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세계유산 둘러보기 ①

 

백제역사유적지구(공주 공산성, 송산리고분군 부여 부소산성과 관북리왕궁지, 정림사지, 나성, 능산리고분군 익산 미를사지, 왕궁리유적)가 지난 7월 4일 독일 본에서 개최된 제38회 세계유산등재위원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결정됐다. 우리나라 12번째 세계유산이다.

세계유산 등재 현황은 163개국 1031건(문화유산 802건, 자연유산 197건, 복합유산 32건, 위험에 처한 세계유산 48건, 공동등재 세계유산 31건)이다.

일본 오키나와에는 2000년 11월에 ‘류큐왕국의 구스크 및 관련 유산군’이 등재됐다. 슈리성을 비롯한 9건의 유적이다.

오키나와 세계유산은 백제문화유산과 조성 시기는 차이가 있지만 △왕국의 도성 관련 유적이 중심이라는 점, 그리고 △여러 지자체에 흩어져 있는 연속유산군이라는 점에서 우리 지역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오키나와 9건 유적의 구성은 왕성 1개소, 성곽 4개소, 왕릉 1개소, 조경유적 1개소, 종교유적 2개소 등이다. △8건의 백제세계문화유산은 왕성 2개소, 성곽이 2개소, 왈릉 2개소, 불교유적 2개소 등으로 유적 성격의 구성에 있어서도 유사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획은 해외 세계유산을 찾아 그들의 세계유산 관리 및 개발과 관광홍보 등에 대해 알아보고 아울러 세계유산에 등재된 백제역사유적지구의 향후 방향과 주민의 역할 등을 살펴보고자 기획취재(2015. 10. 11~10. 14)를 실시했다. 답사에는 전문가 윤용혁(공주대) 교수와 기획취재로 신용희 기자와 나정희 객원기자가 통역 및 취재기자로 참여했다.

현지 취재에는 국립대학법인류큐대학 이케다 요시후미(池田榮史)교수의 안내와 협조로 슈리성 종합연구센타의 우에주 야스유키(上江洲 安享)과장, 오키나와컨벤션 국내사업부에서는 유까 오나가(翁長由佳)과장과 유헤이 타카미(高見洋平)주임, 오키나와교육청 문화재과에서는 하지오 토히야키(萩尾俊章)과장과 킨조 카메노부(金城龜信)반장의 안내를 받았다./편집자

1. 오키나와 세계유산의 지정

2. 오키나와 세계유산의 내용

3. 오키나와 세계유산 지정 효과와 주민활동

4. 오키나와의 특산물과 관광개발

5. 우리나라 역사와 오키나와

6. 백제유산의 향후 과제

 

Ⅰ. 오키나와 세계유산의 지정

 오키나와 섬(沖縄島) 또는 오키나와 본도(沖縄本島)는 동중국해와 태평양의 사이에 위치하는 난세이 제도 최대의 섬이자, 오키나와 현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이다. 면적은 1,206.93 km²이고, 일본의 주요 4개 섬을 제외한 면적이 가장 넓은 섬이다. 오키나와 현의 45개의 시정촌 중 현청 소재지인 나하 시를 포함한 30개의 시정촌이 있고, 오키나와 현의 인구 약 135만 명 중 약 120만 명이 오키나와 섬에 집중되어 있다.

오키나와 세계유산은 2000년 11월 3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게인츠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24회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지정명칭은 ‘류큐왕국의 구스크 및 관련 유산군’. 오키나와현에서 세계유산 등재를 본격 추진한지 5년 만의 성과이다.

오키나와 세계유산이 잠정목록에 오른 것은 1992년이다. 당시 명칭은 ‘류큐왕국의 성 · 유산군’이었다. 등재된 오키나와 세계유산은 오키나와현의 7개 지자체에 소재하는 9건의 유적이다.

▲ 오키나와의 세계유산(9개소)분포도

나하시(那霞市)에 소재한 수리성(首里城跡), 수누향우다키 석문(園比屋武御獄石門), 타마우동(玉陵), 시키나엔(識名園)과 가츠렌정(中頭郡 勝蓮町)에 소재한 가츠렌구스크(勝蓮城跡), 나키진촌(國頭郡 今歸仁村)의 나키진구스쿠(今歸仁城跡), 요미탄촌(中頭郡 讀谷村)의 자키미구스크(座喜味城跡), 나가구스크촌(中城村)의 나가구스크(中城城跡), 기타나가구스크촌(北中城村)의 기타나가구스크성(北中城城跡), 치넨촌(知念村)의 세이파우다키(齊場御獄) 등이다. 9건의 유적 중 사적 7건, 중요문화재 2동, 특별명승 1개소가 지정되어 있었다. 면적은 54.9ha에 완충지역 559.7ha에 이른다.

