약간 미안하기도 했지만 밥을 먹고 거리로 나오니  곳곳에 가라오케 선전을 하는 간판들이 많이 보였는데, 일본 사람이나 한국 사람만 이용하는 것은 아닌 듯했다.

자본주의가 도입되고 관광객이 많이 오면서 생긴 문화가 이제는 이 나라의 또 하나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아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엊그제 이틀 동안 묵었던 호텔로 돌아와 방을 다시 배정 받고, 하루 동안 씻지 못해 꿉꿉했던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나니 마음의 땀과 먼지까지 사라진 것 같아 개운했다. 동숙하는 우 교수가 회장님을 중심으로 하는 ‘종례’ 모임(술자리)에 참석한 사이 나도 모르게 몸이 시키는 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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