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일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도자기 하기야끼

오늘은 이마리만에 면한 도자기 도시 이마리 시를 떠나 야마구찌현의 하기 시로 이동하는 날이다. 우리 전세 버스는 이마리를 떠나 공주와 관련이 깊은 가라쓰(무령왕 탄생지 가카라시마로 가기위한 도시)를 통과해서 후쿠오카로 향한다.

▲ 관문대교의 모습

후쿠오카에서는 도시고속도로로 대도시를 통과하고 이어서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기타 규슈(北九州)로 접어들었고 칸몬(關門)해협의 남쪽 모지 시에 있는 휴게소에서 잠깐 휴식을 하며 사진 촬영을 하였다.

관광가이드인 재일교포 한 선생이 한국의 휴게소가 엄청 좋다며 부러워한다. 일본의 휴게소는 시설 면에서 규모도 작고 다양한 서비스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관문 대교, 일본에서 제일 큰 섬인 혼슈우의 시모노세끼와 큐우슈우의 북쪽 모지시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총길이 1,068m로 1,973년에 착공하여 5년 만에 완공하였으며 약 300억 엔의 공사비가 들었다고 한다. 이 다리의 동쪽은 세토나이카이 즉 내해(內海)이고 서쪽은 현해탄이라는 바다를 지나 한반도로 들어가게 된다.

▲ 하기야끼 갤러리 작품

옆에 있는 젊은 송 선생에게 “사의 찬미라는 노래를 아느냐” 고 물었더니 모른단다. 그래서 일제 시대 당시 최고의 엘리트 여성인 ‘윤심덕’이란 가수가 이곳을 통과해서 현해탄을 건너던 중 몸을 던진 슬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차안에서 도자협회의 박원순 교수님의 하기야끼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중요 지휘관이었던 모리휘원(毛利輝元)에게 잡혀간 그 당시 뛰어난 사기장으로 國工(나라에서 인정한 장인)으로 인정받은 이작광이 야마구치현의 고려산에 요를 열고 자기를 굽기 시작했다.

▲ 하기야끼 다완

그 뒤 정유재란에 동생 이경 부부도 끌려오게 되고 이들에 의해 아리타의 백자와는 전혀 다른 하기야끼가 만들어졌다. 그로부터 370여년이 지난 즈음 많은 연구에 노력 끝에 12대 손에 의해 하기야끼가 무형문화재로 인정받게 된다.

박 교수의 말에 의하면 이 하기야끼의 발달은 도자기의 소비층과 관련이 깊다는 것이다. 중국 송대의 말차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와 말차를 마시는 다완이 발달했고 이 다완의 소비가 귀족에서 평민으로 확대됨으로 그 수요가 급증했다는 것이다.

▲ 우동을 한자로 쓴 것

또 나정희 선생님은 말하기를 다완의 아래에 홈을 파서 이 다완이 마치 제작상 오류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는 일반 평민에게도 보급했다는 것이다. 그런 전통이 지금도 남아있어 고급스런 다완의 밑 부분이 삼각형 모습으로 패어 있는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일본 사람들은 이 도자기를 말끔한 백자보다 더 좋아하고 이 자기는 7번 색깔이 변하며 쓰면 쓸수록 은은한 빛을 더 발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여하튼 이런 것보다도 아주 중요한 것은 이 하기야끼의 모습이나 제작 과정이 우리 공주의 분청사기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일본인들이 엄청 사랑하는 하기야끼와 같은 도자기를 우리 공주가 생산해 일본에 공급하는 방안이 연구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하기 시청의 모습

1시 경 하기 시에 도착하여 유명하다는 우동집으로 향하였다. 전통적인 방법에 의해 면을 뽑는 집으로 이곳도 줄서기는 마찬가지이다. 다행이 우리의 점심시간이 늦어 그렇게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다.

기다리는 중에 벽을 보니 우동을 한문으로 써 놓았는데 처음 보는 한문 글자라 사진을 찍어보았는데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일본에서 만들어 낸 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하고 나와서 차가 주차되어 있는 시청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하교하는 여학생들이 보였다, 한국에서는 요즈음에 전혀 볼 수 없는 모습으로 수십 년 전의 우리 어릴 적 모습을 보니 신기하기도 하였다. 시청에 대형 현수막이 걸려있는데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축하하는 것이다.