정부에서 작성한 추천서에 오키나와의 유산은 “류큐가 류큐왕국에의 통일의 움직임이 시작된 14세기 후반부터 왕국이 확립된 후인 18세기 말에 걸쳐 이루어진 류큐지방 독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문화유산군이다”라고 하였다.

1. 류큐 왕국(琉球王國, The RyÚkyÚ Kingdom)과 오키나와 역사

오키나와에는 약 3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으며 13세기 전후 ‘아지(按司)’라 불리는 지도자가 각지에서 나타났다. 1429년 쇼하시(尙巴志)가 호족세력을 모두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류큐 왕국은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으나 1609년 사쓰마번(蕯摩藩)의 침입으로 막부의 간섭을 받다가 1872년 일본에 병합되었다. 1879년 오키나와현(沖繩縣)이 설치되면서 ‘류큐’라는 이름은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일본 최남단에 위치한 오키나와(沖繩)제도에는 15세기에서 19세기까지 일본과는 별개로 독자적인 역사를 형성한 ‘류큐 왕국(琉球王國)’이 존재했다. 현재 일본의 오키나와현인 이 지역은 8~9세기부터 농경사회에 접어들었으며 12세기부터 지방호족들이 등장하여 이합집산을 지속하였다.

15세기 초에 쇼하시(尙巴志, 재위 1422~1439년)가 호족세력을 모두 통일하면서 ‘류큐 왕국’이 성립되었다. 류큐 왕국은 동남아시아와 동북아시아를 잇는 지리적 위치를 이용하여 15세기에는 중계무역으로 황금시대를 구가하였다.

17세기에는 규슈(九州) 사쓰마번(蕯摩藩)의 침략을 받아 일본의 간섭이 시작되었다. 사쓰마번은 류큐의 무역을 장악하여 세금을 받았으며 특산물을 수탈하였다. 류큐 왕국은 일본 막부의 정치적 간섭 속에서도 독립국가로서 중국·조선과의 교역을 위해 노력하였고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일본 메이지(明治) 정부의 폐번치현(廢藩置縣) 정책으로 1872년 류큐현으로 일본에 편입되었으며 1879년 이름이 오키나와로 바뀌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류큐왕국의 옥관(복제품)

2. 쇼씨 왕조와 왕실유물

470여 년간 류큐 왕국을 통치한 세력은 쇼씨(尙氏)였다. 쇼씨 왕조는 나하의 항구를 통해 각국에서 수입한 다양한 재료를 구하여 왕실의 고급 생활용품에 사용하였다. 쇼씨 왕조의 유물은 중국이나 일본 그리고 남방제국 등의 영향을 반영하면서도 독자적으로 발달한 류큐 왕국의 미적 감각을 잘 보여준다. 특히 나하시역사박물관 소장 ‘쇼씨 왕조의 전래품’은 2006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다.

▲ 류큐 무역도 병풍

3. 류큐 왕국의 외교와 교역
류큐 왕국은 1372년 중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맺은 이후 중계무역을 통해 해상왕국으로 번영을 누렸다. 류큐는 조선을 중요한 교역국의 하나로 여겨 여러 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유교경전과 대장경 등을 구하는데 힘쓰는 한편 희귀 동·식물과 병선 제조술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1609년 사쓰마번의 류큐 침공 이후에는 일본 에도 막부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등 일본과 중국에 모두 조공을 비치는 양속(兩屬)체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류큐 왕국이 종말을 고할 때까지 270년 간 지속됐다.

Ⅱ. 오키나와 세계유산의 내용

▲ 슈리성 정전

▲ 슈리성 성곽 전경

1. 슈리성(首里城跡)

슈리성은 1429년부터 1879년까지 450년 간 유구왕국의 왕성이었다. 태평양전쟁 때 크게 파과된 것을 다시 복원하여 자타가 인정하는 오키나와 관광 1번지가 되었다. 우리로 말하면 성채에 둘러 쌓인 백제왕궁이 있던 공산성과 같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태평양전쟁 때 국보로 지정된 슈리성의 정전 지하에는 일본군의 오키나와 총사령부가 자리잡고 있어서 미군의 집중 포격으로 성이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전쟁 후 미군정 하에서 슈리성터에 류큐대학이 자리잡게 되었는데 1992년 일본에의 편입 20주년 기념으로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1994년 ‘국영 슈리성공원’으로 개장하였다.

