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조동길 공주대 국어과 교수

새벽에 눈을 뜨니 다른 분들은 곤히 자고 있었다. 그분들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밖으로 나와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어둑한 길을 걸으며 기도를 했다.

숙소 주변을 맴돌다가 여명이 밝아오는 즈음에 한참 거리인 고개까지 가 보았다. 어제 저녁에 다른 분들이 가 보았다는 곳인데, 그분들 말처럼 어디선가 검은 개 한 마리가 나타나 나와 거리를 유지하며 동행을 했다.

우리나라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어떤 분의 책에 전라도 어느 곳에 그런 개가 있다는 걸 읽은 적이 있는데, 이 개 또한 자신의 주인집에 투숙한 손님을 배려하여 그런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내가 고개 위에 멈추어 서 있으니 개 또한 거리를 두고 앉아서 기다리다가 내가 돌아오는 길에 다시 동행을 했다. 고개 위에서 바라보이는 풍경은 우리가 묵었던 곳과 유사한 모습으로 한참 동안 펼쳐져 있다.

고개 위에는 커다란 전봇대가 하나 서 있었는데, 이 나라 특유의 형태로 아래는 시멘트 기둥이고 그 위에 나무로 된 전신주가 세워져 있었다.

야생 쥐들이 나무를 갉아 먹는 걸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니, 이것은 마치 필리핀이나 동남아에서 뱀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원형이 아니라 네모나 세모 모양의 전봇대를 세우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지혜의 산물이랄 수 있었다. 역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아침 식사는 빵과 야채가 전부다. 대신 우리를 위해 식당에서 한국 라면을 끓여 놓은 게 큰 양동이에 한 통 있어서 아침부터 팅팅 불은 라면 한 그릇을 퍼다 끼니를 에웠다. 물이 시원하게 나오지 않아 간신히 양치만 하고, 짐을 챙겨서 버스에 올랐다.

하루 동안 묵었던 곳이라 그새 정이 들었는지 이곳을 떠나자니 약간 아쉬운 생각도 들었다.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라는 생각 때문인지도 몰랐다. 거기 주민 아이 하나가 우리 버스 옆에 그림을 펼쳐 놓고 팔고 있었는데, 이 나라의 초원과 가축을 그린 그 유화는 썩 좋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자기 아버지가 그린 것이라는 아이의 설명에 일행 몇 분이 한 장에 우리 돈으로 3만 원쯤 한다는 그 그림을 몇 장 샀다. 그 그림을 사지 않은 나는 다른 분들과 달리 다른 사람을 가엾어 하는 마음이 없는 냉혈한일까.

버스는 비포장의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와 도로 가에 정차했다. 거기서 길을 건너 좀 올라가면 이 나라의 대표적인 민속 신앙을 상징하는 어워(혹은 오부)가 있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어워는 우리나라 서낭당(혹은 성황당)의 유래가 된 몽골 샤머니즘의 핵심 대상물이다.

대개 고개 마루에 위치한 어워는 나그네의 이정표가 되기도 하고, 군사 목적의 방어 기능을 수행하기도 하며, 마을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 신앙의 표상이 되기도 한다.

이 어워는 상당히 큰 규모의 돌무더기로 되어 있고, 그 중심에 장대가 하나 서 있었는데 거기에는 주로 푸른색을 위주로 한 여러 색깔의 천이 걸려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우리 일행 중 몇은 가이드가 이 어워를 세 번 돌면서 돌 한 개씩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설명에 따라 주변의 돌을 주워들고 각자 소원을 빌기도 했다.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의 신빙성이야 믿거나 말거나이겠지만, 그렇게 해서 돌무더기가 유지되고 확장되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잠시나마 정화할 수 있다면 그로써 충분한 것 아니겠는가.

서양인, 일본인 등 다른 팀의 관광객들은 가이드의 영어와 일본어 설명에 따라 진지한 표정으로 돌을 들고 어워를 돌기도 했다. 이를 두고 미신이니, 미개한 풍속이니 하는 것은 문화절대주의자들의 오만한 발상에 불과할 것이다.

어디서 무얼 하든 진심에서 정성스럽게 행한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소중한 신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그곳에서 전망 좋은 고개 아래 강과 나무들이 잘 어울린 풍광을 감상하며 기념사진을 찍고, 오늘도 기분 좋고 즐거운 여정이 계속되기를 마음속으로 기원하기도 했다.

한참을 더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칭기즈칸의 거대한 동상이다. 드넓은 초원의 작은 언덕에 세워진 동상은 우선 그 크기가 엄청났다.