▲ 세계문화유산인 추성하정 마을

이곳의 세계문화유산이 우리나라의 백제역사유적지구 다음에 간신히 통과된 말 많았던 명치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이다. 이곳 하기 시에만 5곳이 있는데 추성하정(萩城下町 -영주의 성 밑에 있는 무사들의 마을로 산업화의 동력을 이룸), 송하촌숙(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며 29세에 요절한 요시다 쇼인이 운영하던 학원이다.

‘존왕양이’를 강조한 요시다의 사상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가져왔으며 이 사람에 의해 조그만 마을인 하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들이 탄생한다.

안타깝게도 이 근대화의 인물들은 한국 침략에 앞장 서 우리나라와는 철천지원수의 관계이다. 예를 들면 이토오 히로부미, 민비를 시해한 삼포오루 등이다), 그 밖에 세계 유산으로 하기 반사로(용광로), 에비스가하나 조선소터, 오이타야마 타타라 제철유적 등이 이곳에 있다.

▲ 자가용과 같이 있는 인력거

세계 문화유산인 송하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마을의 집들과 온 거리가 마치 지붕 없는 박물관처럼 그대로 잘 보전되어 있었고 어느 곳에는 인력거를 세워 놓고 관광객을 태워주는 젊은이도 있다.

백여 년 전의 인력거를 지금도 운영하고 있으며 인력거 탑승비가 얼마인지 모르지만 힘들고 어렵고 창피한 한국의 3D 업종에나 해당되는 인력거꾼의 직업을 선택한 젊은 청년이 있다는 것이 한국의 현실과 비교해 보니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골목을 지나가다 보니 이등 방문이 공부했던 곳이라는 팻말도 보였고 이 지역인 야마구찌 현을 지배했던 모리 가문의 가옥과 임진왜란 때 한국을 침략한 모리가문의 시조인 모리휘원의 묘지팻말도 눈에 띠었다. 

▲ 도공의 작업

이어서 찾은 곳은 하기야끼의 대표적인 갤러리. 도자협회 회장의 설명에 의하면 한국 도공의 피나는 노력에 의해 하기야끼 다완이 발달했고 이 하기야끼의 특징은 쓰면 쓸수록 빛이 나고 고급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훌륭한 하기야끼를 계룡산 분청사기와 연관시켜 공주의 발전 방안을 찾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주인들과 이삼평 연구회가 고민하고 많이 연구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 된다.

▲ 도공의 손놀림

성산요(城山窯)라 불리는 이 지역의 대표적인 도자기 생산 공장을 찾았다. 가마와 물레 모든 제작 기계들이 다 갖추어져 있고 지금도 도공들이 실제 작업을 하고 있으며 그 작업하는 것들을 견학할 수 있는 곳이다.

물레를 돌리는 도공들의 모습에서 장인의 숨결을 느낄 것 같고 섬세한 손놀림에서 예술가의 경지를 느낄 것 같다. 그 앞에는 이곳 도자 공장에서 제작한 많은 하기야끼의 작품들이 전시, 판매되고 있었다.

이어서 찾은 곳은 도자기 축제장이다. 축제장의 위치를 보니 시민 체육관이다. 평소에는 시민체육관으로 이용하고 축제 기간 며칠은 도자기 전시 판매장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아주 합리적으로 공적인 공간을 잘 활용하는 것 같다. 하기야끼는 충분히 보았다고 생각하고 여기까지 왔으니 하기 박물관을 보자는 몇 사람의 의견이 있어 그렇게 결정하였다.

▲ 성산요 전시 판매장

하기 역에서 택시로 하기 박물관으로 향하였다. 귤 향기가 유난히 진한 마당 가운데를 통과해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하기의 자연환경, 인문환경 등을 잘 전시하였는데 나로써 특이하게 느낀 것은 이 지역의 생물을 표본화한 것이 인상 깊었다.

