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역사유적지구’(Baekje Hisoric Areas)가 지난 7월 4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 공산성 전경

등재 지역은 △공주(2곳) -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  △부여(4곳) -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능산리 고분군, 정림사지, 부여 나성 △익산(2곳) - 왕궁리 유적, 미륵사지 등 모두 8곳이다.

이로써 한국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의 3건이 한꺼번에 처음으로 등재된 이래 모두 12건(△석굴암, 불국사(1995) △해인사 장경판전(1995) △종묘(1995) △창경궁(1997) △화성(1997) △경주역사유적지구(2000)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2000)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백제역사유적지구(2015))에 이르는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됐다.

앞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활용과 가치를 위해서는 우리 지역의 세계유산에 대한 이해와 관리가 필요하다. 공산성과 무령왕릉을 비롯한 세계유산 8곳에 대해 상세히 알아본다. 

◎세계유산의 이해

세계유산(World Heritage)이란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 UNESCO, 이하 유네스코)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협약”(Convention concerning the Protection of the World Cultural and Natural Heritage : 이하 세계유산협약)에 의하여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유산을 말한다.

이 협약에 의하여 유네스코의 특별위원회의 하나로 발족된 세계유산위원회에서는 인류문명과 자연유산 가운데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유산을 전 인류가 공동으로 보존하고 이를 후손에게 전수하여야 할 세계적 유산으로 지정하여 인류의 소중한 유산들이 인간의 부주의로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1960년대 문화유적과 함께 자연유산 및 아름다운 경치를 지닌 곳을 보호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러한 분위기를 바탕으로 자연의 보전과 문화의 보전을 한데 묶는 세계유산보호를 위한 국제협약인 세계유산협약이 1975년 11월 유네스코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세계유산협약은 문화 및 자연유산은 원래 그 자체적으로 지니고 있는 자연적인 쇠퇴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가공할만한 손상 및 파괴를 수반하여 사태를 악화시키는 사회적 및 경제적 조건의 변화에 의하여 파괴되는 것에 유의해야하고 문화 및 자연유산의 손괴 및 멸실은 인류의 유산을 빈곤화시키므로 귀중한 유산을 보호하는 것은 인류를 위하여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문화재는 세계유산 상징로고를 사용할 수 있다. 벨기에 예술가 미쉘 올리프(Michel Olyff)가 만든 작품으로 1978년 채택되었다. 상징도안은 지구가 생긴 모양대로 둥근 모습인데 인류유산의 전 지구적 보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가운데 사각형은 인간의 기술 및 영감의 결과물을 상징하고 인간에 의하여 창조된 형상을 그리고 외곽의 둥근 원은 자연환경을 나타낸다. 사각형과 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인간이 만든 문화와 자연 나아가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을 상징한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유산은 유네스코로부터 인류공동의 유산임을 공인하는 인증서를 교부받게 되고 상징로고를 사용할 수 있다. 상징로고의 세계유산 표기는 상단은 자국어(自國語), 왼쪽은 영어(英語), 오른쪽은 불어(佛語)로 한다.

▲ 왕관금제장식

◎백제문화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

1. 백제문화의 탁월한 보편적 가치

세계유산에 등재되기 위해서는 백제문화유산이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란 “국경을 초월할 만큼 독보적이며 현재 및 미래 세대의 전 인류에 있어 공통적으로 중요한 문화 또는 자연적 중요성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진정성(Authenticity)과 ’완전성(Integrity), 해당 유산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충분한 보호 및 관리체계를 구비해야한다.

2.백제문화의 진정성

진정성(眞正性)이란 어떤 물건이 진품이거나 출처가 분명하고 어떤 사상(事象)이 사실을 판정하는 개념으로 문화유산의 존립근거로서 중요한 요소이다.

백제문화유산이 분포하고 있는 공주와 부여, 그리고 익산은 백제웅진·사비기에 왕도(王都)또는 왕성(王城)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당시의 역사와 문화상을 증명하는 유적들이다.