옛 몽골 제국의 영화를 재건하려는 이 나라 사람들의 염원이 스며들어서일까. 동상이란 그 글자 뜻대로 하자면 원래 구리로 만들어야 하나 여기 서 있는 동상은 안에 철골 구조로 형태를 만들고, 겉은 스테인리스 금속(은이라고 하는 말도 있으나 그것은 아닌 듯함)으로 입힌 구조로 되어 있다.

푸른 하늘과 흰 구름 아래 강렬한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반짝이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칙칙한 색의 구리로 만들지 않은 게 오히려 더 잘된 결과 같기도 하다.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원형 건물 위에 말을 탄 모습의 동상은 그 높이가 4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여기에 동상이 세워진 이유는 칭기즈칸이 15세의 나이로 첫 전쟁에 출정하면서 이곳에 이르렀을 때, 3미터에 이르는 금으로 된 말채찍을 얻은 곳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채찍은 동상 안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채찍과 함께 전시된 거대한 신발이 눈길을 끈다.

쇠가죽으로 만든 이 신발은 무게가 3톤, 높이가 9미터라고 하는데, 기네스북에 가장 큰 신발로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계단을 내려가면 박물관이다. 국가가 아니라 한 개인이 수집하여 기증한 몽골의 여러 시기 각종 유물 6백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여기 있는 동상도 국가에서 세운 게 아니라 개인의 기부로 이루어졌다고 하니, 몽골 사람들의 정신 속에 칭기즈칸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지 알만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까지 올라가 좁은 계단을 오르면 동상의 얼굴을 마주볼 수 있는 좁은 공간이 나타난다. 가까이에서 본 그 표정이 매우 위압적이다. 멀리 그의 눈길이 향하고 있는 곳은 그의 고향인 히티 산맥이라고 하는데, 다른 주장에 따르면 몽골 사람들이 아주 싫어하는 중국을 바라보며 그들의 진입을 막고 서 있는 것이라고도 한다.

마침 그 방향으로 좀 떨어진 거리에 새로운 동상 건립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게 보였는데, 그것은 칭기즈칸의 어머니 동상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고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 동산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면 가슴이 탁 트이는 초원의 풍경이 일품이다.

풀과 나무와 가축과 물이 파란 하늘 아래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광경은 태고의 냄새가 풍긴다. 하늘의 왕이라는 뜻의 칭기즈칸, 세계의 절반을 점령하고 호령했던 몽골 출신 테무진 청년이 꿈꾸던 세상은 무엇일까.

이 나라 사람들이 칭기즈칸을 그토록 추앙하며 회복하고자 하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단순한 정복자, 의미 없는 옛 영화의 복원, 그런 제국의 부활을 꿈꾼다면 그것은 이들을 위해서나 인류를 위해서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 인간을 무시하는 차별이 없는 세상, 평화와 인권이 살아 있는 세상, 그런 세상을 지향하고자 하는 희망이 거대한 동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는 게 많이 안타까웠다. 

동상 관람을 마치고 울란바토르로 돌아오는 길에 올랐다. 다른 곳과 달리 비교적 도로 사정이 좋아서 버스는꽤  빠른 속도로 달린다. 차창 밖으로는 밋밋한 초원과 가축들이 풀을 듣는 모습이 끈질기게 이어진다. 그래서 가끔 나무가 보이고 물이 보이는 풍경을 만나면 반갑기 그지없다.

어디쯤인가 산 중턱 멀리 흰 색의 조형물들이 조밀하게 모여 있는 게 보여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공동묘지라고 한다. 이 나라는 불교 국가임에도 화장은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여러 종족이 섞여 살기 때문에 그들만의 고유한 장례 풍속이 있어 일정하게 어떻다고 말할 수는 없단다.

아직도 조장(鳥葬)이나 풍장(風葬)을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나 대부분은 매장을 한다고 한다. 장례 얘기 끝에 가이드는 명절과 음식 등 몇 가지를 더 설명했는데, 우리로 치면 추석과 설, 그리고 전 국민적 축제인 7월의 나담 축제가 대표적 3대 명절이고, 명절 때는 새 옷을 입고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는데 우리와 달리 인사를 드릴 때는 어른에게 돈을 드려야 한다고 한다.

대신 어른들은 만두 비슷한 음식을 수천 개씩 만들어 자손들에게 나누어 준다고 한다. 나담 축제 때는 남자들의 씨름과 어린이들의 경마, 남녀가 모두 하는 활쏘기 등을 하는데, 지역 예선을 거쳐 전국적으로 행사가 진행된다.