가장 이른 시기의 대형 그스크 유적인 우라소에성(浦添城) 역시 미군의 집중 포격으로 대파되어 세계유산에서 제외된 것에 비하여 슈리성은 사진과 문헌 및 철저한 발굴조사를 토대로 복원에 성공함으로써 유적의 진정성을 인정받았다.

원래 ‘首里森’이라는 ‘御岳’의 하나였는데 상씨 왕조의 성립에 의하여 왕도가 건설되고 천도가 이루어진 것이다.

▲ 성벽 원래 부분(아래)과 복원한 부분(위)

▲ 유구석적과 복원석적 표시판

 

▲ 우사쿠사(국왕의 옥좌로 의식이나 축하연을 했던 곳)

▲ 류큐왕국 상씨왕조의 초상화 전시장

▲ 이 모형은 중국황제가 류큐국왕을 임명하는 책봉의식을 재현한 것

성벽의 복원은 남은 부분을 가능한 한 남김으로써 복원한 부분과 구분하였다. ‘復元石積’ ‘遺構石積’ 등의 표시가 이점을 나타낸다. 1660년(尙質王 13) 9월 27일 밤 화재로 인하여 슈리성은 전소되었다. 재건된 것은 11년 후인 1671년이었다. 1709년 다시 화재로 인하여 정전 등이 세 번째로 전소하였다. 3년 후(1712) 재건하면서 이때 지붕에 처음으로 붉은색 기와를 사용하였다. 복원된 슈리성은 바로 이 세 번째 슈리성의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슈리’의 어원에 대해서는 한반도 조선의 ‘서울’이라는 말을 옮겨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다. 관광객은 유료 입장객 수 세계유산 직후인 2001년 170만을 기록하였다.  

▲ 가츠렌구스크 전경

▲ 가츠렌구스크 전경

▲ 가츠렌구스크 성곽

2. 가츠렌구스크(勝蓮城跡)

류규왕국의 통일 과정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유력한 아지 아마와리(阿麻和利)의 거성이다. 아마와리(阿麻和利)는 1458년 중성의 고사마루를 멸망시키고 이어 슈리성의 류큐 왕부를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쇼타이쿠(尙泰久)왕의 딸이었다. 유력한 세력인 아마와리를 회유하는 차원에서 딸을 시집보낸 것이었다.

가츠렌성 함락 후 모모토후미아가리(百度踏揚)는 슈리왕부 토벌군의 대장 우후구스쿠겐유(大城賢勇)에게 시집 갔으나 고에쿠스크(越來城)의 성주가 된 우후구스도 얼마 후 쿠테타로 중임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쇼타이쿠(尙泰久)왕(1454-1460)은 불교에 귀의하여 재위 기간 중 많은 사원과 범종을 조영하였다. 류규왕국의 대교역시대를 상징하는 1458년 제작의 ‘만국진량의 종’도 쇼타이쿠(尙泰久)왕의 명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 나가구스크 원경

▲ 나가구스크 안내판

3. 나가구스크(中城城跡)

슈리성의 류규왕부에 대항하던 가츠렌성의 아마와리(阿麻和利)를 견제하기 위하여 자키미(座喜味) 성주였던 고사마루(護佐丸)를 1440년에 이주시킨 성이다. 고사마루(護佐丸)는 쇼타이쿠(尙泰久)왕의 장인이기도 하다.

이때 성이 고사마루에 의해 크게 증축되었고 고사마루는 ‘축성의 명수’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성곽은 6연곽 구조이고 성곽 총면적은 12,200㎡로서 지키미성의 2배에 이른다. 류큐의 통일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한 유적이다.

▲ 나키진구스크 홍보 포스터

4. 나키진구스크(今歸仁城跡)

오키나와 세계유산 중 가장 북쪽에 위치하는 유적이다. 13세기 경에 축성한 것으로 추측되며 14세기에는 현재 규모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약 38,000㎡로서 중성의 2배, 슈리성에 버금가는 크기이다. 류큐 통일왕조 수립(1429) 직전, 3산시대(북산, 중산, 남산) 북산을 통치한 왕의 거성이다. 1416년 북산이 중산에 의하여 멸망된 후에는 류큐왕부에서 파견된 관원의 거성이 되었다.

▲ 자키미구스크 홍보 포스터

5. 자키미구스크((座喜味城跡)

고사마루(護佐丸)에 의하여 1422년 경 축조된 성이다. 성벽 위에서 바라보는 석축의 곡선이 특별하다. 북산 멸망 이후 류큐왕국 성립 초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성의 전체 면적은 7,385㎡. 구스크는 2연관이고 성벽은 외곽과 내곽으로 구성됐다. 성곽의 모습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거의 보존되었으나 일본군의 고사포 진지가 설치되기도 하였고 이후에는 미군의 레이다 기지가 설치되었다.  

