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가 쌀쌀해졌습니다. 겨울이 올 것 같지 않게 유난히 긴 장마와 계속되었던 폭염, 높은 습도도 자연의 이치 앞에는 힘을 못 쓰는 모양입니다.

예전의 여름은 덮긴 했었지만 요즘의 더위 같지는 않았습니다. 겨울도 예전 같은 명징한 추위는 아니구요. 뚜렷한 사계절을 자랑으로 여기던 우리나라도 계절이 희미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간들의 편리를 위해 자연을 함부로 대한 대가이겠지요.

왠 환경을 들고 나오느냐고요. 여기 너무도 아름다운 문학 속의 자연을 한 번 만나 보라구요. 이런 아름다움을 우린 너무 오래 잊고 살지 않았나요.

메밀꽃은 초가을에 피는 꽃이지요. 지금은 초가을의 이미지가 뚜렷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때의 초가을은 하늘이 더 높고 맑았을 겁니다. 그래서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은 한편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보는 듯합니다.

이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강원도 봉평 장터에서 대화까지의 밤길입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봉평 장터에서 대화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입니다. 

이효석의 작품 세계를 조금 이야기 하자면, 초반과 후반은 많이 다른 경향을 보입니다. 초기에는 도시를 배경으로 빈부의 갈등을 주로 그렸다면 후기로 와서는 향토적 작품을 많이 썼습니다. 1928년에 발표한 ‘도시와 유령’이 데뷔작이기도 합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이 맞나 싶을 정도로 도시를 배경으로 사회적 모순을 다룬 작품과 후기의 향토적 작품은 많이 다르더군요.

장돌뱅이인 허생원과 조선달, 동이가 다른 장터로 가기 위해 달 밝은 밤에 산길을 걷는 모습이 바로 눈앞에 보이듯 다가옵니다. 거대한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인간은 그저 점처럼 작아서 자연의 일부로 녹아드는 느낌이지요.

허생원은 왼손잡이이며 곰보입니다. 가정도 없이 장터를 돌아다니지만 허생원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지낸 일입니다. 그 힘든 여정에서 그 추억을 떠 올릴 때마다 그에게는 힘이 솟아오르는 듯합니다.

늘 함께 동행하는 조선달 편에서 보면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야 하는 고충도 있었을 것 같지요. 그러나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칠십 리나 걸어야 하는 이들에게 허생원이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이야기는 리듬을 타고 음악처럼 들렸을 것 같지 않으세요.

허생원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때는 달이 있는 날이었던 것 같아요.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요.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괴이한 인연도 달밤이었기 때문이라고 허생원은 믿고 있거든요.

사실 허생원과 성서방제 처녀는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이 짧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여성의 정절을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던 그 당시를 생각하면 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이 작품 속에 달빛이 강조되고 있는 것을 잘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이네요. 인간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원초적이 되는 것이지요.

결국 성서방네 처녀는 달빛이 흐드러지게 밝았던 그 하룻밤으로 인해 달도 차지 않은 아이를 낳고 시집에서 쫓겨납니다. 허생원은 평생을 그 하룻밤의 추억으로 살고요.

허생원은 달밤을 걸으며 동이의 이야기를 듣고 또 동이가 자신과 같이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의 아들임을 확인하면서 소설은 끝납니다.

그러나  이 소설의 묘미는 줄거리보다도 뭐니 뭐니 해도 ‘보름을 가제 지난달이 부드러운 빛을 흐븟이 흘리고 있었다.’ 같은 표현에 있지 않을까요. 이 작품은 읽는 것이 아니라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독서하기 참 좋은 계절입니다. 따뜻한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어진 답니다. 바깥 날씨가 추울수록 더 맛이 나지요.

우선 재미가 있는 책부터 읽으세요. 그리고 책 읽기가 익숙해지면 단편 모음집으로 된 1920-30년대 소설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책들은 지금 여러분들이 읽기에는 문화적인 차이가 많아서 재미가 없겠지만 한번쯤은 꼭 읽어야 할 작품들입니다. 참고 읽어야 해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나이 들어 ‘퍽’하고 웃음이 나오는 추억을, 생각하면 따뜻해지는 추억을 많이 만들라구요. 그것은 병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이라구요.

겨울의 독서는 분명히 훗날 따뜻한 추억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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