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길의 일본 답사기

■ 야메시 전방후원분과 아리타 도자기 유적

새벽 3시 반에 일어나 대충 준비를 하고 4시 반에 공주대로 가서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신용희 대표 등 같이 갈 일행들과 인사를 하고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탔다.

수정식당 김태순 사장님이 준비했다는 쑥 인절미로 아침 식사를 해결하고 졸면서 가다보니 인천 공항에 7시 좀 넘어 도착했다. 거기서 합류한 분들과 인사를 하고 나니 일행이 30명이 되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9시에 출발하는 아시아나 항공으로 10시 반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가이드 정명희 선생을 만나 버스를 타고 야메시로 향했다. 반갑게 맞아 주는 ‘무령왕을 생각하는 모임’ 회원을 만나 인사를 하고, 그곳 관장의 안내로 이와토야마라는 전방후원분 전시관을 관람했다. 그리고 그분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도시락으로 대접을 잘 받았다.

나는 그 분들과 처음 만나는 사이지만 다른 분들은 이미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어 서로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했는데, 내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한국말을 못하고, 나는 일본 말을 못해서 스마트 폰 번역기를 이용해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다. 연세가 지긋한 그분들은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공주 사람들과 교류를 이어 오고 있다 한다.

야메시의 '무령왕을 생각하는 모임'과 교류

점심을 먹고 나서 전방후원분을 구경했다.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우리나라 고분들의 몇 배 크기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일본 문화의 한국 진출을 주장하는 근거로 내세우기도 한다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더 오래된 그런 형태의 무덤들이 발견되어 아직도 논란 중이라고 한다.

봉분 위에 나무가 무성하여 무덤인 줄 잘 모르겠는데, 일본은 나무를 베지 않고 그대로 도는 풍습이 있다 한다. 무덤의 주인공은 지방의 권력자로 반란을 일으켰던 이와이라는 무인으로 보고 있다는데, 아직 발굴이 이루어지 않아 정확한 것은 잘 모르고 있다 한다.

동행한 전문가인 서 교수의 설명을 들으며 그 무덤을 한 바퀴 돌아보고, 중간에 우리나라 제주도에 올레 길을 만든 사람이 설계하여 조성했다는 표식도 반갑게 구경했다. 올레길 표식과 명칭을 사용하는 대가를 한국에 지불하고 있다 하니 요즘은 아이디어가 돈을 버는 수단이 되는 시대인가 보다.

거기 모였던 분들과 아쉬운 작별을 하고 아리타로 향했다.

이와토야마 고분 답사

낮에는 햇볕이 따가울 정도였다. 도자기의 고장 아리타는 전에 한 번 왔던 곳이라 예전 생각이 나기도 했다. 우리는 거기 공동묘지에 있는 이삼평 공의 묘로 올라가 참배를 했다. 임진왜란 즈음에 한국에서 잡혀와 일본 도자기 역사를 새로 연 이삼평 공은 공주 사람이다.

계룡산 근처에서 살았던 그는 먼 타국에 끌려와서도 자신의 도자기 기술을 잘 살려 일본에 없던 도자기를 만들어 내고 후진을 양성하여 신사에 모셔질 정도로 추앙받고 있는 인물이다. 일본 이름도 글자는 다르지만 금강이라고 하여 근본을 잊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위쪽이 떨어져 나가 아래쪽만 남아 있는 비석의 모습이 마치 타국에 잡혀와 있던 터지를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이 짠했다. 바로 옆에는 그가 거주하며 도자기를 만들고 판매했다는 집터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한다. 거기서 멀지 않은 언덕에 가마터가 발굴되어 있기도 했다.

아리타 이삼평 묘를 찾아 참배하는 일행.

다시 이동하여 이곳 현에서 세운 구주도자문화관을 관람했다. 전에 한 번 와서 보았던 곳이라 그다지 새롭지는 않았다. 일본에서 만들어 유럽으로 수출했다는 도자기들이 다시 수입되어 전시된 곳도 있었는데, 일본은 이 도자기 무역으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고 한다.

30분이 되면 울리는 도자기로 만든 특이한 시계는 관람객들의 인기 상품이 되고 있었다. 거기서 나와 나가사키로 향했다. 일승관이라는 호텔에 들어가 방을 배정받았는데 나는 전에 환경부 차관을 지냈고, 또 공주영상대 학장을 맡았던 분과 룸메이트가 되었다.

