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터키는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

터키는 우리 기준으로 볼 때 아시아 대륙의 끝이자 유럽 대륙이 시작되는 곳에 위치한 먼 나라다. 그런데 비행기로 약 10 시간을 가야 하는 먼 나라임에도 왠지 그 이름이 낯설지가 않다. 왜 그런가.

▲ 한국 - 터키 문학인대회에서 논문 발표를 위해 자리한 한국 대표들. 맨 왼쪽 여성분은 에르지에스대학 한국어과 학과장, 우한용(서울대), 홍태식(명지대), 필자, 채길순(명지대), 오른쪽은 사회자인 시인 박경현(경찰대) 교수다.

학창 시절 배웠던 오스만튀르크 제국 운운의 기억 때문인가, 아니면 우랄 알타이어족의 언어를 같이 사용한다는 동질감 때문인가. 우리나라의 세계적 여자 배구 선수가 맹활약하고 있는 나라이기 때문인가. 그도 아니라면 한때 야릇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며 성행했던 터키탕이라는 목욕탕 이름 때문인가.

터키는 6.25전쟁 때 미국, 영국, 캐나다에 이어 네 번째로 많은 약 5천여 명의 병력을 파병해 매우 고마운 나라로 인식되어 있다.

물론 2차 대전 후 위기에 빠진 나라의 위상 때문에 나토 가입을 위해 선택한 자구책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여하튼 약 칠백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전투에 참여한 그 희생은 우리에게 그 나라를 ‘형제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기억하게 했다.

이 말이 더 큰 실감을 얻게 된 것은 2002년 한일월드컵 3,4위전 경기 덕분이다. 기적적으로 4강에 진출한 두 나라는 아쉽게 결승 문턱에서 좌절했지만 3위와 4위를 결정짓는 경기에서 만나 명승부를 연출했다.

매스컴에서는 멀리 고구려까지 거슬러 올라가 두 나라의 민족이 같은 계통임을 역설했고, 시민들은 경기장에 그 나라의 대형 국기를 들고 나와 응원했다.

패배한 팀이나 승리한 팀이나 모두 박수를 받았고, 선수와 관중들은 하나가 되어 승리를 축하하고, 패배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다. 그 이후 두 나라는 더 활발한 교류와 유대감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연유로 많은 사람들은 터키, 하면 우선 형제의 나라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두 나라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도 하고, 또 문화와 종교는 물론 역사적 배경이 완전히 달라서 진정한 형제애를 나누기에는 거리감이 있다. 시간과 경제적인 문제로 이웃나라처럼 쉽게 오갈 수 있는 관광지도 아니다.

그런데 마침 내가 회원으로 있는 한 단체에서 두 나라의 문학인 교류 사업 행사를 한다고 연락이 와서, 그 나라 대학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양국의 문학 관련 논문 한 편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논문 발표야 하루 정도면 되는 것이고 나머지 날은 그 나라를 돌아보는 얻기 어려운 기회가 될 것 같아 즐거운 마음으로 동참을 했다. 

터키 땅에 발을 딛다

출발하는 날 오전에 3시간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짐을 챙겨 4시 반에 터미널에 가서 예약한 차표를 찾아 40분에 출발하는 인천공항 행 버스를 탔다. 7시 20분쯤 공항에 도착했다.

▲ 이번 대회에 참석한 모든 분들이 에베소 도서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약속한 시간이 남아서 한식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고, 8시 반쯤 약속 장소에 가서 책을 좀 보고 있노라니 작년에 몽골에 같이 갔던 일행들이 도착하기 시작하여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이번에 새로 참여한 분들과 수인사를 나누고, 회장님의 당부 말씀을 포함한 간단한 출정식을 하고, 탑승 수속을 거쳐 짐을 부치고, 출국 심사를 받고 나서 면세점 구역으로 들어갔다.

밤늦은 시간이라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고 있어서 원하는 물건을 구입할 수는 없었다. 11시에 터키 항공 비행기에 탑승하여 50분에 예정대로 이륙을 했다. 졸다 깨다 하며 지루하게 보내는 시간이 이어졌다.

새벽 4시 40분에 이스탄불 공항에 도착했다. 시차가 6시간이다. 줄을 서서 많이 기다려야 하는 입국 수속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으나 약속된 가이드를 만나지 못해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만났다.