특히 한 왕조의 궁성관련 유적인 공산성과 부소산성, 익산 왕궁성, 왕실의 분묘유적인 송산리왕릉군과 능산리왕릉군, 익산 쌍릉, 도성의 방비체계를 보여주는 나성과 청마산성, 청산성, 미륵산성 등의 산성유적, 당시의 융성했던 불교사상을 알 수 있는 정림사지, 왕흥사지, 능산리지, 미륵사지 그리고 정림사지 5층석탑과 미륵사지 서탑 등은 원래의 위치와 구조를 일정부분 유지하고 있어 진정성이 확인된다.

▲ 무령왕릉현실

3.완전성 조건에 대한 부합성

완전성(完全性)은 유산이 지닌 속성의 전체성인 본연성을 가늠하는 척도로서 유산의 물리적 구조 또는 중요한 특징이 양호한 상태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공주·부여·익산 역사유적지구는 백제시대 웅진~사비기의 왕도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는 왕궁시설과 조경시설, 사상적 발전을 보여주는 종교시설과 고분유적, 군사체계를 보여주는 관방유적, 도성 내 생활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건물지, 그리고 당시의 기술수준을 알 수 있는 각종 공예품 등이 종합적으로 확인된다.

즉, 고대국가의 왕도로서 갖추어야 할 운영체계와 생활상을 파악할 수 있는 요소를 전체적으로 갖추고 있다. 이는 한 왕조의 물리적 도성구조 및 정신문화, 기술문화를 확인할 수 있는 복합적인 문화유산으로서의 완전성을 충족하고 있으며 웅진기에서 사비기로의 계기적인 문화발전 단계를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체계적인 관리를 받고 있다. 공주, 부여, 익산지역 백제문화유산은 보존관리 측면에서 백제문화유산은 완전성을 갖추고 있다.

◎ 공주역사유적지구

▲ 공산성의 만추

○공산성(사적 제12호)

공산성은 고려시대 이후의 명칭으로 백제시대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 백제가 475년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왕성으로의 역할을 했다.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로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포곡형 산성이다.

원래는 토성(土城)이었으나 조선 선조·인조 대에 대부분 현재와 같은 석성(石城)으로 개축되었다. 성곽의 총 길이는 2,660m로 외성을 제외하면 2,193m가 되며 토성은 735m, 석성은 1,925m로서 석성이 전체 성벽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현재 성벽의 높이는 약 2.5m, 너비 약 3m로 보수되었다.

1985년∼1986년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확인된 유적은 건물지를 비롯하여 물을 저장할 수 있는 연못, 목곽 및 저장구덩이 등이 확인되었다. 유물로는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토기등잔, 삼족토기, 봉황형 금동향로 등이 출토되었다.

공산성 내 유적으로는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유적이 남아 있으며 왕궁지, 임류각, 금서루, 진남루, 동문루, 공북루, 연지 및 만하루 등이 있다. 

특히 2011년 3월 ‘貞觀 十九年 四月 二十一日(정관 십구년 사월 이십일일)’라고 적힌 가죽갑옷을 백제시대 문화층 저습지에서 발굴했다. 이 같이 명문(銘文)이 새겨진 고대 백제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것은 무령왕릉의 지석(국보 163호)과 함께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 무령왕릉

○송산리고분군(사적 제13호)

무령왕릉은 1971년 7월 5·6호분에 대한 배수로 공사를 하던 중 우연히 발견되었는데 도굴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발굴되었다.

웅진기 63년간 재위하였던 왕과 왕족의 분묘군이다. 현재 벽돌무덤과 할석·괴석 등으로 만든 돌방무덤 10여기가 있는데 지금까지 7기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송산리고분군을 구성하고 있는 고분은 모두 7기이며 이들 고분의 분포를 보면 계곡 서쪽에는 무령왕릉과 5~6호분, 동쪽에는 1~4호분이 있다. 먼저 1~5호분은 모두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으로 무덤입구에서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널방(현실)에 이르는 널길(연도)이 널방 동족 벽에 붙어있는 것이 특징이다.