직접 학교 선배는 아니지만 연세가 나보다 7,8세 위인 분과 한 방을 사용하자니 내가 그 분 시중을 들어야 할 처지가 되어 좀 난감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생 선배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는 동안 배울 것도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기도 했다. 

■ 하시마(군함도)와 오우라 성당, 26성인 순교 기념관, 그리고 나가사키 원폭 기념관

주민이 철수한 군함도 건물 잔해. 

아침 식사 후 나가사키 항으로 출발했다. 마침 학생들의 등교 시간과 직장인들의 출근 시간이 겹쳐 좁은 도로는 매우 복잡했다. 그럼에도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들 덕분에 그리 혼잡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항구에 도착하여 군함도로 가는 배에 탔다.

어제 차에서 가이드가 미리 나눠 주고 서명을 받은 안전 수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당부가 잇따랐다. 주로 술 마시면 안 된다는 것, 담배 피우지 말라는 것, 소란 피우지 말라는 것들이었다.

군함도의 본래 이름은 하시마다. 작은 섬에 불과했던 그곳이 유명해져 관광지가 된 것은  작년 이 섬을 포함한 몇 개의 유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개인 기업인 미쓰비시라는 곳에서 메이지 유신 무렵 이곳을 거점으로 하여 석탄을 캐내는 작업을 벌였던 곳이다.

그런 일이야 우리로서는 뭐라 할 수 없는 기업 활동이겠지만, 문제는 그곳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강제로 끌려와 노역을 했다는 사실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군함도 지도

그런데 일본 정부나 해당 기업에서는 다른 강제 동원과 마찬가지로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또 사과도 하지 않고 있다. 물론 피해 보상 같은 것은 말도 꺼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또한 등록 추진 과정에서 뻔뻔하게도 이 사실을 아예 빼 버리고 근대 산업화 문화만을 거론하는 몰염치한 태도를 고수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작년 이 유산의 유네스코 등록 과정에서 강하게 반대 의사를 전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 섬의 건축물과 다른 곳의 조선소, 공장 시설 등이 함께 묶여 등록이 결정되었지만, 당시 공개적으로 조선인의 강제 동원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약속은 아직 이행되지 않고 있다. 그들의 오만과 철면피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름은 크루즈로 되어 있으나 우리를 태운 작은 규모의 배는 빠른 속도로 바다를 가르고 달렸다. 섬에 도착하기 전 중간쯤에서 배가 기착했다. 다카시마라는 작은 섬이다.

우리는 배에서 내려 군함도 석탄 전시관으로 들어갔다. 전시관 입구에는 군함도를 축소한 모형이 있었는데, 해설사가 일본어로 설명을 하고 가이드가 통역을 해 주었다. 원래 섬은 작은 크기였는데 3차에 걸쳐 바다를 매립하여 현재의 크기로 확장되었다고 했다.

현재 크기는 가로 세로 각각 480미터와 16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전시관 안에는 당시 탄광 광부들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여러 자료와 그들이 사용했던 채탄 작업 도구들이 1층과 2층에 잘 전시되어 있었다.

이 섬은 필자 개인적으로 매우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 필자의 선친은 일제 말기 징용으로 끌려와 고생을 하시다가 해방된 뒤 귀국하셨는데, 필자가 어렸을 때 동네 사람들이 모인 사랑방에서 그 얘기를 자주 하셨다.

당시에는 나이도 어리고 그런 문제에 관심이 없어 그저 재미있는 무용담 정도로 들었었는데, 최근 이 섬에 관한 여러 보도와 간혹 공개되는 자료를 통해 볼 때 선친이 끌려왔던 곳은 이 섬이 분명하다고 생각된다.

그때 필자가 들었던 얘기 가운데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큐슈 탄광이라는 말과 바다 밑으로 수백 길을 들어가 작업을 했다는 말씀이다. 그런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선친께서 끌려와 험한 일을 하셨던 곳이 바로 이 섬이라는 사실은 명백하다 하겠다.