그를 따라 국내선 환승 지역으로 이동하여 동행한 분이 사는 커피 한 잔을 마시고 기다리다가 7시에 앙카라로 가는 국내선 비행기를 탔다. 8시에 출발하여 약 한 시간 후 이 나라의 수도인 앙카라에 도착했다.

짐을 찾아 이 나라에 있는 동안 우리를 태우고 다닐 버스에 싣고, 첫 일정으로 곧 아나톨리아 문명박물관으로 가서 그 안에 소장된 유물을 관람했다.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로 태양이 솟는 곳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지중해, 흑해, 에게 해의 세 개 바다에 둘러싸인 이 반도는 소아시아로 불리었으며 현재 터키의 중심 영토를 이루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기후가 온난하고 매우 기름진 땅으로 곡물 재배가 잘 되는 지역이라 한다.

▲ 아나톨리아 박물관 내부의 유물 중 일부

따라서 역사적으로 여러 민족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으며, 뺏고 빼앗기는 혼란 속에 서로 다른 문화가 뒤섞이고 충돌하기도 했다. 그런 결과로 유럽과 아시아, 육지와 바다가 만나는 이곳은 동서양의 문화와 문명이 교차하는 지점이 되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민족이 세운 나라들이 이 지역에서 명멸했다. 따라서 여기에는 다양한 문화재들과 여러 시기의 유물들이 혼재할 수밖에 없다.

이 박물관에는 이 지역에서 출토된 선사 시대부터 여러 시기의 많은 유물들이 잘 정리되어 전시되고 있었는데, 특히 이곳을 중심으로 번성했던 히타이트 제국의 철제 유물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여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유물들을 상세히 보자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았다. 박물관 야외에도 거대한 유물들이 즐비했다.

높은 곳에 위치한 박물관에서 바라보는 앙카라 시내의 풍경 또한 아름다웠다. 그러나 가이드의 말을 들어보면 지하에도 워낙 유적과 유물이 많아 언덕을 깎지 않고 그 위에 그대로 건축한 건물들은 생활에 매우 불편하고, 또 도로 공사를 위해 쉽게 땅을 파헤치지 못하기 때문에 도로 역시 아주 좁고 불편하다고 한다.

이런 문제점들은 개발을 제한하고 억제하는 우리나라의 고도(古都)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일이다. 개발과 보존의 조화를 어떻게 해 나가야 할지, 그건 풀기 어려운 영원한 숙제인가 보다.

다음에 찾은 곳은 한국공원이다. 이 나라는 1923년 오스만 제국이 망하고 난 뒤 공화국으로 새롭게 출발했는데, 1973년 독립 50주년을 맞아 우리나라에서 6.25전쟁 참전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만들어 기중한 공원이다.

▲ 한국 정부에서 건립하여 기증한 터키의 한국전쟁 참전 기념탑.

불국사 석가탑의 모양을 본떠 만들어진 추모탑과 함께 한국에 파병됐다가 사망한 약 7백 명의 젊은이들 이름이 새겨져 있고, 대형  태극기와 이 나라 국기가 나란히 게양되어 있었다. 우리는 잠시 그 앞에 서서 묵념을 올리며 먼 타국에서 산화한 젊은이들의 넋을 위로했다.

이 나라에 와서 첫 식사로 점심을 먹었는데, 수프와 빵, 과일이 메뉴였다. 이 메뉴는 이 나라에 있는 동안 내내 이어졌다. 어느 식사 자리이든 빠지지 않는 건 올리브 오일과 과일이었다.

일행들은 빵이나 야채에 그 오일을 뿌려 맛있다고 먹는데, 내 비위에는 잘 맞지 않았다. 맛은 경험이라는데, 내가 그 오일을 먹어본 경험이 없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일까.

소금 호수와 카이세리 가는 길

앙카라 시내를 지나다 보면 꽤 높은 곳에 위치하여 어디서나 잘 보이는 이 나라 초대 대통령의 무스타파 케말 파샤의 묘가 있다. 묘라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산에 있는 둥근 무덤을 연상해서는 안 된다. 고대 신전의 모양으로 건설된 거대한 건물 안에 시신이 안치된 이슬람 식 무덤이다.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시험을 대비하여 외웠던 케말 파샤라는 이름, 그는 원래 현재의 그리스 지역인 살로니카에서 태어났으나 터키 독립과 영토 보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 혹은 국부(國父)로 존경 받고 있다.