이 지역의 바다에서 나는 살고 있는 생물 그리고 해안가의 어패류의 표본이 다양하고 특이했으며 식물과 곤충 등의 다양한 표본을 보니 옛날 여름방학의 단골 숙제였던 식물 채집과 곤충채집이 생각났다.

▲ 체육관을 이용한 축제장

이곳 하기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들이 많이 나왔는데 사진을 보니 정계, 재계, 학계, 군인 등 수십 명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 한국과는 인연이 모두 좋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일본 사람들이 영어를 잘 못하는데 나이든 영어가이드 한 명이 내가 영어를 좀 알아듣는 것 같으니 나를 쫓아다니며 열심히 설명을 한다.

내가 민비를 시해한 나쁜 놈 ‘삼포오루’ 앞에서 한국인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니 자기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이 나쁜 놈이 민비를 잔인하게 살해했을 때는 군대 계급도 없는 일개 낭인이었는데 그 후 승승장구하여 중장까지 올라간 것이다.

한 시간에 걸쳐 재빨리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나를 안내했던 영어가이드가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노란 나스미깡을 하나 가져와서 선물로 준다. 아마도 내가 자기 이야기를 잘 경청해 주고 그의 싸인장에다 “친절한 안내에 감사 한다”라는 서명을 해 준 감사의 표시인 것 같다.   

▲ 하기 박물관 입구

시모노세끼로 돌아오는 길, 산에는 우리의 5월 말 쯤으로 추측되는 짙은 녹음이 우거져 있다. 나는 처음에 밤꽃이 핀 걸로 알았는데 가이드의 말로는 녹나무라고 한다. 그리고 쭉쭉 뻗은 삼나무, 편백나무가 울창하다. 모내기를 준비하고 있는 농토에는 비닐포대, 종이 한 조각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었는데 너무 깨끗하게 관리가 되어 얄미울 정도였다.

시모노세끼는 혼슈 섬의 서쪽 끝에 자리 잡은 인구 28만 명의 관광도시, 항구도시, 역사도시이다. 옛날부터 대륙을 향한 현관으로 역사상 중요한 장면 마다 나타나는 곳이다.

관문 해협에서 1,185년에 벌어진 원평대해전에서 평씨가 몰락하고 원씨가 득세하며 막부 시대를 열게 되는 것은 일본 역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또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와 대륙으로 침략하려는 야욕을 갖고 맺은 시모노세끼 조약도 이곳에서 맺어졌다.  

▲ 하기가 배출한 인물들

우리가 찾은 히노야마(火의 山)공원은 관문해협이 내려다보이는 약 268m의 산 정상에 자리 잡은 공원으로 지금 한창 붉은 철쭉이 만발해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고 우리는 이 공원의 회전 전망대에서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이곳이 요즈음 지진으로 인해 외국인들이 많이 찾지 않아 식당에는 우리 단체 손님 밖에 없는 것이었다. 시모노세끼의 유명한 바다요리는 복어, 성개, 고래 고기라 하는데 그 중 오늘은 복어 요리를 먹게 된다. 복어를 회로 떠왔는데 얼마나 얇게 회를 떴는지 살이 표시되지 않고 투명할 정도로 얇았다.

그 얇은 복어 회를 예쁘게 접시에 담아 내 왔는데 어느 사람의 말이 생각났다. “일본의 요리는 입맛으로 먹는 게 아니라 눈맛으로 먹는다.”

▲ 한국인의 원수 삼포오루

밤의 야경에 대하여 일본인의 홍보 책자에 이곳을 천만 불짜리 야경이라 설명하였다. 아마도 홍콩의 백만 불짜리 야경에 더 뻥을 쳐서 10배를 더 곱한 것 같다. 그런데 전망대에서 식사 중에 바라 본 관문대교와 시내 방향 그리고 세도 내해 쪽의 경관이 좋기는 하지만 홍콩만 하려면 한참 부족한 것 같다.

차라리 불빛이 들어오기 전 석양의 경치가 바다와 어울리어 더 멋진 모습이었고 불이 들어온 다음의 조명은 그다지 화려한 편은 못되었다. 