안타까운 것은 좀 더 자세하게 그 말씀을 듣고 기록으로 남겼어야 하는데, 당시에는 그런 생각이 거의 없었고, 또 이승만 정권 시절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을 때 일본 사람과 싸워 이겼다는 식의 말씀을 세월이 좀 지나 일본과 친선을 추구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선 뒤에는 거의 하지 않으셔서 그 얘기를 자세히 들을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문제에 관심이 생겼을 때는 선친께서 이미 작고하신 뒤라 더욱 아쉽기만 하다. 당시 얘기를 들었던 동네 어른들도 대부분 고인이 되셔서 찾아가 물을 길도 없으니 후회가 막심할 뿐이다.

군함도 자료관에는 석탄을 캘때 사용한 도구와 복장을 전시하고 있다.

그 섬을 떠나 다시 하시마로 향했다. 군함도라는 이름은 몇 차례 매립을 하여 확장된 섬의 모양이 일본에서 건조한 군함과 그 모양이 비슷하여 붙여진 별칭이다. 배는 군함도에 접근하여 관람객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을 보여주기 위해 섬을 한 바퀴를 돌았다. 앙상한 뼈대의 거대한 건물들이 섬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었다.

배가 섬에 접안하여 우리는 미리 나눠줘 목에 건 상륙 허가증을 일일이 확인 받고 섬으로 올라갔다. 철저하게 통제하여 허가받지 않은 어떤 사람도 접근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동행한 해설사가 우리를 안내하며 설명을 했다. 가이드는 요지만 통역을 해주어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해설사의 말에 따르면 이 작은 섬은 도쿄의 약 열 배에 이르는 인구 밀도를 보였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일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 사람들을 위해 약 백여 년 전에 6층 높이의 일본 최초의 철근 콘크리트 집단 거주 시설(아파트)이 지어졌고, 또 섬의 맨 꼭대기에는 사람들이 사용할 물을 보관하는 엄청난 크기의 물탱크가 있었으며, 관리자들의 숙소는 어디나 그렇듯 전망 좋은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또 학생들의 학업을 위해 초중등학교도 있었고, 병원과 은행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섬에 사는 사람들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극장과 파친코 시설까지 있었다고 한다. 해설사는 이 섬이 마치 많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곳처럼 분식하고 있었지만, 그 말을 듣는 내내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강제로 끌려와 고생했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어 좀 화가 나기도 하고, 약한 나라 백성들의 비애가 떠올라 비감에 젖기도 했다.

섬 관람을 마치고 다시 배에 올라 나가사키 항구로 돌아왔다. 오고가는 배 위에서 작년에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록된 조선소와 다른 유적들도 먼발치에서 구경했다.

군함도 원경.

배에서 내려 점심을 먹고 이번 답사의 주제이기도 한 천주교 유적 답사에 나섰다. 동행한 충남대 김수태 교수님이 교회사를 전공하신 전문가라 그 분의 설명을 오고가는 버스 안에서 자세히 들었고, 이제 그 유적을 찾아가는 것이다. 맨 먼저 들른 곳은 오우라 천주교회였다.

우리나라보다 2백여 년 먼저 일본에 전해진 천주교는 처음에 권력자들이 의해 우호적으로 인정되었으나 권력 교체 후 엄청난 박해에 시달리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붙잡혀 처형당해 순교했으며, 신자들은 숨어서 자신들의 신앙을 은밀하게 이어갔다.

드러내 놓고 신앙을 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기존 불교나 다른 신앙으로 위장하여 비밀리에 믿음을 전수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문호 개방과 더불어 서양인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고, 그들에 의해 신앙이 공식화되자 수백 년 숨어 면면히 전해지던 신자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바로 이 오우라 교회가 그 숨어 있던 신자들 150명이 처음으로 자신들의 신분을 드러냈던 곳이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교회가 바로 이곳이다.

이 기념 교회 옆에는 수도원 시설도 있었고, 또 그 옆 전시실에는 박해 시절의 자료를 포함해 어떻게 일본의 천주교가 이어져 왔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기억에 남는 특이한 전시물은 성모 마리아 상을 불교의 관세음보살과 동일하게 만들어 신앙을 이어가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었는데, 결국 마리아나 관세음보살이나 사람들을 편안하게 하고 신념을 이어가게 하는 힘의 원천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밖에는 불볕더위가 따갑게 내려쬐고 있었는데,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킨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 같은 생각이 들어 괴롭기보다 경건한 생각을 갖게 하기도 했다.