또 그를 가리키는 호칭 가운데 아타튀르크라는 게 있는데 이 칭호는 터키 국회에서 헌정한 것으로 터키 사람들의 아버지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는 수백 년 이어오던 오스만 제국이 연합국의 공격으로 위태롭게 된 상황에서 지휘관으로 갈리폴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터키 사람들의 우상이 되었으며, 그 뒤 여러 전투와 외국의 침략에 맞서 싸워 그 허울만 남은 조국 터키의 영토를 지키고 독립을 이루어낸 영웅이다.

▲ 카이세리 시내에 남아 있는 옛날 성벽, 지급도 견고한 모습이다.

그뿐 아니라 정권을 잡은 후 수백 년 이어지던 이슬람 식 종교적 관행을 과감하게 폐지하고 세속주의를 도입했으며, 근대적인 여러 제도 도입은 물론 여성의 참정권을 비롯한 국민들의 민주적 권리 신장에도 크게 기여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기득권 세력의 반발과 일부 비판적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터키 건국의 아버지이자 외세로부터 위기의 조국을 건져낸 영웅이며 터키 국민들을 근대적 국가에서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국 어떤 사람은 그를 이승만, 이순신, 박정희를 합해 놓은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이 나라의 여러 도시 곳곳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불행하여 마흔이 넘어 처음 결혼한 여자와는 곧 이혼을 하고, 아이들 십여 명을 입양하여 키웠으나 술과 담배 등으로 건강을 해쳐 1938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애초에 이 묘는 이스탄불에 있었으나 12년 동안 공사를 하여 이 도시로 이장하였다.

묘는 파르테논 신전의 모양을 본떠 만들었으며, 광활한 면적에 아름다운 나무와 꽃으로 잘 꾸며져 있고, 육군, 해군, 공군 현역 군인들이 집총을 한 채 경비를 서며 지키고 있다. 그들이 시간에 맞춰 진행하는 근무 교대식은 유명한 관광 상품이 되고 있다.

죽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살아 있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고생시키는 게 과연 어떤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일일까. 새삼 역사, 영웅, 죽음 등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점심을 먹고 앙카라를 떠나 우리가 국제학술회의와 두 나라 문학인 교류 행사를 진행할 카이세리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버스 창밖으로는 끝없이 넓은 평야가 이어진다. 야트막한 산조차 보이지 않는 지평선이 가물가물하다. 도로는 4차선으로 시원하게 뚫려 있어 버스는 거칠 것 없이 달린다.

밭에서 기르는 작물들은 밀이 가장 많고, 그 다음으로 메론, 포도, 사과 등 과일 재배도 많이 한다고 한다. 이곳 기후 특성상 밀은 3모작까지 가능한데 지력 문제와 소비 때문에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한다. 곳곳에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공급하는 대규모 시설이 눈에 띄었다.

차창 밖으로 광막한 황야 같은 평원을 질리도록 바라보아야만 했기에 처음 보는 낯선 풍경임에도 더 이상 신기하지도 않고 호기심도 생기지 않는다.

차안에서는 잠에 들지 못하는 평소 습관 때문에 그냥 하품만 하며 참을 수밖에 없었다. 밭에는 커다란 수박이 버려진 채 그 줄기와 함께 썩어 가고 있었다. 수확하고 남은 건지, 상품성이 없는 건지 알 수 없으나 그게 거름이 되어 다음 농사에 도움을 준다니 그 또한 자연 선순환의 하나랄까.

▲ 소금 호수가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이어져 있다.

곧 소금 호수에 도착한다는 가이드의 말에 잠에 빠졌던 사람이나 졸던 사람들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밖을 내다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거대한 호수가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이 호수는 서울 면적의 약 세 배에 이르는 넓이인데, 우기에 눈과 비가 내려 고인 물이 건기에 건조되면서 소금을 만들어낸다고 한다. 원래 소금은 바다에서 나는 것인데, 오랜 세월에 걸친 지각 변동으로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바다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에서도 소금이 산출되는 곳이 적지 않다.

여기도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 육지로 변한 곳인데, 아래 소금이 쌓인 층 위에 물이 고이면 그 소금이 녹아 소금물이 되고, 건기에 물 유입이 중단되면 되면 물이 증발하면서 소금이 만들어지는 그런 곳이다. 물을 끓이거나 일부러 인공적으로 증발되는 시설을 만들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그걸 해결해 주니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예전에는 물자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다. 사람들의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은 그 산출되는 곳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는 자연히 매우 귀한 대접을 받았다.