벽돌무덤(전축분)으로는 송산리벽화고분이라고도 불리는 6호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6호분은 활모양 천장으로 된 이중 널길과 긴 네모형의 널방으로 되어 있는데 오수전(五銖錢)무늬가 새겨진 벽돌로 정연하게 쌓았다. 널방 벽에는 7개의 등자리와 사신도·일월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무령왕릉도 6호분과 같이 연꽃무늬 벽돌로 쌓은 전축분이다. 구조는 입구 통로인 널길과 시신을 안치하는 널방으로 이루어졌다.

유물로는 지석을 비롯해 108종 4,600여 점이 출토되었으며 그중 17점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지석에는 무덤의 주인이 무령왕이며 523년 5월 7일에 돌아가시고 525년 8월 12일에 왕릉에 모셨으며 왕비는 529년 2월 12일에 왕릉에 모셨다고 쓰여 있다. 이들 2기의 전축분은 중국의 묘제를 수용한 것이며 6호분의 고분벽화는 고구려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송산리고분군은 웅진기 왕실분묘군으로 당대의 건축적 기술과 장묘문화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매우 큰 유적이다. 그리고 무령왕릉은 지석(誌石)을 통해 피장자의 신분을 알 수 있는 한국 고대의 유일한 왕릉이기도 하다.

또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금제관장식, 금동신발, 금제목걸이 등 다양한 유물은 백제의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미의식과 창의성, 그리고 수준 높은 공예기술을 보여준다.

이들 유물은 제작기술면에서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작시기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진정성이 확인된 대표적인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에 완전성도 갖추었다.

따라서 세계유산적 가치에서 볼 때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중국제 자기류와 일본산 금송으로 만든 목관은 주변 국가들과의 교류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유물로 백제가 당시 동아시아 문물교류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 부소산성 낙화암

◎ 부여역사유적지구

부여는 백제의 세 번째 도읍지이자 마지막 도읍지이다. 한성에서 출발한 백제는 고구려의 남진 세력에 밀려 웅진으로 천도(475)하고, 뒤이어 다시 사비, 즉 지금의 부여로 천도(538)하였다. 약 120년간 지속된 사비시대는 한마디로 가장 백제다운 문화가 꽃핀 시기라고 할 수 있다.

▲ 부소산성 전경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

관북리유적과 부소산성은 사비시기(538-660)백제의 왕궁으로 부여시가지 북편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금강과 인접해 있으며 대형 건물지와 도로, 상수도, 석축, 공방을 포함한 왕궁과 다양한 유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부소산성은 평상시에는 왕궁의 정원으로서 역할을 하고 비상시에는 대피시설로소 사용되었으며 산성의 성벽은 판축기법으로 축조되었다. 현재 백제왕궁의 구조 대부분이 확인되었다.

▲ 부소산성

○정림사지

백제사의 가장 대표적인 사찰 중에 하나가 정림사지다. 정림사지(定林寺址)는 부여읍내의 한 가운데 관북리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다. 정림사지지구는 이러한 정림사지를 비롯해 그 주변에 자리한 쌍북리 가마터를 포함한 지역을 말한다.

정림사지는 석탑과 금당이 일직선상에 자리한 1탑 1금당의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를 보여주는 예이다. 정림사지의 고고학적 연구결과 중문지, 금당지, 강당지, 북·동·서편의 승방지 뿐만 아니라 화랑지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승방의 배치는 백제사찰에서 보이는 독특한 특징을 보이고 있으며 사지에는 8.3m 높이의 5층 석탑이 남아 있다.