식사 후 나오는 길에 만화처럼 재미있게 그린 포스터 그림이 있어 사진을 찍고 알아보았는데 이것이 유명한 암류도(간류시마)의 결투이다. 암류도는 관문해협의 한 가운데 떠있는 주위가 1.6Km밖에 안 되는 작은 섬인데 에도 막부 초기, 1,612년 4월 13일에 일본 검술의 최고봉 두 명이 이곳에서 검으로 승부를 겨룬 곳이다.

▲ 히노야마에서 바라본 관문해협

당시 최고의 검객이었던 ‘미야모토 무사시’는 검을 두 자루 동시에 사용하는 이도류의 창시자였으며 당대 최고의 고수였고, 태산처럼 무겁게 움직이는 암류 검법을 만든 무사 ‘사사키 코지로’ 역시 ‘미야모토 무사시’에 못지 않는 희대의 검객이었다.

이 두 무사가 목숨을 건 대결을 펼쳐서 끝내는 사사키 코로지가 죽고 이 결투에서 이긴 무사시는 인생의 허무를 느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만화와 영화, 애니메이션 등 많은 스토리텔링을 만들었고 이를 바탕으로 이 지역의 관광이 활성화되어 손톱만한 이 조그만 섬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는다고 한다.

오늘은 일본 여행 마지막 날이다. 아침에 운동을 나가보니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바닷가를 달려보고 싶은데 바람이 엄청 거세고 비가 내려 할 수없이 호텔 현관에서 몸 풀기 운동으로 아침 운동을 대신하였다. 아침 식사는 화식과 양식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해 전날 티켓을 받는데 나는 화식을 선택했다.

▲ (사진 좌로부터)암류도의 결투, 해저 통로

다행히 보기에도 아주 고급스럽고 맛있어 보이는 일본식 요리가 나온다. “그 나라에 가서는 그 나라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라는 나의 여행 지론이 성공한 조그만 케이스이다. 식사 중 호텔에서 내려다보는 관문해협이 물살이 장난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명량 해협 못지않아 보이고 자그만 배는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고 떠내려가다가 간신히 지그재그로 물살을 거슬러 세토 내해 쪽으로 가고 있었다.

식사 후 칸몬 터널을 걸어서 통과하기로 하였다. 혼슈우와 큐우슈우의 두 섬을 연결하는 통로가 여러 가지 있는데 가장 큰 통로로 물위에 관문대교가 있고, 물 아래는 세 개의 길이 있다.

첫째로는 관문 철도로 1,936년에 시작하여 1,944년에 복선으로 개통됨으로 세계최초의 철도해저터널로 인정받고 있는 곳이다. 둘째로는 그 옆의 자동차 도로이고 셋째로는 자동차 도로 아래 약 780m의 인도 터널이 있어 이 터널을 걸어서 통과할 수 있게 하였다. 일본인들답게 입구에서 스탬프를 찍게 해 놓았고 건너서 스탬프를 찍으면 하나의 모양이 형성되게 하여 관광객의 흥미를 유도하였다.

▲ 자전거를 정렬해 놓은 모습

큐우슈우 쪽의 하카다. 하카다는 한문으로 복강(福岡)이라 쓰는데 이는 행복의 언덕이라는 뜻이다. 이 행복의 언덕 근처 구마모토에 4월에 엄청난 지진이 일어났고 우리 가이드가 지진이 난 후 나흘 뒤에 그곳을 다녀왔다고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가옥이 무너지고 폐허가 된 곳이 많았으며 공공 체육관 등의 공공시설에 사람들이 피난 생활을 하는데 그 난민들이 줄서서 밥한 공기, 된장 한 그릇, 미니 토마토와 오이 하나로 연명하며 생활하면서도 늘 입에 감사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단다.

▲ 하카다 타워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지진이 겨울에 안 오고 춥지 않은 봄에 와서 추위에 덜 고생하는 것이 감사하고 비가 오지 않아 노지에서 비 맞지 않음에 감사한다는 것이다.