고대 유럽에서는 공직자들에게 소금으로 급여를 주기도 했는데, 그게 요즘 월급을 뜻하는 단어의 어원이 되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각 지역에 산간 오지로 소금을 짊어지고 팔러 다녔던 사람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이 분포되어 있다.

이런 소금이 여기 호수에서는 지천이다. 건기에 물이 건조되면서 생긴 소금은 그 양이 엄청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커다란 여러 대의 불도저가 바닥의 소금을 모아 한쪽으로 쌓고 있었다. 그렇게 채굴된 소금은 근처의 공장으로 옮겨져 가공과 정제 과정을 거쳐 이 나라 전체 국민들의 소금 소요량을 충당한다고 한다.

아스라이 이어지는 소금밭이 끝나는 곳에서 물을 만나 펼쳐진 호수의 지평선은 아무리 눈을 치켜뜨고 바라보아도 그 끝이 가늠되지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은 이 호수 하나만으로도 큰 축복을 받은 셈이다.

만약 이 호수가 없었더라면 많은 소금을 다른 나라에서 수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만들어내야 했을 것인데 그 막대한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거기서 채취된 소금으로 만든 기념품, 소금 제품, 소금을 원료로 만든 비누 같은 것을 파는 가게에서 서툰 한국어로 손님을 유치하는 젊은이들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눠준 소금 원료로 손을 씻고 나니 매우 부드러워진 느낌이 있긴 했으나 선뜻 구입할 마음은 나지 않았다.

호수 구경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 출발했다. 출발하기 전, 바로 길가 노점에서 과일을 좀 샀는데, 저녁에 먹어 보니 값은 싸고 맛은 꽤 있었다.

▲ 카이세리 시내의 풍경, 트램 열차가 시내의 주요 교통수단이다

지루할 정도로 이어지는 평야 지대를 지내는 동안 비슷한 풍경 때문에 눈이 피로하기도 해서 잠깐씩 억지로 눈을 붙이기도 하고,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기도 하면서 마을과 작은 도시 몇 개를 지나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창 밖에 낯선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파도키아 지역에 들어선 것이다.

카파도키아는 특정 지명이 아니다. 화산 활동으로 생긴 응회암이 침식과 풍화 작용으로 인해 괴이한 모습으로 변한 지역을 통칭하는 이름이기도 하고, 이곳에 위치해 있던 고대 왕국의 이름이기도 하다. 대개는 악사라이, 네브세히르, 카이세리 등의 도시를 합해서 부르는 이름이라고 한다.

해발 3천에서 4천 미터에 이르는 항삼산과 에르지예스 산에서 분출한 화산재가 변한 용암들이 세월이 지나면서 무른 부분은 깎이거나 떨어져 나가고 단단한 부분은 남아 버섯 모양의 기이한 바위 모습들이 생겨났다. 또한 대규모 협곡과 사막을 형성하기도 해서 그 풍광이 아주 아름답다고 한다. 여기 관광은 행사를 마친 후 하기로 기약하고 우리는 그저 창밖으로 그 풍광을 눈요기로 맛만 보며 지나쳤다.

생각 같아서는 차에서 내려 자세히 보고 싶었으나 시간이 없어 지나친 풍경 가운데 가장 아쉬운 것은 사람들이 바위에 굴을 뚫어 살던 집들이었다. 여기는 화산으로 인한 사암 지대라 나무가 자라기 어렵고, 또 대부분의 돌들이 무른 성질을 가지고 있어 건축 자재로 사용하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집을 지을 재료가 없는 사람들이 쉽게 뚫을 수 있는 바위에 굴을 파서 살기 시작했다. 사람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하는 동물이라 했던가. 생존을 위해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를 가진 인간들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그것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선택과 의지를 보여주었다.

