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공주대 조동길 교수 몽골 답사기

여행을 많이 다닌 것은 아니지만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맞는 아침은 언제나 약간 불안하고 신경이 쓰인다. 특히 아내와 동행하지 않은 경우 더욱 그렇다.

▲ 시내관광(수하바토르광장)

아내가 있으면 모든 걸 잘 챙겨 주어 그대로 따르면 되는데, 나 혼자일 경우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짐을 챙길 때 빠뜨린 것은 없는지, 밥은 언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모든 게 서툴고 낯선 것투성이다. 나이를 들어가면서 그런 증상은 더 심해진다.

아내 없이 생활한다는 게 이렇게 불편한 줄 모르고 살아왔다는 건 그만큼 아내의 존재가 소중하다는 증거 아닐까. 평소에는 느끼지 못했던 아내의 사랑을 외국에 나와서야 비로소 실감하게 된다.

아침을 간단히 때우고, 짐을 챙겨 나와 8시에 호텔을 출발했다. 오늘 첫 일정은 시내 관광이다. 처음 도착한 곳은 수하바토르 광장이다. 이 광장은 몽골 독립에 결정적 기여를 한 독립투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는데, 그 분은 몽골 화폐의 도안 인물이 될 만큼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라 한다.

현재는 광장 중앙에 말을 타고 있는 역동적 모습의 그 분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많은 몽골 사람들은 약속 장소를 잡거나 기준점을 정할 때 대부분 이 광장의 동상을 중심으로 할 만큼 일상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화 이후 사회주의 시대에 금기시되었었던 이 나라 사람들의 영원한 우상인 칭기즈칸의 강력한 등장으로 곧 이 광장의 운명도 바뀔 예정이라고 한다. 그 이름도 국제공항처럼 칭기즈칸 광장으로 바뀌고, 수하바토르의 동상도 칭기즈칸의 것으로 대체될 계획이라고 한다.

▲ 시내관광

칭기즈칸이 대제국을 건설한 영웅이고 이 나라 사람들의 정신적 긍지의 구심점에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거대한 동상을 세우고 그 이름의 광장을 만드는 것은 이들이 그토록 극복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시대의 유물이었던 레닌이나 스탈린, 북한의 김일성의 예에서 보듯 또 다른 우상화 작업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치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민중을 결집하기 위한 상징 조작으로 이용당하는 듯도 하다. 권력자들에는 그 방식이 가장 편하고 또 효과가 클 테니까 말이다.

이 광장은 울란바토르의 중심이자 국가의 주요 시설이 밀집되어 있는 요처이기도 하다. 대통령 집무실과 국회의원들의 회의실이 있는 거대한 건물을 비롯하여 사방으로 시청, 우체국, 오페라 하우스, 경찰청, 주식 거래소 등이 둘러 있고, 호텔과 다국적 기업의 주요 사무실 빌딩도 눈에 들어온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건물 중앙에는 거대한 칭기즈칸 좌상이 있어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고. 그 좌우로 좀 작은 크기의 아들과 손자의 동상도 있다. 대제국 부활의 꿈인지, 아니면 과거에 안주하려는 퇴행적 현상인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광경이 후진적 정치 행태의 단면이 아닐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은 우리의 6,70년대 풍경이나 다른 나라 권위적 통치자들의 공통된 모습 아니었던가.

그런 눈으로 보아서 그런지, 거대한 규모의 광장이나 말을 타고 있는 위압적인 동상 등이 예술적 감각이나 시민들의 접근성 내지 친연성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였다. 규모만 거대했지, 섬세한 아름다움이나 천천히 음미할만한 미적 가치는 찾아보기 어려운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생각일까.

▲ 시내관광

광장을 나와 보도로 4,5분 거리에 있는 역사박물관을 찾았다. 미술에 관심 있는 일행 중 일부는 박물관 대신 미술관 관람을 하러 따로 갔다. 역사박물관은 1층에서 3층까지 모두 10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있는데, 선사시대부터 민주화와 개혁의 시기까지 시기별, 주제별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선사시대의 유물들이야 세계 공통이니 우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고, 그 후 몽골 제국의 역사와 전통 문화, 전통 생활의 전시실이 눈길을 끌었다.

전시 유물 중 특이했던 것은 세계문화유산을 지정되어 있다는 말머리 모양의 전통 악기인 마두금, 18세 소녀의 뼈로 만들었다는 피리, 세계의 절반을 점령했을 때의 군인들이 사용했다는 등자(鐙子), 그리고 전통적으로 몽골 남자들이 꼭 지니고 다녀야 한다는 세 가지 물건 담뱃대와 젓가락과 칼, 또 여자들이 지녀야 할 다섯 가지 물건(손톱 다듬이, 혀 청소 도구, 귀 이개, 이쑤시개, 향료) 등이었다.