▲ 정림사지 석탑

○나성

나성은 도읍지 전체를 에워싼 성곽으로 나성은 방어와 구별의 목적으로 성 안쪽 사람과 바깥사람을 구별하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공간을 구별하는 것이 나성이다. 백제시대 고분이 나성 밖에 자리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나성지구는 나성과 나성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능산리고분군, 나성과 능산리 고분군 사이에 자리한 능산리사지 등으로 되어 있다.

나성은 방어의 기능을 가질 뿐만 아니라 수도의 안과 밖을 구분하는 상징적 경계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산성과 달리 나성은 산지와 평지를 연결하여 수도를 방어하는 독특한 구조이다. 저습지를 통과하는 구간은 기반층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나뭇잎과 나무를 사용한 특수한 축조공법이 적용되었다.

▲ 부여 나성

○능산리고분군

능산리고분군은 나성 동쪽 밖에 인접한 산의 남사면에 위치해 있는 백제왕릉이다. 능산리고분군은 세 가지 유형의 굴식 돌방무덤이 있음이 조사되었고 천장 건축방법이 볼트형 천장에서 육각형 또는 사각형 평천장으로 변화하였음이 밝혀졌다. 1990년대에 백제금동대향로가 능산리고분군의 서쪽의 절터에서 567년에 제작된 석제사리감과 함께 출토되었다. 이 발견은 능산리고분군이 사비시대 백제왕릉이라는 것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 금동백제대향로

◎ 익산역사유적지구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1980년부터 17년간의 발굴조사에서 백제시대 유물을 포함 약 2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어 「삼국유사」 창건기록의 진정성을 보여 주었다. 가람구조는 탑과 불전을 3곳에 배치하고 주변을 화랑으로 구획한 삼원병치(三院竝置)형식이 완전한 형태로 발굴되었다.

용화산(현 미륵산)자락에 건립한 삼원병치의 배치형식은 미륵삼존이 용화보리수 아래에 하생(성불)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상화했다고 하는 점에서 탁월한 백제문화의 독창성을 엿 볼 수 있다.

미륵사지는 동아시아 최대의 사찰터 중 하나로 미륵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미륵사 창건에 관련된 이야기는 이례적으로 13 세기 한국의 역사서인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고대 기록의  대부분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하여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 미륵사지5층석탑

미륵사지는 무왕 재위기인 7세기 초에 창건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폐사된 것으로 보인다. 미륵사는 미륵이 세상에 내려와 3번의 설법을 통해 중생을 구원하는 모습을 가람으로 구체화한 백제문화의 탁월한 독창성을 보여준다.

일직선을 이루는 탑과 금당을 3곳에 배치하고 주변을 화랑으로 구획한 독특한 가람을 보여주고 있다. 서원의 탑만이 현존하고 있으며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다.

▲ 미륵사지 사리함

○왕궁리유적(사적 제408호)

왕궁리 유적은 발굴조사에서 남북 492m, 동서 234m, 폭 3m 규모인 궁성이 확인되었다. 이 안에서는 대형건물지, 정원시설, 후원시설, 공방시설, 환수구시설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토기, 기와, 유리나 금제품과 도가니 등 4,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기와 중에는 ‘수부(首府)라고 인각된 명문와가 출토되어 백제왕궁의 진정성을 보여준다.

왕궁리유적은 사비시기 수도(부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조성된 복도의 왕궁으로서 지어졌다. 유적은 용화산에서 뻗어 나오는 능선의 말단부의 낮은 구름 위에 만들어졌다. 토지 조성을 중앙부는 높게 하고 담장 외부는 경사지게 깎아 왕궁내부가 담장 외부에 비하여 3~4m 가량 높아 보이게 하였다.

높은 대지위에 지어진 건물이 밖에서 더욱 장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의도였다. 고고학적 연구결과 남쪽에는 의례나 정치와 관련된 건물이, 북쪽에는 후원이 배치된 왕궁 내부구조를 알 수 있다. 유적은 백제왕궁과 관련된 시설들과 공방시설, 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백제역사유적가이드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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