나가사키의 오우라성당.

내려오다가 성당과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콜베 신부 기념실에 들렀다. 그는 일본에 와서 사제로 활동하다가 유럽으로 돌아가 나치 박해 시절 유대인 학살 때 그들을 위로하고 고통을 함께 하며 수용소에서 사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한 유대인 청년이 죽을 차례가 되어 끌려 나가며 자신은 가족을 만나야 한다면서 죽을 수 없다고 호소하자 감독자들에게 내가 저 사람 대신 죽으면 안 되겠느냐고 해서 스스로 세상을 떠난 분이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떠난 청년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분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초기 천주교는 보살상을 마리아나 예수상으로 모셨다.

그곳 관람을 마치고 다시 이동하여 순교기념관에 들렀다. 여기는 16세기 말 천주교 박해 시절 최초로 희생당한 26명의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기념관이다. 당시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전역의 천주교 신자를 이곳 나가사키 언덕으로 끌고 와 처형했는데, 26명의 순교자 중에는 외국인 6명도 포함되어 있었고 일본인 20명 중에는 어린이 3명도 끼어 있었다.

그 중 한 분인 필립보라는 멕시코 출신 신부는 필리핀으로 가던 도중 배가 난파하여 일본에 기착하였는데, 그는 24세의 나이에 여기로 끌려와 십자가에 매달려 순교했다. 그는 나중에 멕시코 최초의 성인으로 시성되는데, 그런 이유로 1962년에 세워진 이곳 기념 성당은 성 필립보 성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 성당은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의 영향을 받은 독특한 외관에 이곳 특산인 도자기 가마의 이미지로 지어져 매우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서 있다. 기념관에는 각종 순교 관련 각종 도구와 자료가 잘 정비되어 전시되고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26 성인 순교기념물

다시 이동하여 나가사키 원폭 기념관으로 향했다. 2차 대전 말기 미국이 일보 본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두 개의 원자폭탄을 투하하여 수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데, 여러 해 전에 이어 두 번째 방문하는 곳임에도 왜 권력자들의 잘못된 판단과 국제 이해 관계로 일어난 전쟁에서 아무 죄 없는 노인과 어린이, 여성들이 죽고 다치는 피해를 당해야 하는지, 가슴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전시된 자료들은 이미 보았던 것이기에 새로울 것이 없었으나 세계 핵무기 보유 현황을 국가별로 정리해 놓은 자료에 북한이 포함되어 있는 게 이채로웠다. 우리 정부의 생각과는 달리 이미 북한은 핵보유국으로 공식화되고 있는 것 같았다.

원폭기념관의 폭탄 조형물이 관람객을 위협(?)하는듯 하다.

전시관을 나와 핵무기 투하 폭심지라는 곳에 건립되어 있는 희생자 봉안 탑 앞에 가서 묵념을 올리고, 동행한 전문가들로부터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원폭을 투하한 핵심적 이유가 오키나와 점령을 위한 전투에서 미군이 10만 명이나 전사한 사실 때문이라는 설명과 또 이곳 기념관을 포함한 일본의 대처 방식에 원폭 투하로 인한 피해 사실은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반면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일본의 책임이나 원인 같은 것은 하나도 들어있지 않다는 설명을 들었다.

겉으로 친절하고 겸손한 일본 사람들이지만 자신의 책임 인정이나 지도자들의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점은 이 나라의 미래에 대한 희망이 별로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과거 잘못에 대한 반성이 없다는 것은 동일한 일을 또 벌일 수 있다는 증좌 아닌가. 이것은 개인이나 국가나 다를 수 없는 문제다.

어둠을 뚫고 버스는 한 시간 넘게 달려 사세보라는 곳에 도착했다. 작은 도시의 가파른 언덕 위에 지어진 호텔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공부하는 젊은 학생들처럼 유적 답사에 강행군을 계속하여 나이 든 것을 실감하게 하는 하루였다.  

■ 히라도 다비라 교회, 성 자비에르 성당, 송포사료박물관, 그리고 가라츠 도자기와 가가미야마

아침을 먹고 히라도를 향해 출발했다. 히라도에는 여러 천주교 유적이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처음 들른 곳은 다비라라는 이름의 교회다. 작년에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록 신청을 했다가 마지막에 자진 철회했던 곳인데, 그만큼 일본 천주교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이라 한다. 성당은 시골에 위치한 작은 규모인데도 현재 신자가 6,7백 명에 이르고 정기 미사에도 수백 명씩 참석한다고 한다.