또 하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1921년 만주국 지배로부터 벗어나 독립을 했으나 곧 소련의 실질적 지배를 받게 되어 긴 사회주의 통치 시대를 거치면서 몽골 전통문화가 거의 다 파괴되어 버렸다는 점이다.

1991년 민주화 이후 이들은 사회주의 시대의 제도와 문화를 탈색하고 옛 전통문화를 복원하기 위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거꾸로 사회주의 시대 유물이 파괴되고 멸실되는 것을 두고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 결국은 그것도 역사의 한 부분이니 보존하자고 하여 박물관의 전시실 하나는 그런 유물로 채워져 있다.

국가 박물관이면서도 관람을 하며 아쉬웠던 것은 유물들의 허술한 관리와 전시 기법이었다. 소중한 문화재들이 관람객에게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상식적으로 사진 촬영이 안 되어야 정상인데 얼마간의 돈을 내면 마음대로 플래시를 터뜨리며 비디오와 사진을 찍게 하는 점이었다.

역시 문화의식이라는 건 경제적 수준과 비례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현재 이 나라의 1인당 지엔피가 3천 5백 불이고, 1년 경제 성장률이 17%나 된다고 자랑하는데, 그런 자랑이 이 박물관에서 부끄럽게 느껴지려면 얼마나 더 긴 시간이 흘러가야 할까.

거기서 나와 캐시미어 판매장에서 1시간 정도 쇼핑 시간을 가졌다. 일행 중에는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내가 여행 중에 물건을 사 가서 아내에게 환영 받은 적이 별로 없고, 또 집을 나올 때 제발 아무 것도 사 오지 말라는 신신당부를 받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손자에게 맞을 법한 옷 한 벌을 골라 값을 물어 보았더니 거의 100불이나 되었다. 가격은 물론이고 디자인이나 품질이 내가 보아도 마음에 차지 않는데 아내나 딸이 보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 국립박물관

다시 버스를 타고 차가 막히는 시내를 오랜 시간 동안 관통하여 테를지 국립공원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쇼핑센터나 관광지, 거리에서 조심해야 할 것이 세 가지 있다고 강조한다. 사람이 우선이 아니고 차가 우선이기 때문에 차를 조심해야 하고, 소매치기가 많으니 물건 안 뺏기도록 조심해야 하고, 자전거가 많은데 걸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의 몇 십 년 전 풍경이 바로 그런 것 아니었던가.

테를지 국립공원은 수도에서 한 시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숲과 기암괴석과 강이 잘 어우러진 이 공원 전체가 유네스코 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흔히 사막과 초원의 나라로 알려진 몽골에 이런 아름다운 자연 경관이 존재한다는 것이 직접 와서 눈으로 보지 않고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더구나 잠시만 틈을 내면 언제나 올 수 있는 대도시 바로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는 게 더욱 신기하고 놀랍다. 막연한 상식으로 알고 있던 선입견이라는 게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금세 실감하게 된다. 

공원 안으로 들어가려면 입구의 고개를 넘어 한참 더 내려가야 한다. 그래도 공원 전체가 해발 천 칠백 미터쯤의 고도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고개를 내려가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나서, 안으로 들어가자면 꽤 풍부한 수량의 강을 건너야 한다. 도르강이라는 이름의 강에는  다리가 두 개 놓여 있다.

하나는 아주 오래된 나무로 된 다리이고, 바로 그 옆에 콘크리트로 새로 지은 다리가 있다. 대부분의 차량은 나무로 된 다리가 노후하여 새로 놓은 다리로 건너가지만, 운치나 멋으로 보면 나무로 된 다리가 훨씬 더 예쁘고 아름답다.

▲ 테를지 국립공원

입구 쪽에서 눈길이 가는 것은 도로 옆에 늘어 서 있는 원색으로 된 여러 채의 목제 집들이었다. 이 집들은 소화기 질환을 가진 사람들이 찾아와 치료를 하는 곳인데, 일정 기간 여기 머물며 말 젖을 복용한다고 한다.

말 젖을 원액 상태로 먹으면 대개 설사를 하게 되어 장 청소가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건강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또 하나 특이한 것은 고개를 내려오는 도로가 경사가 급하고 커브가 심한데도 다른 곳과 달리 거기만 포장이 되어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겨울에 도로의 결빙이 심해 일부러 포장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포장을 하고 그 밑에 열선을 깔거나 염수 분사를 하는 방법도 있을 텐데, 그것은 아마도 경제 사정이 더 나아진 먼 후일의 얘길까. 고갯길을 비포장으로 남겨 둔 것이 이들의 지혜일지, 아니면 아직 덜 문명화된 결과일지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한참을 더 들어가 기이한 모양의 바위로 된 산 아래 여러 채의 흰 색 게르가 늘어서 있는 곳에 도착했는데, 여기가 우리들이 하루 묵을 숙소였다. 이런 숙소용 게르 시설이 눈에 띄는 것만도 여러 개였는데, 그만큼 이곳을 찾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로 보였다.