▲ 수누향우다키

6. 수누향우다키 석문(園比屋武御獄 石門)

제2 상씨왕통 3대 尙眞王(재위 1477-1526)에 의하여 창건된 석문으로서 문의 배후에는 ‘수누향우다키’라 불리는 성소가 있다. 상진왕은 팔중산의 아키하치 난을 진압하는 등 류큐의 중앙집권화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 다마우동(옥릉) 전경

▲ 옥릉 서실 안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

7. 다마우동(玉陵)

1470년 重臣 우치마가나마루(內間金丸)가 쿠테타를 일으켜 尙眞王으로 즉위하였다. 제1 상씨왕통은 7대 64년으로 멸망하고 뒤이어 제2 상씨왕통의 시대가 전개된다. 제2 상씨왕통 3대 尙眞王(재위 1477-1526)에 의하여 1501년 슈리성 中山門 부근에 조성한 제2 상씨왕통의 왕릉이다.

중국의 황제릉을 참고하고 슈리성의 정전을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묘실은 셋으로 나누어져 가운데 중실은 세골 전 유해를 안치하는 방, 동실은 세골 후의 왕과 왕비, 서실은 왕자와 공주의 유골을 안치하는 방이다. 1501년 상진왕에 의하여 세워진 옥릉의 비는 이 능에 장사된 상진왕 이하 9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509년에 세워진 상진의 송덕비는 슈리성 정전의 난간에도 세워졌다. ‘백포첨난간지명(百浦添欄干之銘)’이라는 이 비석에는 11개 항목의 상진왕의 공적이 새겨져 있다. 불교를 장려하고 많은 사원을 건립한 일, 아카하치의 난을 평정하고 팔중산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한 일, 슈리성의 환경을 정비한 일 등이 그것이다.

류큐왕국과 우리의 장례풍습은 다른 점이 많은 것 같다. 옥릉 꼭대기에는 릉을 지키는 수호신(시샤)인 동물이 앉아 있어 무령왕릉의 석실안에 릉을 지키는 진묘수와 셩격이 유사한 점이 이채롭다. 다른 점이라면 진묘수가 무덤 안에서 안치되었다면 옥릉의 시샤는 바깥에서 릉을 지키는 점이다.

▲ 시키나엔 전경

▲ 시키나엔 세계유산 표지석

8. 시키나엔(識名園)

1799년에 조성된 왕실 별궁의 정원이다. 중국에서 온 사신을 접대하는 장소로도 사용되는 등 요교 업무에 있어서도 일정 역할을 한 공간이다. 류큐의 독자성이 반영된 조경 유적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 세이파우다키 유적

▲ 세이파우다키 전경

▲ 세이파우다키 제사공간

9. 세이파우다키(齊場御獄)

오키나와현 최고의 성지(聖地)로 류큐 개벽신화에 나오는 나라의 최초 7대 우타키 중 하나로 제2 상씨왕통 3대 尙眞王(재위 1477-1526)에 의하여 정비된 최고의 국가적 제사처이다. 우후구이(大庫理), 유인치(寄滿), 상구이(三庫理) 등 3개의 제사공간〔拜所〕으로 구성되어 있다.

‘큰방’이라는 뜻의 우후구이(大庫理)는 세이파유다키의 첫 번째 제사공간이다. 류큐 최고의 신녀(神女) 기코에오오키미(問得大君)의 즉위 의식이 거행되는 공간이라 한다. 다음 유인치(寄滿)는 ‘부엌’이라는 의미를 가진 곳으로 경제적 부를 상징한다.

다음으로 2개의 큰 바위가 서로 기대어 있는 사이에 형성된 삼각형의 어두운 공간을 통과하는데 특이한 경관으로 이 제사 장소는 ‘상구이(三庫理)’라 불린다. 삼각형의 동문을 벗어나면 햇빛이 드는 작은 공간에 이르는데 이곳 높은 암벽의 꼭대기에서 신녀 기코에오오키미(問得大君)가 내려온다. 옛날에는 남자의 출입이 제한되었다고 한다.

세이파우다키는 류큐 독자의 자연관에 기초한 신앙형태를 나타내는 중요한 사례이다. 마치 우리지역 계룡산의 기도처 천진보탑과 흡사한 성격을 보인다. (오키나와 세계유산 둘러보기 ②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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