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학문이 그러하듯이 상담심리학에도 다양한 상담이론이 있고, 각 상담이론마다 수많은 상담기법들이 제안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상담 현장에서는 그 중에서 상담자가 선호하는 것, 혹은 유용하다고 판단되는 것들의 일부를 혼용해서 쓰는 경우가 많다.

특히 로저스의 인간중심상담은 특별한 상담기법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는다. 다만 상담자가 진실하게 의사소통하고 무조건적으로 내담자를 존중하고, 공감적으로 이해해주는 상담자의 태도를 강조할 뿐이다.

그러한 상담자의 태도로 인해 내담자의 자연적 성장이 이루어지면서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견해는 상당히 낙관적이고 희망적이다.

낭만적이기까지 한 공감의 기적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의료 현장이다. 물론 나로서는 주사와 쓴 약물을 연상시키는 병원이 흔쾌히 찾아가는 곳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의사 선생님이 몇 분 있다.

어느 해 겨울 김장을 다른 해보다 많이 담근 적이 있었다. 그해 시어머님께서 배추농사를 다른 해보다 유달리 많이 하셨다. 게다가 같은 교구에 소년가장이 있다고 그 집 김장까지 담자는 가톨릭 신자인 큰시누님의 제안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여섯 가구의 일 년치 김장을 하게 되는 바람에 아침부터 자정까지 거의 하루 종일 절인 배추에 속을 넣는 일만 되풀이해야했다.

평소 그렇게 큰살림을 해본 적이 없던 차에 한꺼번에 큰일을 해서인지 손가락이 마비되다시피 했다. 일주일 정도를 견디다가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동네의원을 찾았다. 의사선생님께서 증상을 물어보셔서 증상을 말씀드렸더니 그 이유도 물어보셨다.

꽤 많은 양의 김장을 담근 후에 손가락이 잘 펴지지 않는다고 했더니 “몇 포기나 담그셨어요?” 웃음까지 띠면서 다시 물어보셨다. 그런데 그 표정은 마치 ‘그깟 김장 몇 포기나 했다고 엄살이냐?’고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치료를 다 받고 병원 문을 나서는데 문 앞까지 따라 나와서 다시 한 번 ‘몇 포기 했냐’고 물어보는데 억울한 마음이 들고, 심지어 괘씸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 날 치료를 받고 난 후 거짓말처럼 손가락의 마비가 풀리고 통증이 사라졌다. 가히 명의라고 불려도 손색없을 처치였다. 그렇지만 간혹 그 의사선생님을 떠올리면 감사한 마음보다는 서운한 마음이 앞선다.

또 기억에 남는 의사선생님은 허리 디스크를 수술해주신 선생님이 아니라, 디스크가 있다는 진단을 해주신 선생님이다. 심할 때는 아주 잠깐 서있는 것조차 힘들 때가 있었는데, 겉으로는 별 다른 증상이 드러나지 않는 병이라 마치 꾀병환자 취급을 받을 때가 종종 있었다.

한의원에도 다녀보고, 외과에도 다녀보다가 나중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의료보험적용을 받지 못하는 침술원, 척추 교정원까지 찾아다녔지만 점점 증상이 더 심해지기만 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외과적인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고 찾아간 모 병원에서 주치의의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습니까?”라는 말 한 마디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 한 마디에 나의 고통을 고스란히 알아주는 분이라는 느낌이 들며, 그 의사선생님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의료 장면에서도 ‘환자에 대해 공감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그런데 어느 곳이 어떻게 아프다고 호소하는 환자에 대한 공감도 쉽지 않아서 환자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기 십상인데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혹은 아픈 것 자체를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내담자를 공감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겉으로 드러난 누렇게 뜬 잎사귀를 보고, 누렇게 떴다고 말해주는 것만으로도 내담자의 눈시울이 빨개지는 경우가 있다. 물론 상담 현장에서는 그 누런 잎사귀를 만들어 낸 뿌리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해결을 도와주고자 하는 이론 혹은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

잎사귀를 보든, 혹은 그 잎사귀의 근원인 뿌리를 보든 간에 ‘지금-여기’에서 나타나는 상대방의 감정과 경험을 민감하고 정확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진실한 공감적 이해가 바로 내담자의 마음을 여는 열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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