▲ 다비라 성당

안내하는 분이 교회를 소개하는 자료를 나눠주고 성당 안에 들어가 건물의 특징과 역사성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동행한 분의 말씀에 우리나라의 오랜 역사를 가진 성당에 가도 자료를 구하기 어려운데, 일본은 이런 작은 교회도 그런 게 잘 되어 있다는 설명에 약간 부럽기도 하도 또 좀 창피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성당 밖 바로 옆에는 오랜 역사를 상징하듯 수많은 유해를 모신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매우 깨끗하고 정성스럽게 잘 관리되고 있었다. 우리와 달리 묘지가 일상 생활공간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이 나라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인식의 차이인 것도 같았다.

짜글짜글 끓는 햇볕 속에 이동하여 버스에서 내려 송포사료박물관으로 갔다. 이곳 영주였던 마쓰라라는 가문의 역사 자료를 전시하는 곳이라고 한다. 아직 일본이 통일되기 전에 각 지역에는 유력자들이 군웅할거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이 지역의 유력한 권력자였던 그는 다른 세력들을 진압하여 강력한 체제를 확립하고, 외국과의 교역을 통해 형성한 막강한 재력을 동원하여 조선 정벌(임진왜란)에 나서는 세력에 동참하기도 했다.

이곳 히라도의 역사와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전시하는 이 박물관에는 건물 자체가 전통 일본의 오래된 가옥이어서 옛 정취가 잘 드러나는 곳이었다.

송포사료박물관 전경.

그곳 관람을 마치고 다시 도보로 이동하여 성 프란체스코 자비에르(포르투갈 이름으로는  하비에르) 기념 교회로 갔다. 포르투갈 사람인 그는 인도에서 사제로 활동하다가 새로운 포교 대상지를 물색하던 중 일본으로 오게 된다.

1549년 그가 처음 상륙한 곳은 가고시마였으나 곧 이곳 히라도로 옮겨 선교 활동을 하였다. 영주가 허락한 폐사된 절에서 일본 최초로 세례를 주어 정식 신자가 된 사람이 수백 명이 이르렀다 한다.

그는 교토로 가서 일본 최고 지도자로부터 선교를 허락받고자 했으나 실패하고 히라도로 돌아왔고, 다시 인도로 가서 중국 진출을 준비하여 광동 근처의 상촨에 도착, 작은 성당을 세우고 전교를 하던 중 열병에 걸려 1552년에 선종하였다.

그의 일본에서의 활동을 기리기 위해 세 차례나 방문했던 히라도의 이 성당 앞에 1971년 기념상이 세워졌다. 1931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진 이 아름다운 성당은 그 이후 성 프란체스코 자비에르 기념 성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히라도 성 자비에르 성당의 아름다운 전경

자비에르 성당의 내부에서 예를 올리는 일행.

버스로 이동하여 항구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가라츠 도자 유적을 찾았다. 한국의 철화 분청과 연관이 깊다는 이곳 가라츠 도자기는 그 역사적 전통과 함께 고급스러움으로 유명하다. 먼저 전통 도자기를 전시 판매하는 곳에 들러 자세한 안내와 설명을 들었다.

대대로 이어지는 도자기 제작은 수백 년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전시된 것들 중에는 도자기에 문외한인 무식한 내 눈으로 보아 별것 아닌 것 같은데도 수백 만 원에서 수천 만 원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

그들에게는 대단히 실례되는 표현이겠으나 우리나라 개밥 그릇 같아 보이는 것이 그만한 가격에 팔리고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전시관을 나와 좀 걸어서 그 도자기를 제작하고 굽는 작업실과 가마도 구경했다. 우리나라 도자기 가마와 똑 같다는 전문가의 말씀도 있었다.