어느 미국인 기자가 이 광경을 보고 “한 두 사람이 부처님 같은 마음을 가질 수는 있겠으나 수십 만 명이 어떻게 이런 생각을 가지고 행동 하는가! 정말 믿을 수 없고 불가사의 한 일이다”라고 쓴 글을 나도 읽어 보았다. 재난에 침착하고 철저하게 대처하는 이런 모습은 우리도 배워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하카다 타워는 철제 타워로 높이가 70m 정도 되는 그리 높지 않은 타워이다. 입장료가 무료이며 전망대에 올라가며 하카다항 부두와 페리호 선착장, 컨테이너 선착장등을 내려다 볼 수 있고 일층에서 박다항부두주식회사가 기증한 하카다 컨테이너 계류장 모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을 수 있다. 

▲ 식당 입구

점심은 하카다 전통 요리집인 치카에(稚加榮). 밖에서 바라보아도 멋진 곳이며 이곳도 줄서기는 매 일반이다. 식당에 들어가면 대형 수조가 있어 그때그때 신선한 수산물이 들어온 것을 보여주며 즉석에서 요리를 해주기도 한단다. 오늘은 깨끗한 한치가 수조에 가득하다.

은행나무 결이 시원스러운 카운터 좌석이 있고 방은 다다미방으로 전 좌석 약 200석이 된다. 개점 시간은 11시부터 4시 까지만 운영한다.

▲ 식당 내부의 홀

일본 정식과 소바 정식이 유명한 집으로 1,961년 창업하여 50년 넘게 운영되는 집인데 일본의 기모노를 입은 여인들의 서비스를 하는 운치가 있는 집이다. 가격은 생각보다 비싸지 않으며 우리가 주문한 일본 정식이 1,400엔 정도이니 먹을 만 한 가격인 것이다.

규슈 국립박물관. 규모가 어마어마한 건축물이다. 서정석 교수님의 말에 의하면 박물관의 전체 외형이 주변의 산과 잘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 건축되었다고 한다.

3층에 고대 왜인의 세계에서부터 시작하여 견당사와 실크로드, 중세의 인적 물적 교류, 다양한 에도문화 등의 11개의 관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가 생각하건대 내용물은 전체 규모에 비해 좀 부족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층에 특별전시를 한다기에 들렸더니 따로 티켓을 끊으라고 한다. 중국 서안에서 보았던 병마토용의 전시이기에 구태어 돈을 내고 또 보기는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텐만궁으로 향하였다.

▲ 우리가 시킨 점심특선

다자이후텐만구(太宰府天滿宮)는 일본 헤이안 시대 문인인 스가와라노 미치자네(菅原道眞)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곳이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를 모시는 텐만구는 일본 곳곳에 있지만 다자이후텐만구가 가장 유명하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묘가 안치된 자리에 얼마 뒤인 919년 다자이후텐만구가 창건되었기 때문이다. 대학 입시가 한국과 같이 치열한 일본이기에 매년 합격이나 학업 성취를 기원하는 많은 이들이 합격 부적을 사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또 1월 1일은 ‘오쇼가츠’라고 하여 새해의 운을 점치고 복을 기원하기 위해 전국에서 약 200만 명의 참배객이 줄을 잇는다.

▲ 다자이후 천만궁의 모습

이 사원 앞에 황소의 상이 있는데 이 소 동상의 머리를 만지면 사람의 머리가 좋아진다고 한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기에 이곳에 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머리를 쓰다듬었는지 황금색 몸체가 머리 부분만 하얗게 닳았다.

이 옆에 다자이후는 1,300여 년 전 큐슈 전체를 다스리던 관청 대재부(大宰府)가 있는 곳으로 그 관청의 터만 지나가는 차창에서 보는 것으로 관광을 끝내고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금번 여행에서 나는 도자기를 원 없이 구경하였고, 일본인들이 얼마나 도자기를 좋아하며, 그 도자기의 뿌리가 한국,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고장 공주에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 황소의 신

공주의 미래와 일본 그리고 도자기에 대해 우리 공주 사람들이 많이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끝으로 본 글을 마감한다. 또 하나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런 좋은 기회를 갖게 해준 금강뉴스 신용희 대표에게도 감사한 마음을 표한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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