그게 바로 인류의 문병 발달사이고, 동시에 문화 발전의 역사 아니겠는가. 또한 원시 시대 이래로 우리나라 조상들도 굴을 최초의 집으로 삼아 살았으며, 가까이로는 식민지 시대나 6.25전쟁 때도 피난살이를 하며 임시로 굴에서 거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카이세리 시내의 시장 풍경

1930년대 빈민들의 유형 가운데 혈거민(穴居民)이라는 게 있었고, 김동리는 광복 후 ‘혈거부족(穴居部族)’이라는 단편소설을 통해 도시인들의 팍팍한 삶을 묘사해 내기도 했던 게 그 증거다. 이곳 굴에 살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궁금하기는 하지만 직접 내려 확인해 볼 수 없으니 그저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저녁 6시 경에 카이세리에 도착했다. 시내 외곽에 있는 호텔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잠시 휴식을 취하고 호텔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빵과 고기와 국수가 저녁 메뉴다. 어느 식당에서나 빵은 무료로 제공한다. 또한 요청하면 얼마든지 다시 갖다 준다. 그만큼 빵 인심 하나는 최고다.

그러나 여기 빵은 우리나라에서 먹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안에 앙금이 들어 있는 건 거의 없고, 그냥 밀가루만 반죽하여 구워낸 빵은 그냥 먹기에는 좀 팍팍하고 맛도 별로 없다.

야채와 오일을 겸해 먹어야 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평소 빵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내 입맛에는 그저 낯설기만 하다. 다른 음식들도 대체로 짠 편이다. 소금이 귀한 대접을 받던 전통을 고수하기 때문일까. 

에르지예스 대학과 양국 문학인 교류 대회 

행사가 오후에 있으므로 오전에는 카이세리 시내 관광을 하기로 했다. 원래는 카이세리 성을 관람하려 했으나 현재는 관광객 출입을 금지하고 있어서 아쉽게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 에르지에스 대학교 교정, 재학생 5만 명에 교수만도 5천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 도시는 애초 카파도키아 왕국의 수도로 마자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로마제국 시절 점령당해 황제의 거리라는 뜻의 카이사레아로 고쳐져 그게 현재의 이름이 되었다.

그 뒤 셀주크투르크에게 점령당했다가 13세기에는 몽골 티무르에게 함락되었고, 그 후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다가 이집트와 시리아 왕조의 지배를 거쳐 오스만튀르크에게 다시 점령당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처럼 이 도시는 숱한 이민족의 점령과 지배를 받아왔는데, 현재는 인구 약 100만의 도시로 카파도키아 지역의 중심 도시 역할을 하고 있다. 바울이 활동했던 이곳은 성경에 카이사리아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이 도시는 터키에서 네 번째로 높은 에르지에스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산은 해발 약 4천 미터의 사화산으로 정상에는 사철 내내 만년설이 쌓여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이 산을 올라갈 수도 있으며, 산 중턱에 호텔을 비롯한 관광 시설이 잘 되어 있다 한다.

산 아래의 여름 날씨와 달리 정상 부근은 기온이 매우 낮아 상당히 춥다고 한다. 또 이 산에는 높이에 따라 각종 수목과 꽃이 자라고 있으며, 유명한 터키 아이스크림 재료인 난초과 식물의 뿌리가 많이 산출되고 있다 한다.

이 도시는 주변의 광활한 농토에서 재배되는 각종 농산물의 거래와 유통이 매우 활발하고, 최근에는 급속한 산업화로 설탕과 시멘트, 가전제품, 직물, 항공 부품 등 공업도 매우 발달해 있다. 금 세공품과 양탄자도 이 도시의 특산물이다.

우리 일행은 거리 구경을 하며 재래시장으로 들어갔다. 거리는 매우 깨끗했고 오래된 종교 시설이나 건물들이 이 도시의 유구한 역사를 증언하는 듯했다. 재래시장은 어느 나라를 가나 비슷하다.

주로 서민들이 애용하는 재래시장에는 각종 생필품을 비롯하여 현지에서 생산된 상품들이 쌓여 있고, 물건을 팔려는 사람과 사려는 사람들이 어울려 흥정을 벌이며 떠들썩한 게 특징이다.

▲ 이 나라 시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초대 대통령 케말파샤의 동상

그렇게 팔딱팔딱 살아 있고 또 활기에 넘치는 시장은 바로 삶의 현장이자 세상의 축도가 아닐 수 없다. 대기 온도는 30도를 넘나들고 있지만 습도가 높지 않아 그늘에  들어서면 시원했다.