특히 경마는 잘 훈련된 좋은 말을 예닐곱 살 된 아이들이 타고 실력을 겨루는데, 우승을 하게 되면 엄청난 부와 명예가 따르기 때문에 경쟁이 아주 심하다고 한다.

그런데 경쟁이 심하다 보니 체중이 적게 나가는 나이 어린 어린아이를 기수로 선호하게 되어 말에서 떨어지게 되면 생명을 잃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단다. 그래서 요즘엔 아예 법으로 나이의 하한선을 정해 제한하는 제도가 생겼다고 한다. 안타까운 건 우승을 해도 기수인 아이에게는 별 혜택이 없고, 모든 명예와 부는 말 주인과 훈련시킨 사람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따라서 기수로 참가한 아이의 어머니는 그저 아이가 무사히 경주를 끝내기만을 기도하다가, 모든 인터뷰와 영광을 독차지하는 주인의 뒤에 숨어 아들이 무사히 살아온 것만 감사하는 눈물을 흘린다고 하니 이런 경마가 왜 필요한가.

몽골 족의 후예로 어려서부터 말을 탈 줄 아는 남자로 기르겠다는 취지는 탓할 수 없으나 운영상의 제도적인 문제는 고쳐지는 게 필요할 것 같았다. 또 몽골의 풍속에는 여자들이 중심이 되어 친가보다는 외가 쪽이 비중이 더 크고, 성인이 되면 독립해서 사는 것도 보편화되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버스는 어느 새 울란바토르 시내에 도착했다. 시내는 초원과 달리 매연과 먼지가 가득하여 하늘이 부옇다. 몇 년 전 대흉년으로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많이 옮겨오는 바람에 전 인구의 거의 절반이 모여 사는 수도는 포화 상태가 되어 주택은 물론 교통 사정도 매우 좋지 않다고 한다.

또 도로가 막히다 보니 시간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는 게 다반사고 사람들은 그걸 당연시한다고 한다. 차가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도로에 갇혀 시간을 소모하다가 예정보다 한참 늦은 시각에 식당에 도착하여 겨우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간등사라는 사찰을 관람했다. 1930년대 사회주의 시절 종교 박해 때 몽골에서 유일하게 파괴되지 않은 사찰이라고 하는데, 그만큼 종교 시설로서보다 문화재적 가치가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사찰에서 수행하던 약 3천여 명이나 되던 수행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살해되거나 축출 당했고, 건물도 몇 개의 동은 파괴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민주화 이후 수백 명의 승려들이 수행하면서 옛 사찰의 복원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다.

사찰에 들어가면서 놀라운 것은 입구의 비둘기 떼였다. 이 나라의 불교적 관습에 의해 비둘기들에게 먹이를 주면 복을 받고 오래 산다는 믿음 때문에 곳곳에 먹이를 파는 사람들이 있고, 그 먹이를 받아먹기 위해 엄청난 숫자의 비둘기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발길에 차일 정도로 오글오글 모여 있다.

비둘기들을 밟지 않도록 피해서 조심스레 발길을 옮겨 사찰 건물로 향했다. 여러 채의 건물들이 여기저기 공간을 나누어 위치해 있었는데, 중심 건물은 입구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꽤 높은 전각이었다. 그 건물 정면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달라이라마의 천에 인쇄된 커다란 사진이 걸려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그 안에는 높이가 26미터나 된다는 관음보살 입상이 있었다. 공간이 좁아서 보살의 얼굴을 보려면 고개를 젖혀 한참 올려다보아야 했다. 보살의 외부를 장식하기 위해 백  킬로가 넘는 순금이 사용되었다고 하니 그게 진정한 신앙인지, 혹은 크기와 높이를 자랑하는 물신 숭배인지 모를 일이다.

요즘은 너나없이 모든 종교에서 많은 돈을 들여 크고 높은 조형물 만들기 경쟁을 하고 있다. 크고 화려한 곳에만 신이나 부처님이 오신다면, 그런 신이나 부처님이 과연 예수나 석가모니의 뜻에 부합할까.

오히려 우리 민초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했던 작고 못생긴 울퉁불퉁한 돌덩어리 미륵 부처님이 더 성인들의 가르침에 가까운 거 아닐까.

남의 신앙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건 분명 옳지 않은 일이지만 진정한 마음 대신 물질로 신앙심을 대신하려는 자세는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타락의 표상일지니 모름지기 초심과 기본으로 돌아가야 할 일이다.