실제로 주말이면 몽골 사람은 물론 외국인도 많이 찾는 곳이라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숙소를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라 했다. 우리는 세 사람씩 한 채의 게르를 배정받아 안에 들어가 짐을 풀어놓고, 다시 식당으로 나와 점심을 먹었다. 메뉴는 닭고기 스테이크였는데, 고기 덩어리가 매우 커서 혼자 다 먹기 어려울 정도였다.

닭고기 맛은 우리의 토종닭 비슷했고, 양념도 순하게 되어 오랜만에 배불리 포식을 했다. 게르의 시설은 엊그제 묵었던 곳과 비슷했다. 다만 별도 건물로 되어 있는 화장실과 샤워 시설이 좀 나은 게 다행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다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말 타기 체험을 했다. 이런 승마 체험을 하는 곳도 여러 곳이 있었는데, 우리가 간 곳은 강 옆에 있는 호텔 앞의 승마장이었다.

이 호텔은 몽골에서 유일한 5성급 호텔이라고 했다. 자본주의 사회는 마르크스의 말처럼 필연적으로 빈부격차가 생기게 마련이고, 능력 있는 수단꾼들은 예외 없이 돈을 많이 벌어 호화로운 생활을 즐기는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그것은 우리나 여기나 마찬가지인 듯했다. 자본주의화 이후 이 나라에도 합법적인 부자들이 많이 생겼는데, 이들은 3시간쯤 걸리는 직항 비행기를 이용하여 제주도에 가서 골프를 치고 쇼핑을 한다고 한다.

제주도는 비자 없이 입국할 수 있기 때문에 중국이나 몽골의 신흥 부자들이 그런 호사를 누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들을 대상으로 돈을 많이 벌어서 축복인가, 아니면 자존심 상하는 재앙인가.

불과 몇 십 년 전 일본의 졸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기생관광을 즐기는 모습을 보며, 외화 획득이라는 경제적인 면과 우리 젊은 여성들이 그들의 노리개가 된다는 사실에 비분하는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는데, 이들 졸부들은 우리에게 고마운 건지 그 반대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들이 탄 말은 초원을 맹렬한 속도로 달리는 그런 상상 속의 준마들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 나라의 3대 명절처럼 알려져 있는 나담 축제 때 경마용으로 출전하는 명마 수준도 아니었다.

제주도에서 타 보았던 조랑말 수준의 작고 여윈 말들이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 파리와 먼지 속에 맨땅에 앉아 있는 게 좀 가엾고 불쌍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우리가 선택하고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니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들이 지정하는 순서대로 말 등에 올랐다. 고삐를 잡은 사람들이 인도하는 대로 말은 느린 걸음을 옮긴다. 형식적으로 고삐를 잡고는 있으나 말은 훈련된 대로 정해진 길을 가는 것 같았다.

마부 없이 가는 말들도 경로를 이탈하지 않고 다른 말들과 보조를 맞추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반복된 코스에 익숙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니 말을 출발 시킬 때 ‘추추’라고 말하면 된다고 배웠으나 써 먹을 일이 전혀 없었다. 작은 언덕을 넘어서자 발 아래로 드넓은 초원이 펼쳐졌다.

풀밭에는 게르 몇 채가 서 있고, 말과 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목가 풍의 풍경이다. 발아래에는 개양귀비 꽃과 에델바이스 꽃들이 지천이다. 아름다운 것도 너무 많으면 그 대접을 받지 못한다. 이 꽃들이 한국에 있다면 얼마나 사랑받을 것인가.

사람 또한 마찬가지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천덕꾸러기인 반면 귀한 집 아이들은 얼마나 좋은 대접을 받고 사는가. 언덕을 내려와 잠시 멈춰 유목민들의 전통 게르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구조는 먼저 보았던 것과 똑 같다. 우리를 위해 내 놓은 음료와 과자 비슷한 요구르트 말린 것도 다르지 않았다.

다시 말을 타고 돌아오는데, 내 말을 끄는 마부가 한국 노래도 부르고, 한국말도 몇 마디 해서 반가웠다. 이런 서비스는 한국인이 많이 찾는 것에 대한 보답일까, 아니면 얄팍한 상술일까.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와 말을 내려 고맙다는 뜻으로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 마부에게도 감사 인사를 했다. 공동 경비에서 팁을 준다고 하니 따로 돈을 낼 일은 없었다.