시장 구경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버스를 타고 언덕을 올라가 식당으로 들어갔는데, 식당 이름이 터키 말로 다섯 개의 언덕이란 뜻이라고 한다. 큰 식당 전체가 아주 천천히 회전을 하고 있었는데, 느낌으로는 그 속도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미했지만 밖에 보이는 풍경이 바뀌는 것으로 보아 돌아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코스 요리로 이 나라의 몇 가지 음식이 나왔는데, 우리는 바로 오후에 있을 행사의 출정식 비슷한 마음으로 약간의 긴장 속에 건배를 하며 의지를 다졌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곧 에르지에스 대학교로 향했다. 이 대학 이름은 바로 도시를 감싸고 있는 산 이름을 따서 붙여졌는데, 이 대학은 현재 재학생 5만 명에 교원 수가 5천 명이 넘는 대규모의 대학이다.

터키에는 약 10개의 대학에 한국어과가 개설되어 있다는데, 이 대학에도 한국어과가 설치되어 있어 우리가 이 대학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한국어과에는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괵셀 교수와 역시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공부한 그 부인이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데, 현재는 그 부인이 학과장을 맡고 있었다.

대학은 방학 중이라 학생들이 뜸했지만 오래된 대학의 흔적은 곳곳에 보였다. 건물들이 비교적 깨끗하고 정원과 나무들이 잘 가꾸어지고 있어서 아름다웠다.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그 학과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대학원생들과 연구원들이 나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초면이지만 이미 한국에서 우리 단체와 행사를 한번 가졌던 괵셀 교수는 구면의 회원들과 더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회의실로 들어가 개막식과 함께 행사가 시작되었다. 회장님의 인사를 겸한 개회사, 그 대학 부학장이라는 분의 환영을 겸한 축사, 그리고 참석자 소개와 행사 진행에 관한 안내가 있었다.

곧 이어 논문 발표가 시작되었다. 한국 측에서 네 명의 논문 발표가 있었고, 터키에서도 네 명이 발표를 했다. 나는 세 번째 발표자로 나서 이미 배포된 논문의 내용을 요약해서 정해진 시간 안에 발표를 마쳤다.

내가 발표한 논문은 ‘로망스의 초월적 보편성’이라는 제목으로, 터키의 소설가 무라트 툰젤이 쓴 “이난나”라는 장편소설과 우리나라 이광수가 발표한 “유정”이라는 장편소설을 비교 분석한 내용이다.

그 두 작품이 로망스 양식에 해당하는 작품이라는 전제 아래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로망스 장르의 소설이 갖고 있는 보편적 특징 네 가지를 추출하여 이 시대 로망스 양식이 갖는 특징을 밝혀 보려고 한 게 논지의 핵심이었는데, 이 분야 전문적 학자들의 모임이 아니어서 얼마나 내 생각이 설득력 있게 전달되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 측 네 명의 발표가 끝나고 터키 분들의 한국어 학과 현황 소개와 한국어 교육에 관한 내용, 그리고 한국 문학과 터키 문학에 나타난 공통점 등의 발표가 있었다.

발표가 끝난 뒤 지정 토론자들의 논문에 대한 질의와 답변이 이어졌다. 긴 시간의 논문 발표와 토론 순서가 끝나고 곧 이어서 양국 시인들의 시낭송 순서가 있었다. 각자 준비한 시를 낭송하면서 학술 논문 발표로 무거웠던 분위기를 전환하며 문학적 흥취 속에 잠기기도 했다.

이 대학에서 특이했던 것은 우리나라와 달리 행사장인 건물 안에서 밖으로 나오면 저절로 문이 잠겨 열쇠 없이는 다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어 좀 불편했던 점과, 한국어를 공부하는 터키 사람들의 한국에 대한 호의가 두드려졌던 점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피곤하고 지친 몸으로 버스에 올라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은 호텔 식당에서 먹었는데, 대충 식사를 마치고 마침 호텔 야외에서 열리고 있는 어떤 현지인의 성대한 약혼식 광경을 재미있게 구경했다.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한 사람들이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며 음악 연주와 불꽃놀이까지 아주 즐거운 시간이 이어졌는데, 여기도 돈이 많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많이 난다 하니 자본주의 사회는 어딜 가나 빈부의 차이가 있게 마련인가 보다.

호텔에서 이런 행사를 치르려면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고 하는데, 오늘 우리가 본 이 집은 정말 부자인가, 아니면 체면에 따라 부자 행세를 하는 것인가.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자식 혼사와 부모 장례로 빚을 지는 사람이 꽤 많지 않았던가. 잘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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