비둘기들 사이에서 뜨거운 햇볕 아래 결혼식 야외 사진 촬영을 하느라 연미복과 드레스를 갖춰 입은 젊은이들을 바라보며, 새삼 종교의 존재 의미와 목적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모든 종교적 가르침은 결국 현재를 더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기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도구요 제도 아니겠는가. 종교를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라 사람을 위해 종교가 있다는 근본을 새삼 되돌아볼 일이다. 

기념품을 사고 싶다는 몇 일행의 요구로 백화점에 들렀는데, 층을 오르내리며 한 바퀴 돌아보니 살만한 게 별로 없어 나는 먼저 나와 버스에서 일행을 기다렸다. 일행들은 가족에게 줄 선물과 값이 싸다는 보드카를 많이들 구입했다.

시간을 정해 놓고 쇼핑을 하도록 했으나 의사 전달이 잘 되지 않아 출발 시각이 되었는데도 세 사람이 오지 않아 출발을 못했다. 사람을 찾기 위해 간 사람도 오지 않아 또 데리러 가고, 가이드가 숨이 차게 뛰어다니며 찾아 헤매느라 예약된 몽골 전통 공연 관람 시각이 지나 버렸다.

사람을 찾고 보니 그들은 시간을 착각하여 느긋하게 차를 마시고 있었다 한다. 공동생활에서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런 일은 모두를 피곤하게 하니 마땅히 조심해야 할 일이다.

운전기사가 샛길을 찾아 무리하게 버스를 운전한 끝에 공연장에 도착하니 이미 공연은 시작되어 밖에서 대기하다가 프로그램이 끝난 잠깐의 틈을 이용해 안으로 들어갔다.

외국인을 포함한 관람객이 조용히 앉아 감상하는 데 방해가 된 것 같아 좀 미안하기도 했다. 공연은 전통 악기 연주, 특이한 창법의 노래, 샤먼의 춤, 불교를 소재로 한 연극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내가 그 분야에 전문성이 없다 보니 그 수준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 시간여의 공연이 끝나고 밖으로 나와 발 마사지 하는 곳으로 갔다. 2층으로 올라가니 큰 방에 남자 일행 모두를 들어가게 하고, 팬티만 남긴 채 옷을 모두 벗고 거기서 준비한 것으로 갈아입으라고 했다.

반바지와 티셔츠 차림으로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으니 곧 대야에 물을 담아 가지고 여성들이 나타나 발을 담그게 하고 팔에서부터 어깨까지 마사지를 시작했다.

태국이나 중국에서 마사지를 받아본 경험이 있어서 그게 낯설지는 않은데, 그래도 처음 만난 소녀들이 내 몸을 주무른다는 게 마음이 썩 편하지는 않았다. 얼마간의 돈을 받는다고는 하나 남의 나라, 그것도 나이 많은 사람의 냄새나는 발과 몸을 만진다는 게 어찌 마음 편한 일이겠는가.

심하게 말하자면 알량한 자본의 폭력이랄까. 내가 그 가해자가 되는 것 같아 내내 편안한 시간은 아니었다. 나를 담당한 여성은 나이가 좀 들어 보이기는 했으나 체격이 커서 힘이 좋아 만질 때마다 좀 아플 정도였지만 다른 사람과 달리 다정하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하고 속으로만 미안하고 또 고맙다는 생각을 했다. 내 몸에서 말로 표현되지 못한 그런 걸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기를 바랄 뿐이다.

저녁은 몽골 식 샤브샤브로 먹었다. 육수에 채소 몇 가지를 넣고 끓여서 거기에 얇게 저며 나온 쇠고기, 양고기, 말고기를 살짝 익혀 소스에 찍어 먹는 것인데, 내게는 육수부터 입맛에 잘 맞지 않아 약간 느글거리는 느낌이었다.

몇 점의 쇠고기를 익혀 먹고는 아내가 특별히 만들어준 볶은 고추장 남은 것과 일행들이 준비해온 깻잎과 장아찌 등을 밑반찬으로 저녁 식사를 해결했다. 몽골에서의 마지막 식사라고 다른 분들은 술을 곁들여 잘들 드시는 게 부러웠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시며 휴식을 좀 취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며칠 동안 우리를 위해 친절하게 여정을 도와준 운전기사와 가이드에게 모두 진정한 마음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큰 박수로 대신하고 작별을 했다.

그들이야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겠지만 짧은 기간 동안 그들에게 모든 걸 맡긴 우리로서는 사소한 그들의 친절도 고맙지 않을 수 없다.

공항 안으로 들어가 곧 출국 수속을 했다. 자정 가까운 늦은 시각이라 공항에는 우리가 탈 비행기 승객밖에 없어 수속은 대기하는 시간 없이 금세 이루어졌다. 그 대신 탑승 시각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더 길어질 수밖에 없는 건 그 대가랄까.