우리는 잠시 휴식을 하며 나머지 사람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함께 곧 강으로 내려갔다. 어제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물이 탁하고 수량도 많았다. 다리를 건너가니 키가 큰 나무들이 무성하고, 캠핑을 온 젊은이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 말 타기 체험

강변의 별장인 듯한 아름다운 건물들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강물과, 고목이 되어 쓰러져 있는 나무들과, 물속의 기이한 바위들이 절묘하게 어울려 환상적인 경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누구 말처럼 술 한 잔 곁들이고, 미인만 옆에 있다면 이곳이 바로 무릉도원이고 파라다이스가 아니겠는가.

카메라의 렌즈를 어디로 향해도 한 폭의 그림과 같은 이미지가 잡혔다. 한참 동안 그 아름다운 경관에 취해 있다가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오는 길에 산 위에 서 있는 기도하는 바위(혹은 책 읽는 바위)를 먼발치에서 구경하고, 길옆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야생화를 감상하고, 또 유명한 관광거리인 도로에서 좀 들어가는 곳에 있는 거북바위를 구경했다. 엄청나게 큰 바위가 평지에 돌출해 있는데, 그 모습이 거북이가 위를 향해 기어가고 있는 모양과 비슷했다.

거북이는 바다에 사는 동물인데, 바다가 없는 이 나라 사람들이 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거북이에 대해 글로 읽고 그림으로 본 이 나라 사람들의 선험적 결과일지, 그게 아니면 거북이에 익숙한 외국 사람들이 와서 붙여준 이름일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그 또한 문화의 이동과 전승의 한 현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런 모양의 바위야 우리나라에도 흔한 것이니 그리 신기할 것은 없고, 내게는 오히려 이 바위를 둘러싸고 있는 산봉우리의 바위들이 더 인상적이었다.

마치 인공적으로 올려놓은 것처럼 큰 바위 위에 작은 바위가 아슬아슬하게 놓인 돌탑 같은 게 수십 개나 연이어 둘러 서 있는 모양이 참으로 신기했다. 우리 같으면 틀림없이 그와 관련된 전설이나 유래담이 있을 텐데 여기에도 그런 게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거북바위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길이 있다는데, 거기로 올라가 보자는 인솔자의 권유에 다들 지치고 힘이 들어 아무도 응하지 않자, 그로부터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라는 악담(?)을 듣기도 했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으로 호르헉이라는 몽골 전통 식 양고기 요리를 먹었다. 돌을 불에 달구어 그것으로 고기를 익혔다고 하는데, 그 돌멩이 몇 개가 증거인 양 고기 접시에 담겨 있기도 했다. 아직 식지 않은 그 돌멩이를 꺼내 손과 얼굴 등 피부를 문지르면 좋다고 하여 몇 분은 그걸 손에 쥐고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같은 양고기인데도 요리 방식이 달라서인지 특유의 냄새가 나지 않아 모처럼 배불리 고기를 먹었다. 그러고 보면 입맛이라는 게 참으로 간사한 것 같다.

음식의 맛은 당연히 경험의 결과일 텐데,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의 맛이 구미에 맞는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설마 내가 몽골인의 유전자를 가진 후예 때문은 아닐 것이고, 그 또한 몽골 기행 영상 시청 등 간접 경험을 통한 익숙함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저녁을 먹고 났는데도 일행들은 몽골 여행의 마지막 밤을 아쉬워하며 식당에 남아 술과 담소를 그치지 않아 나 혼자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밤이 되니 한기가 느껴질 정도로 기온이 내려가고, 발길에 차이는 풀에 맺힌 이슬이 운동화와 양말을 적셨다.

아쉽게도 오늘 밤 또한 하늘이 맑지 않아 별을 보는 일은 포기할 수밖에 없다. 게르로 돌아와 칫솔과 수건을 챙겨 샤워장에 가 보았으나 시설은 좋은데 물이 나오지 않는다. 할 수 없이 양치질만 간신히 하고, 다시 게르로 와서 물 티슈 몇 장을 꺼내 아 얼굴을 닦아 내고 발까지 그것으로 닦아내야 했다.

오기 전에 읽은 글에 몽골의 사막에서는 물 티슈 한 장이면 세수를 하고, 석 장이면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게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미리 갖다 놓은 마른 나무로 난로를 피워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를 막고, 허술한 게르 벽에서 들어오는 바람은 이불과 모포로 달래며 간신히 눈을 붙였다.

잠이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그렇게 열악한 환경에서도 내가 편안하게 잠들었었다는 걸, 아침에 들은 어젯밤에 잠을 잘 자더라는 같은 방 동지들의 말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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