가라츠 나가자토 14대 손 공방에 전시된 작품. 우리의 계룡산철화분청사기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다리도 아프고 따가운 햇볕에 목도 타는데, 아직 일정이 남았다고 다시 이동을 하였다. 주차장에서 내려 또 좀 걸어서 도착한 곳은 가가미야마라는 곳이다. 우리말로 하면 거울 산이라는 뜻이 되겠는데,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바다가 거울처럼 맑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바다 경치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바닷가로 길게 이어져 있는 백만 그루에 이른다는 소나무 숲이다. 무지개 숲이라고도 한다는데, 몇 백 년 전 방파 기능용으로 심은 소나무들이 거목이 되고 그 나무들이 다시 대를 이어 아름답고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전망대 앞에 세워놓은 슬픈 전설의 주인공 좌용희라는 여인의 동상은 애잔하기는커녕 뭇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전락한듯하여 더 안쓰러워 보였다.

가가미야마에서 본 가라츠시 전경. 해풍을 막지위한 방풍림이 지금은 가라츠의 명물이 되어 '무지개 숲'이라는 이름으로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가가미야마의 사요히메 동상. 가라츠, 무령왕과 함께 별 이름을 얻게 된 사요히메는 백제부흥운동 당시 약혼자를 전장으로 보내고 기다리다 죽은 가라츠 전설 속 여인이다.

호텔에 들어가 방을 배정받고 잠시 쉬다가 약간 떨어진 소나무 숲속의 회관으로 이동하여 무령왕실행위원회가 마련한 환영식에 참석했다. 이 단체는 해마다 공주의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와 공동으로 탄신제를 올리는 한편 공주시와 지속적으로 교류가 이어지고 있어서 구면인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탄신제의 규모가 해마다 커져서 익히 잘 알고 있는 공주의 초청 공연 단체인 웅진문화회와 또 다른 백제 관련 단체인 곤지왕(무령왕의 아버지라는 설도 있음)네크워크의 사람들도 함께 하여 백 여 명이 넘는 사람들로 성황을 이루었다. 가라츠 시장을 비롯한 많은 현지 인사들이 참석하여 따뜻한 환대를 해 주어 반갑고 고마웠다. 우리 측에서 미리 모금하여 준비한 구마모토 지진 피해 위로 성금도 전달했다.

정성이 담긴 음식과 술, 그리고 춤과 노래가 이어지는 정겹고 흥겨운 자리가 이어졌다. 이런 민간 교류가 양국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간혹 마찰을 일으키는 두 나라 사이의 간격을 좁히고 이해를 증진하는 의미로 승화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구마모토 지진 성금을 전달하는 정영일 회장(중앙). 죄측은 가라츠무령왕네트워크위원회 미야자키 회장, 우측은 가라츠시 사카이 토시유키 시장.

만찬에서 백제옷을 입은 공주팀이 인사하는 모습.

■ 무령왕, 그 위대함과 비애 앞에 서다

아침에 일어나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던 날부터 내내 맑았던 날씨가 여정의 마지막 날에 비를 동반하니 다른 나라의 외딴 섬에서 태어난 무령왕의 비애가 하늘에 닿았음인가. 고대 무덤 유적 가운데 유일하게 그 주인공이 확실히 밝혀진 무령왕은 일본 사료에 가카라시마라는 섬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날짜가 6월 1일이다. 그래서 매년 6월의 첫 주말에 탄신제를 올리고 있다.

무령왕의 탄생에 관한 기록은 국내에 확실한 자료가 없는 형편이고, 개로왕이 그 아버지인지, 또는 그 동생인 곤지왕이 그 아버지인지 아직도 논란 중에 있다. 당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여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그 선대의 왕들이 불의의 죽음을 당하거나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기였는데, 그 탄생이나 성장 과정이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무령왕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남아 있는 기록에 보면 그는 키가 훤칠하고 그림처럼 잘 생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는 정치적 수완 또한 탁월했다. 내적으로는 불안하고 혼란했던 왕실을 안정시키고, 중국이나 일본과의 왕성한 교류로 대외 관계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그가 왕위에 있는 23년 동안 백제는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고 또 문화적으로도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융성과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사실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5천여 점의 유물들이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2006년 6월 25일 가카라시마 언덕에 양국의 성금으로 세운 민간교류의 상징 무령왕기념비.

이런 무령왕에 대한 기념사업이나 그 의미를 현재에 되살리려는 노력이 국내에서조차 거의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나마 이곳 작은 섬에 사는 분들이 나서서 매년 탄신제를 올리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는 게 다행이라 할까.