그러고 보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한 시간을 줄이는 효과가 있으니 인생사 모든 게 이런 양면성이 있는 것 같다. 공항 규모가 작아서 대기실도 좁고, 편안하게 앉아 쉴 곳도 마땅찮다. 면세점도 영세하여 구경할 것도 없으니 기다리기가 더 지루했다.

우 교수와 함께 커피 가게에 가서 차 한 잔을 시켜 놓고 고 이이야기를 나누며 무료한 시간을 달랬다. 11시 반이 되어 탑승이 시작되었는데, 우리나라 국적기여서 마음이 우선 편했다. 정해진 시간에 이륙한 비행기는 심야의 하늘을 날아 인천공항에 새벽 4시경 도착했다.

우리를 태운 비행기는 새벽 4시 정각에 인천 공항에 착륙했다. 이른 시각이라 지체되는 시간 없이 입국 수속을 빨리 마치고,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오니 4시 반밖에 안 되었다. 아직 이동할 수 있는 대중 교통수단이 운행되지 않는 시간이니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일행 중 다른 사람들은 마중 나온 가족들과 떠나고, 혼자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5시 25분 첫차로 강남고속버스 터미널로 가는 리무진 버스를 탔다. 50분쯤 걸려 터미널에 도착하여 6시 45분 공주로 출발하는 버스표를 구매했다.

시간이 남아 월드컵 축구 중계를 보며 기다리다가 공주 행 버스에 몸을 실으니 마음이 편안하다. 8시 15분에 공주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와서 아내와 손자 얼굴을 보니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다. 3일 만에 머리를 감고, 묵은 먼지를 샤워로 씻어내고,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밥을 달게 먹었다.

평소 꼭 한번 가보고 싶던 몽골을 우연한 기회를 통해 다녀올 수 있었다. 낯선 사람들과 일행이 되어 여행을 하는 게 좀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모두 문학을 매개로 한 동지들이어선지 서로 도와주고 이해해 주는 분위기여서 편안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여행을 마치게 되어 그저 감사하고 고마울 따름이다.

몽골을 가리켜 흔히 초원의 나라니, 바람의 제국이니, 사막의 나라니 하는 말들을 하지만, 내 짧은 여행의 결과로 볼 때 이 나라는 그 어떤 한 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격의 나라인 것 같다는 생각이다.

고려 시대 이래로 이 나라는 우리와는 역사적으로 침략과 항쟁의 나라이기도 했지만 반대로 풍속과 문화를 주고받으며 협력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왕실 사이의 결혼이나 민간들의 교류는 알게 모르게 양국의 문화에 영향을 미쳐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기도 하다.

예컨대 우리가 자주 쓰는 ‘몽고반점’이라는 말이나 양국 언어의 계통적 친연성이 이를 증명한다. 그밖에도 여러 사찰의 탑이나 소주, 샤머니즘, 돌하르방, 제주의 말이나 소등 여러 가지가 몽골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의식 없이 우리 것으로 통용되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이들은 우리를 형제의 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현재도 이 나라는 수출 수입 모두 상위권에 속하는 우리의 중요한 무역 국가이기도 하고, 중소기업 등 경제적인 협력이 많이 이루어지기도 하며, 학술과 문화 등 인력 교류도 활발하다.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확대되고 심화될 것으로 보는 게 대략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몽골은 무한한 잠재력을 갖고 있는 나라다. 어떤 게 얼마가 매장되어 있는지 모를 지하자원, 광활한 초원으로 이루어진 드넓은 땅은 이 나라의 축복일 뿐 아니라 인류의 희망이기도 하다. 그 자원을 개발하고 또 그 초원에 곡물을 재배한다면 인류의 부족한 게 채워지고 혹독한 기근이 해결될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해 볼 수도 있다.

문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이 나라는 바람과 풀과 별과 하늘의 나라다. 우리나라 윤동주 시인이 노래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섬세한 여성적인 특징을 가졌다면, 이 나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같은 자연물이면서도 강인한 남성적 이미지를 갖고 있다.

가없는 지평선에 가득한 풀과 바람, 거칠 것 없이 금세 쏟아질 듯 찬란한 밤하늘의 별은 칭기즈칸의 말발굽소리와 함께 여전히 역동적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우리의 아늑하고 포근한 바람과 풀에 세계를 정복한 이 강렬한 풀과 바람의 힘이 더해지다면, 우리가 그토록 소망해 왔던 위대한 시와 소설 작품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희망 속에 거친 몽골 여행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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