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홍도 종이에 수묵 담채, 23.2×27.8cm, 간송미술관 소장

집 앞, 산꼭대기 나무사이에서 빛이 난다. 컴컴한 밤에 달이 산 너머 나무에 숨어 있다가 나무위로 쑤욱 올라와서 산위로 떠오른다. 해돋이가 우렁차다면 달 오름은 신비로움. 밤풍경은 먹을 풀어놓아 층층이 쌓아 올린 깊이가 있는 검은색이다.

 검은색 종이에 칼로 모양을 내서 그어놓은 초승달이 하루하루 지나며 살이 차오르면, 둥근 보름달이 되어 창호지 문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서 환한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 안에 비밀이야기를 갖는다. 밤하늘에 구름이라도 지나가면 그 이야기는 더욱 풍성해진다.

달밤에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방 안을 들여다보자. 매우큰 새의 깃털위에 앉은 듯이 커다란 파초 위에 무릎을 세우고 버선을 벗은 채로 바지를 말아 올리고 소매도 걷어 부치고 앉아 두 손으로 생황을 꼭 쥐고 불고 있다. 엷은 먹색으로 그린 탕건 안에 상투가 그대로 보이고 새의 깃털처럼 머리카락이 뒷목덜미에 삐쳐 나왔다.

그림을 그렸는지 글을 썼는지 족자 두 개를 얌전히 말아놓고 벼루와 붓도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생황을 부느라고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둥글게 굽은 등 뒤에는 술 단지처럼 보이는 큰 병과 잔도 있다. 작업을 끝내고 술잔을 가득 채워 단숨에 들이켠 그는 찾아온 달빛을 벗 삼아서 생황을 꺼내 불고 있다.

月堂凄切乘龍吟 월당처절승용음, 달빛 비추는 방에 생황소리가 용의 울음보다 애절하다. 화제는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나업(9세기 후반)의 생황시(笙篁詩) 중 일부이다.

단원의 스승인 표암 강세황은 "사능(士能-金弘道의 子)은 얼굴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마음이 툭 터져 깨끗하니…… 성품이 또한 거문고와 피리의 고아한 소리를 좋아하여 꽃피고 달 밝은 밤이면 때때로 한두 곡조를 희롱하며 스스로 즐기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달 밝은 밤에 파초위에 앉아 생황을 부는 그림 속 주인공은 단원 자신일 것이다.

생황은 아악(雅樂)에 쓰는 관악기이다. 예전에는 박으로 만들었고 요즘은 나무나 쇠로 박 모양 통을 만들어, 17개의 대나무 관을 꽂고 통 옆에 만든 숨구멍을 불면 관 아래에 붙인 금속 떨림판(황엽篁葉)이 떨리고 이 소리가 관을 통해 커진다.

<세종실록>을 보면 ‘길고 짧은 여러 죽관이 가지런하지 않게 바가지 속에 꽂혀 있다 마치 봄볕에 생물이 돋아나는 형상을 상징하며 그것이 물건을 생하는 뜻이 있기에 이를 생(笙)이라 부르며 바가지를 몸으로 삼은 악기이기 때문에 이를 포(匏)라고 부른다.’

생물이 돋아나는 형상을 한 악기라니 정말 멋있다. 17관 생황은 주로 전통음악에 쓰이고 24관 37관생황은 클래식이나 현대음악 재즈 탱고 등 다양한 연주를 한다. 풍금, 아코디언, 반도네온과 같은 원리 악기로 한 번에 여러 음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음색이 더 신비롭다.

날씨는 더운데 그나마 선선한 밤에 편한 옷차림으로 커다란 파초 잎을 돗자리 삼아 앉아서, 그림을 그려 놓고 농주 한잔으로 달빛을 희롱하며 생황을 분다. 그는 그림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 그림은 김홍도의 작품이 아니라는 얘기도 있다.

필선이나 표현이 서툴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림의 진위를 가리는 건 전문가의 몫이고 우리는 그림의 주인공이 되어 무더운 달밤에 시원하게 노래라도 한곡 불러보자. 큰 소리로. 아니 올 여름에 새롭게 악기를 하나 배우며 더위를 잊고 몰두하는 것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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