공주의 민간단체에서 이런 사실을 알고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이곳에 탄신 기념비를 세운 게 2006년이다. 그 이후 양국 민간단체의 교류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올해는 기념비 건립 10주년, 그리고 탄신제 공동 개최 1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나고야 항에서 우리 일행을 태운 배는 30여분 바다를 달려 가카라시마 섬에 도착했다. 부두 방파제에는 해마다 양국의 어린이들이 작업하여 남긴 그림과 함께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글씨가 보여 반가웠다. 배에서 내리니 이곳 주민들인 어른과 어린이들이 나와 정에 넘치도록 반갑게 진심어린 환영을 해 주었다.

그동안 교류로 인해 쌓인 우정과 신뢰의 결과일 것이다. 여러 차례 행사에 참가하여 구면인 분들은 마치 오래 만나지 못했던 가족을 해후하는 것처럼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여객선에서 내려 가카라시마로 들어가며 현지 주민의 환영에 답하는 공주팀. 

한글로 된 현수막을 들고 공주팀을 환영하는 섬 어린이와 주민.

몇 걸음 올라가니 오늘 행사를 위해 설치된 천막들과 현지 음식을 판매하는 작은 규모의 천막들이 줄 지어 서 있어서 마치 시골 장날 풍경 같았다. 약간 오르막인 언덕에는 10년 전에 세워진 기념비가 서 있었다. 전축분인 공주의 무령왕릉 입구 모양을 형상화한 기념비는 김정헌 화백의 작품인데, 전체를 공주에서 나는 돌로 제작하여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이곳으로 운반한 후 재조립하여 세웠다고 한다.

제작비용을 모금할 때 약간의 성금을 보탰던 나는 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당일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 일을 주관했던 윤용혁 교수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천 오백여 년이 지나서야 이런 기념비가 세워지는 것에 대한 무령왕의 감응인 듯했다고 말해서 정말 그럴싸한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행사 시작 전에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동굴을 보기 위해 몇 분 일행과 함께 나섰다. 잘 정비된 도로를 좀 올라가 다시 바닷가로 내려가니 태어난 아기를 씻겼다는 우물과 바닷가를 향한 작은 동굴이 나타났다. 바다에는 떠밀려온 쓰레기들이 좀 있었으나 동굴 주변은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었고, 금줄 뒤로 탄신지임을 알리는 명패와 작은 제단 같은 게 마련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 앞에 서서 잠시 묵념을 올렸다. 아마도 참배객들을 위한 배려 같기는 했으나, 절에 가면 볼 수 있는 불전함 같은 것이 그 앞에 놓여 있는 게 좀 생뚱맞은 일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 주변이나 오고 가는 길 가에는 동백나무들이 많았다. 이 섬을 일명 동백섬이라고도 한다는데, 이 열매로 짠 기름이 이 섬의 특산물이라고 한다.

오비야동굴의 무령왕 탄생지임을 알리는 위패.

이광복 화가가 무령왕 위패 앞에서 일행을 대표해서 큰 절을 올리고 있다.  

다시 행사장으로 돌아와 탄신제에 참석했다. 몇 가지 과일과 음식이 차려진 제단 앞에서 이 나라 신사의 제례 형식으로 제사가 진행되었는데, 고등학교 영어 교사라는 신관이 주재했다. 신사의 신관은 보통 대물림으로 이어진다는데, 그 아버지가 사정이 있어 아들이 대신한다고 했다. 전통 의상을 입은 그는 특이한 가락으로 무슨 말을 한참 동안 이어갔다. 아마 불교식으로 말하면 염불이나 독경에 해당되는 내용인 것 같았다.

이곳 시장을 대신한 분과 교육청 관계자, 그리고 현지 학교 교장, 섬 주민 대표, 한국 측의 정 회장님 등의 인사말에 이어 헌화 순서가 이어졌다.

헌화는 우리 상식과 달리 꽃이 아니라 얼핏 동백나무 같아 보이는 나뭇가지를 흰 종이로 장식한 것으로 했는데, 일본 사람들은 신사 참배하듯 그것을 제단에 올리고 손뼉을 치고 난 후 묵념하는 식으로 했고, 한국 분들은 신관이 나눠주는 나뭇가지를 제단에 올리고 묵념만 올리는 식으로 했다. 형식이야 서로 달라도 왕의 영령 앞에 선 그 마음만은 똑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무령왕축제 중 제례 장면.

제사가 끝난 후 아래 공터에 마련된 행사장에서 몇 가지의 공연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계속 내리는 비 때문에 인근의 학교 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진행한다고 해서 모두 그쪽으로 이동했다. 초중학 통합학교인 그 강당에서 첫 순서로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물놀이 팀의 공연이 있었고, 이어서 초청 공연인 무령왕 탄생 과정을 내용으로 하는 연극 공연이 있었다.

공주에서 활동하고 있는 웅진문화회 사람들이 기획과 연출, 그리고 배우로 출연하여 더욱 관심 있게 보았는데, 내용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가 꽤 수준이 높은 공연이어서 눈시울이 약간 젖기도 했다.

그 다음 순서로 일본 어린이들이 출연하는 전통 춤 공연이 절도가 있으면서도 흥겹게 펼쳐졌고, 우리 일행이 잠깐 연습하여 공연한 백제 춤과 노래가 관객들의 박수와 뜨거운 호응 속에 이어졌다. 흥이 난 관객들은 함께 나와 춤을 추기도 했다.

공연이 끝난 후 다시 행사장 천막으로 돌아와 섬 주민들이 정성스럽게 준비한 점심을 먹었다.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오징어와 전복, 꽁치 등을 숯불에 구워 채소와 곁들여 먹었는데, 그 맛이 일품이었다. 나는 술을 못 마시지만 회장님이 특별히 준비하신 좋은 술은 일행들의 입맛을 더욱 돋우었고, 해물 바비큐가 맛이 좋아 함께 제공된 도시락 밥 한 그릇을 금세 싹 비웠다. 함께 참가한 다른 팀의 춤 공연이 이어졌고, 흥이 난 우리 일행들도 춤과 노래로 축제 분위기를 이어갔다.

웅진문화회의 '무령왕 탄생 이야기' 공연.

 공주와 가라츠 시민이 함께 백제춤을 추는 모습.

흥겨운 자리가 계속 이어졌으나 다음으로 예정된 일정의 시각이 되어 우리는 아쉬운 마음으로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배에 올라 작별을 아쉬워하는 섬 주민들과 가을의 백제문화제 때 다시 만나기로 기약을 하고 섬을 떠났다. 국적과 민족은 달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 진심으로 교류하며 쌓아가는 관계는 가족과 같은 따뜻함으로 승화되기 마련이다.

잠시 만나 어울리다가 헤어지는 사이인데도 발길이 무겁고 눈가가 젖어드는 것은 오직 인간이기에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그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신 대표가 야심차게 준비한 색 테이프 퍼포먼스는 줄곧 내리는 비 때문에 완전하게 시행되지는 못했으나, 일부 참가자들이 배에서 던져 섬 주민들과 맞잡은 색종이 줄처럼 끈끈하고 강인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기도 했다.

양국 주민이 오색테이프로 작별을 아쉬워하며 내년을 기약하는 모습.

다시 항구로 돌아와 더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 마지막 일정인 나고야 박물관을 찾았다. 그곳 관장과 학예사가 나와 우리를 맞아 친절하게 안내와 설명을 해 주었다.

전시된 유물들 가운데에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것이 많았는데, 한글로 된 안내문 중에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고통을 주었다는 글귀와 ‘임진왜란’이라는 용어가 뚜렷하여 그게 이 나라사람들의 진심인지, 아니면 한국 관광객을 위한 시늉만의 서비스인지 알 수 없었다. 비 때문에 성 관람은 포기해야 했다.

4시쯤 공항으로 이동을 시작하여 6시 경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가 손자에게  줄 과자를 좀 사고, 탑승장 앞의 의자에 앉아 충대 김수태 교수와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비행기에 올라 8시 20분에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9시 반쯤 도착했다.

대기하고 있는 버스를 타고 꼬박꼬박 졸며 공주에 도착하니 12시 반이 되어 있었다. 며칠 동안 야외에 노숙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서 피곤한 몸을 뉘니 심신이 편안하여 천국이 따로 없다. 그래서 집이 있고, 가정이 있는가 보다.

테이프 속 멀어져가는 가카라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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